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2017년 6월 4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사도행전 2장 1~13절 "말이 통하는 세상이 오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이미 몇 차례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작년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한인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때, 선교지를 좀 더 잘 이해하고 돕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제 마음에 가장 깊은 여운을 안겨준 책은 지난 2012년에 김종익씨의 번역으로 개정되어 출간된 <적도에 묻히다> 였습니다.
이 책은, 그 전까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독립운동 역사를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인도네시아에서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단”입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에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후 가장 곤란해 했던 것은 그곳에 있던 20만 명이 넘는, 네덜란드와 영국군을 비롯한 서양인 포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시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1942년 6월 14일, 약 3천명의 조선 사람들을 ‘군무원’(軍務員)으로 뽑아서 훈련시키고, 인도네시아에 있는 서양인 포로수용소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그들 중에 “이억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떠날 때부터 이미 독립운동을 할 결심을 하며 조심스럽게 틈틈이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12월 29일 밤 11시, 웅아란 산기슭에 위치한 군부대에 마음이 통한 열 명의 사람들이 훈련장 한 쪽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의 결성을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과 폭력에 맞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열심히 힘을 모아 싸울 계획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하얀 천에 피로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그 결심을 굳게 지키고, 훈련 중에 미리 연습하고 외운 당의 주제가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함께 불렀습니다.
저는 이 뜻깊은 역사적인 순간을 책으로 읽으며 다른 독립운동과는 분명 구별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외로움과 희망을 느꼈습니다. 힘없이 다른 나라에 침략 당한 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분명 너무나 비참하고 슬픈 일입니다. 하물며 그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멀고 먼 낯선 곳에서 적군을 위해 일한 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절망을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어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어와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를 비롯한 여러 생소한 언어들 한 복판 속에서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폭력과 억압 속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독립과 해방을 꿈꾸었습니다.
이러한 “고려독립청년당”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저는 문득 오늘 본문 말씀 속 부활 공동체 사람들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말이 통하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시대를 살아갔던 평범한 유대인이었다고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결국 1급 반역범으로 십자가에서 분명히 처형당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어 대는 그의 제자들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 땅 안에서도 가장 멸시 당했던 “갈릴리” 마을 출신입니다. 본문 7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말투만 들어도 출신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투박한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이야기에 대한 신뢰는 더더욱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때는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이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다음날부터 50일 째 되는 날인데, 유대인들이 보리농사를 지은 결실을 두 개의 빵으로 구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이 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로 지켜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너무나 중요한 명절이었기 때문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경건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요란하게 거리를 채우면 채울수록 예루살렘에 남아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렸던 부활 공동체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정작 말이 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은 예루살렘 군중으로서는 마치 생소한 외국어처럼 들렸습니다. 더욱 정확히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그저 못 배우고 교양 없는 갈릴리 촌사람들의 헛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활의 증인들은 쉽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인도네시아 산기슭에 모인 열 명의 “고려독립청년당”처럼, 냉혹한 단절과 외로움의 벽을 뚫고 복음이 안겨주는 위대한 희망을 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처럼 누구도 귀 기울이거나 통할 수 없었던 부활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모인 이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나타나시어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이 일의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신구약성경 모두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은 결코 하나님의 그림자 혹은 기운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일한 높이와 권위를 가지시어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성령님을 왕이나 예언자 같은 몇몇 위대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는 특정 사람들만이 아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심을 믿는 다면, 결코 잊지 말아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다가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단한 믿음과 열정을 보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완벽하게 깨끗하고 늘 옳아서가 아니라, 많은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성령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풍성하게 다가오신 사건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 때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신비로운 일들입니다. 