2017년 6월 25일 일요일

열왕기상 19장 9~14절 “여백의 신앙”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2017년 6월 25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고별설교, 정대진 목사
열왕기상 19장 9~14절 “여백의 신앙”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20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영성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내적인 성숙을 위한 고독의 길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이 문장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삶을 바꾼 한 구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네 개의 영어단어를 말하곤 합니다. 해당되는 단락을 자세히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긴급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앉아 있다.’ 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들에 도움이 되기보다 종종 방해가 됩니다. 
We always seem to have something more urgent to do and ‘just sitting there’ and ‘doing nothing’ often disturbs us more than it helps.

하지만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쓸모없이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은 모든 기도의 핵심에 속합니다. 
But there is no way around this. Being useless and silent in the presence of God belongs to the core of all prayer. 

처음부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무질서한 소음을 더 크게 듣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용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In the beginning we often hear our own unruly noises more loudly than God’s voice. This is at times very hard to tolerate.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But slowly, very slowly, we discover that the silent time makes us quiet and deepens our awareness of God.

그러고 나서 곧 우리는 분주함으로 빼앗긴 순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Then, very soon, we start missing these moments when we are deprived of them,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점점 더 많은 침묵 속에 이끌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곳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내면의 추진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and before we are fully aware of it an inner momentum has developed that draws us more and more into silence and closer to that still point where God speaks to us.

(중략)
고독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What do we do in our solitude? the first answer is nothing. Just be present to he One who wants your attention and listen!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쓸모없는” 존재감 속에서 명확하게, 우리는 힘과 통제에 대한 망상을 점점 죽이며 우리 존재의 중심에 숨겨진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It is precisely in this "useless" presence to God that we can gradually die to our illusions of power and control and give ear to the voice of love hidden in the center of our being.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는 들리는 것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노력과 커다란 세심함을 필요로 합니다. 
But "doing nothing, being uesless" in not as passive as it sounds. In fact it requires effort and great attentiveness.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현존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청을 요구합니다.
It calls us to an active listening in which we make ourselves available to God's healing presence can be made new. 

저는 오랫동안 신앙의 성장을 위해 “doing manything, being usefull”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배웠고 거기에 동의하며 강박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도를 열심히 오래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며, 교회의 각종 공적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성실히 봉사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뜨거운 성령체험과 극적인 간증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흔히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내면을 가득히 채운 감정적인 경험을 이상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오해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성공신화가 교회에 유입되어 빚어낸 거짓된 신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오히려 스스로를 더욱 옭아매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라는 이 따스한 문장을 통해 참된 복음이 안겨주는 해방을 경험하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고 눈부신 이적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가 폭군 아합에게 예고한대로 온 이스라엘에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또한 한줌의 보릿가루와 적은기름으로 “사르밧” 마을에 사는 과부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강력한 사역들은 갈멜산에서 거둔 찬란한 승리에서 그 절정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하루 종일 자신들의 신을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제단을 회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불이 그곳에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그 사건의 주체는 엘리야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그 황홀한 사건 한 복판에 있던 엘리야는 몹시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했던 삶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아합과 이세벨이 이제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과 자신을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권력은 결코 그 탐욕을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기가 꺾이기는커녕 더욱 잔인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엘리야는 조금 전까지의 호기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만 로뎀나무 아래에서 쓰러져 죽음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며 위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운을 차린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주님을 따르는 예언자는 오직 자기만 남았는데, 자신마저도 이세벨에 의해 목숨을 잃을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소연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산 앞에 세우시며 당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1~1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고 그 앞을 주님이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불”이 타올랐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크고 강력한 자연현상들로서 지난날 그가 보여준 화려한 이적들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셨을까요? 12절에 보면 불 다음으로 “세미한 소리”, 즉 아주 작고 가녀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앞서 나타난 웅장한 장면들과는 명백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크고 화려한 모습에 눈과 귀를 뺐길 때는 결코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음성은 오로지 침묵할 때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잔인한 고독 속에서 굴욕적인 무력감으로 처절히 몸부림 칠 때에만 비로소 들리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굉장한 성공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며 어느 샌가 하나님을 오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쓸모 있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많은 일을 하는 것에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돌보지 못했고 그 결과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를 향해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는 여백의 신앙이 가진 위대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크고 강력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도, 그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것이 거짓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열정적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은 열등하고 고상하게 조용히 묵상하는 것만이 옳다는 의미도 더더욱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참 생명과 진리를 구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설령 입을 닫고 조용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내면 깊숙히 거세게 출렁이는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침묵이 아닙니다. 반대로 큰 소리로 외쳐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무장해제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훌륭한 침묵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생명의 진리를 말씀하시고자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위로와 쉼을 주시고 호렙산으로 부르시며 작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온 몸과 마음으로 응답한 엘리야는 보다 성숙한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주님께 온전한 침묵으로 나아가, 어느새 내면 가득히 들어차 있는 신앙의 거품을 걷어내고 마음에 여백을 두어야 합니다. 소위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군중심리에 속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자극시키는 몇몇 목회자들의 선동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교묘하게 교회에 스며들어온 성공신화에 현혹 되어서도 안 됩니다.

