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1일 목요일

마태복음 8장 1~13절 "기적의 이면"

2019년 1월 29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8장 1~13절 "기적의 이면"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신약 성경에 담긴 네 권의 복음서는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정컨대 각각의 복음서를 최종 기록하고 편집한 공동체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은 구약성경과 가장 깊은 연속성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개의 단락으로 구분하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중심인 모세오경에 대한 존중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5~7장에 기록된 산상보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산상보훈 다음에 이어지는 첫 번째 장면인 본문 8장 1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것은 명확히 언급합니다. 게다가 산상보훈은 오경에 대한 예리한 재해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율법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간배경이 산이고 그 곳을 오르내리는 구체적인 행동을 언급하는 마태복음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모세를 능가하는 진정한 말씀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오늘 본문에 담긴 주님의 치유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본문 2~4절은 어느 나병환자를 고치신 주님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이 때, ‘나병’은 현대의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특정 질병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하기 어려운 악성피부병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합니다. 

문제는 이 병이 단지 몸에만 고통을 주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알 수 없는 질병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과도하게 자극시키기 마련입니다. 병의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단지 흉측스런 외모만으로 당시 악성피부병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 당했습니다.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 병에 걸린 한 사람이 용기 있게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 존재를 뒤덮는 모든 의미의 더러움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때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시는 방법입니다. 3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는 그 악성피부병 환자의 몸에 손을 얹고 깨끗함을 선언하시며 병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무심결에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묵상하면 할수록 굉장히 의미심장한 관경입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백부장의 하인 치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직접 보지 않고 말 몇 마디로도 얼마든지 병에서 낫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단지 그의 육체에 생긴 병리적인 현상만을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병으로 인해 겪은 총체적인 절망과 아픔을 헤치고 손바닥을 통해 따뜻한 온기를 전하셨습니다. 이를 주목해 본다면 이 사건의 핵심은 단지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버림받았다고 여겨졌던 한 사람에게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 몸으로 직접적으로 전해진 것이 주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런 까닭에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병에서 놓인 그 사람에게 매우 엄중한 요구를 하셨습니다. 바로 깨끗해진 몸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고 제사장에게 찾아가 모세 율법에 정한 방식으로 치료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분부를 통해 병자들에게 베푸신 치유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이해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그 화려한 이적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병든 이들을 향한 애끓는 긍휼과 공감으로 가득하셨을 뿐 이것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거나 군중의 열광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통적 신앙질서를 존중하시며, 병이 나은 사람을 자신의 수하로 두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5~13절에 기록된 백부장 하인 치유 기사를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대하시는 태도와 그것을 고치시는 이유를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 마을에 가셨을 때 한 로마 장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중풍 병에 걸려 집에서 몸져눕고 있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병이 나을 때, 바로 앞 단락의 악성피부병 환자가 그러했듯 당사자가 직접 예수님께 말씀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들이 대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본문에서 백부장은 자신보다 위에 있거나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 하인의 치유를 위해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노예를 뜻하는 의미로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두울로스>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파이스>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막강한 명예와 권한을 가진 로마 군 장교의 입장에서 자기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눈 감지 않았습니다. 병든 그를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시골 출신 예수님을 직접 찾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부르며 간구 하였습니다. 즉, 그는 자신 곁에 있는 약한 이웃을 돕기 위해 사회적 신분을 초월한 위대한 희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요청에 응하여 집으로 찾아가 고쳐주려 하자 백부장은 자신의 군 생활을 예로 들며 말씀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놀라워하며 그를 칭찬하였고 그 믿음대로 하인은 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시 이 사건에서도 병이 고침 받았다는 이적의 화려한 겉모습과 결과에만 눈길을 뺐기지 말아야 합니다. 앞 단락과 관련하여 더욱 명심해야할 것은 원인입니다.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을 향한 백부장의 한없는 긍휼과 사랑입니다. 어쩌면 그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간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의 행동은 일반적인 통념을 완전히 초월한 신비로운 섬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 두 개의 치유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치시는 것은 단연코 예수님의 중심 사역 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병 고침은 오늘날과 비교할 때 의료여건이 너무나 부실했던 그 시절, 질병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통치를 미리 맛보게 하시려는 은혜의 도구였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눈길이 기적의 화려함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긴 주님의 한 없이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 특별히 나 보다 약한 사람들, 내 말을 거스를 수 없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가슴에 품고 그들의 신음소리에 온 몸과 마음으로 귀 기울인다면 이미 우리는 이적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마태복음은 모세와의 관계로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분명히 화려한 이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홍해 바다를 갈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등을 본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남긴 오경의 중심에는 찬란한 기적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적은 진리를 전하는 도구일 뿐 결코 복음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기적은 때때로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변질된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 아래에서 일어난 놀라운 치유사건과 동시에 산 위에서 외치신 주님의 말씀에 잠잠히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진리 앞에 온 마음을 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섬기며 참된 회복을 이루고 전하는 진정한 이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댓글 2개:

  1. 안녕하세요. 귀한 글 은혜가 됩니다. 혹시 백부장의 하인으로 표현된 어린아이는 혹 로마권 문화에서 아들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로마권에서는 성인식을 하기전 종으로써 부름받게하는 문화적인 관점을 배웠던 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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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답을 늦게 확인했습니다.

      관련 연구를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하인'으로 번역한 헬라어 가 어린 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들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로마권에서는 성인식을 하기 전 종으로써 부름받게하는 문화적인 관점"을 저도 처음 들었는데, 흥미롭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본문을 다음에 설교할 때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따스한 은혜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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