먼저 2, 3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 3절 말씀은 이 때 성령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성령님은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본문 속 성령님의 강렬한 모습을 우리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외형은 철저히 성령님 자신의 뜻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소위 “성령 운동”을 한다며 인위적으로 시끄럽고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마치 성령님을 조종하려는 어리석고 무모한 행동입니다. 오히려 성경 전반에 나타난 성령님의 모습은 정반대로 차분하고 침착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속 성령님에 대한 화려한 묘사는 그의 다채로운 모습들 중에 당신 스스로의 뜻에 따라 선택하셨을 뿐이지 결코 대표적인 특징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욱 눈여겨 봐야할 장면은 이러한 성령님께서 사람들 안에 들어오셨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4-8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여러분은 아마 신앙생활 하면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러한 “성령 충만”의 의미를 좀 더 쉽게 풀어서 이해하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가득히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날마다 가득히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찬란한 진리라 할지라도 각자의 협소한 경험과 생각의 틀로 제한하고 왜곡시킨 다면 그것은 끔찍한 거짓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 교회 사람들에게 일어난 성령 충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본문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이 통하는 세상”이 열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시골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멀리 여행을 가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놀랍게도 성령님의 가득한 임재를 통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8절에 “방언”으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가 종종 크게 기도할 때, 이상하게 중얼거리며 하는 기도 소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내용상으로나 단어의 의미로나 분명 “외국어”를 뜻합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보내러 외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령님께서는 왜 다른 신비한 많은 일들 대신에 굳이 “외국어로 말하는 사건”을 그날 모인 사람들에게 일으키셨을까요? 그것은 그렇게 말이 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날, 그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각기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예수님을 전하는 소리를 듣자 그제야 비로소 닫았던 마음을 열고 사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베드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기쁜 소식을 전했고 그 결과 사도행전 2장 41절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무려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 강조합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충만이란 곧 말이 통하는 사건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이 통하는 세상을 여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두고두고 깊이 생각해 봐야할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신교가 심각하게 지탄을 당하고 복음이 왜곡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기 힘든, 잘 들리지 않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들리게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기꺼이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은 자폐적인 신념이 아닌 참된 해방의 메시지를 세상 속에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갈릴리 사람들, 끊임없이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 곳곳에 퍼져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시고 이루신 하나님 나라는 곧 “말이 통하는 세상”이고 그러한 소통의 세상을 이루시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도네시아 웅아란 산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결성한 “고려독립청년당”의 위대한 계획들은 아쉽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주모자인 이억관씨의 행방은 아무도 모르고, 그들의 존재조차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돌아온 당원 이상문씨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 외롭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일본인 학자 부부인 우쓰미 아이코씨와 무라이 요시노리씨의 노력에 의해 1980년 7월에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그 실패한 독립운동의 주인공들인 고려독립청년당의 회원들이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있는 동안에 화려한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땅 한복판에서 기어이 외치려 했던 깊은 뜻이 마침내 세상에 통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재 전 세계적인 규모와 크기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한없이 작고 초라했음을 결코 잊지 말길 바랍니다. 하지만 중동 한 구석에서 시작된, 진실로 말이 통하는 세상을 열어가려는 남루한 사람들이 가슴 깊이 간직한 꿈은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성령님을 통해 진실한 열매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이 통하지 않는 이 세상의 냉엄한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쳐다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이 통하는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심에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성령님께서 가득히 오셔서 교회에 이루어진 첫 번째 신비로운 일이 말문이 열리는 사건임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성령님과 더불어 세상의 가로막힌 담들을 넘어 말이 통하는 세상을 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말이 통하는 세상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
우리를 둘러싼 모든 단절을 무찌르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세상의 거짓된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차츰 무더워 지는 날씨 가운데 몸과 마음 지치지 않고 늘 건강 지키게 하여 주시고 더욱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중간고사를 앞둔 학생들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고 직장생활로 고단한 청년들에게 위로를 주시옵소서. 여러 시험과 취직을 준비하는 이들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 주시고 먼 곳에 있는 지체들의 삶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성령님과 더불어 말이 통하는 세상을 열어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참고자료
우쓰미 아이코, 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적도에 묻히다』(서울: 역사비평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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