대신, 여러분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전존재와 온 인격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참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나다운, 건강한 자아를 일구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당부입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재작년 말에 여러분께 부임하고 첫 번째 설교로 룻기를 본문으로 삼아 “일상”의 중요성을 말씀 드렸습니다. 실수와 좌절, 굴욕과 패배, 그리고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생생한 여백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으로 살아가시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여백의 언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 속을 빼곡히 채운 글자 그 자체가 아닌 그 사이를 내밀하게 굽이쳐 흐르는 여백을 통해 저에게 말을 걸어오시며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백의 일상에 근거한 여백의 신앙이 교회에서 조차 쉼을 빼앗기며 매일 같이 미친 듯이 내달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저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여백의 신앙”은 제 목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곳에 오며 몇 가지를 다짐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에 치우친 집회가 아닌 균형을 갖춘 예배를 개혁교회 전통에 따라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 목회 업적을 세우기 위해 소모적인 행사를 일방적으로 진행하지 않는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여러분 안에 제 편을 만들지 않고 두루두루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를 통해 예배와 일과 관계에서 누리는 건강한 여백을 전하려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저는 여러분에게 너무나 부족했고 미숙했습니다. 그 결과 저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한 채 내면의 여백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그동안 ‘괜찮다, 괜찮다.’ 습관처럼 말은 했지만, 어느 날 문득 제가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을린 가슴을 안고 이를 앙다물며 이 자리를 버텨내는 게 과연 바람직 한 것 인지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5월 초에 은퇴를 앞둔 이종윤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며 올해 안에 사임 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든 저를 먼저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뜻하지 않게 대구에서 이력서를 넣어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부르시는 때에, 부르시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지었고 마침내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의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일 년 육 개월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조용히 저를 응원해준 소중한 손길들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생각보다 일찍 끝을 맺지만 저에게 보여준 과분한 사랑과 격려는 앞으로 제 목회에 소중한 자양분이 되리라 믿으며 언제, 어디서든 여러분을 잊지 않고 기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끝으로, 엘리야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을 온 마음 다해 축복하며, 지난날 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중한 통찰을 안겨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전하며 이곳에서의 제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참고문헌: the essential Henri Nouwen (goo.gl/hvG2ao)


설교 후 기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너무 분주하게 살아왔습니다. 존재감 있게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몹시 지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 눈에 띄는 무언가로 함부로 자신과 타인의 믿음을 가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크고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 하셨듯이 저희에게도 시나브로 나지막이 다가오심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 말씀 따라 우리도 헛된 강박과 욕망을 내려놓고 일상 가운데 온전한 침묵으로 진리 앞에 나아가 여백의 신앙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오셔서 진실한 여백의 언어로 말씀을 전하시며 일상을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쳐 쓰려져 있는 저희에게 참된 위로와 힘을 주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삶의 여백을 빼앗긴 채 짓눌리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저마다 말 못할 상처와 아픔들을 따사로이 품어주시고 스스로를 더욱 온전히 긍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더위 가운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진실하고 굳건한 미소를 입가에 허락해 주시옵소서. 가정 가운데 평화를 주시며 학교와 직장에서 맡은 바 역할들을 슬기롭게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앞날을 위해 고민하며 힘겹게 준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까마득한 불안감 속에 헤맬 때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더욱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군복무 중인 청년들과 여러 사정으로 해외 있는 지체들을 안전히 보호하여 주시고 다시 만날 때까지 평안히 지켜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는 여백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십니다.

예담: 아멘! 많은 것을 하며 쓸모 있게 존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진정한 침묵과 여백의 신앙으로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저희의 뒤틀린 믿음을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일상 가운데 여백의 신앙을 지켜나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