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31일 목요일

마태복음 7장 13~29절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하여"

2019년 1월 28일, 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7장 13~29절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하여"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성경은 마치 66개의 악기로 이루어진 위대한 오케스트라와도 같습니다. 첼로와 트럼펫의 경우처럼 가까이 보면 각각 다른 음색과 모양을 가져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넓게 보았을 때는 그 모두가 하나의 위대한 화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마태복음은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 특별히 그 중에서도 바울서신과 조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통해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즉,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선행이나 수행도 죽음에 이르는 죄악으로부터 구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곳곳에서 ‘행동’을 강조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신약 원문에는 ‘행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등장합니다. 특히나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산상보훈의 결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5~20절은 거짓 예언자들을 열매 맺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6~18절 다시 한 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자연법칙을 통해 구원의 핵심을 명쾌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가시나무가 아무리 자기를 가리켜 향긋하다고 속일지라도 포도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포도’라는 열매 대신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엉겅퀴가 제 아무리 달콤한 척 자신을 포장할지라도 무화과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무화과’라는 열매 대신 거추장스러운 긴 풀잎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순리입니다. 주목해야할 사실은 여기서 부정적인 예로 짝을 지어 사용된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창세기에 매우 의미심장하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3장 17~19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놀라운 점은 그 저주의 열매로 생겨난 식물이 바로 가시덤불과 엉겅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은 사람들을 찌르고 넘어지게 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기 3장은 죄가 단순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만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더 나아가 피조세계의 조화와 균형을 파괴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원문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이 예수님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는데, 창세기 3장 18절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번역된 헬라어 가 마태복음 7장 16절의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같은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할 때 구약의 전승을 가장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어휘 선택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나무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말고도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못된 나무’의 비유를 통해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이후로 내려온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열매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곧바로 설명하셨습니다. 22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엄중히 경고하는 죄의 열매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교회 밖을 벗어난 불신앙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장 종교적인 모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적과 권능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면 당연히 그 모습에 열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직접 목격한다면 당장 저부터 우러러 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신앙적인 외형을 뒤집어쓰고 화려한 기적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철저한 죄악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의 이적이 선하게 사용된 것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그 놀라운 신비를 구하는 것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비본질인 기적에 눈길을 빼앗겨 정작 진리의 본질인 십자가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능력의 종으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정작 탐욕에 빠져 신앙 공동체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추악한 말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거창한 은사들이 얼핏 보기에는 향긋한 포도와 달콤한 무화과로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죄악으로 물든 가시나무와 엉겅퀴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런 질문을 갖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답을 방금 살펴본 거짓 예언자들과의 대조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기적과 달리, 사람들 눈에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넉넉히 품기 위해 끊임없이 져주고 양보하는 삶입니다. 때로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나누고 섬기는 삶입니다. 그 길은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럴듯한 이적과 권능으로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모습과는 한 참 거리가 멉니다. 대신 너무나 비참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철저한 낮아짐과 희생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에 가까워지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이적이 주는 위로는 지극히 가볍고 얇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이적은 오직 부활이며 그것은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생활 영역 안에 있다는 것으로 쉽게 안심하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되짚어 봐야 합니다. 그 놀라운 섬김과 겸손을 철저히 존재의 중심으로 끌어 당겨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고되고 힘겨운 사명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위로의 약속을 주십니다. 24, 2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합니다.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 등 건조기후를 가진 곳에는 ‘와디’라고 부르는 간헐하천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막처럼 건조하지만 갑자기 홍수가 내리면 급류가 흐르는 곳을 가리킵니다. 만약 그렇게 위험천만한 곳에 집을 짓는 다 할지라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운다면 그 어떤 거센 물결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 삶도 이와 같습니다. 하루하루 도무지 예상하지 못한 시련의 파도에 수없이 부딪히는 것이 인생의 분명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외로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묵묵히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를 막연한 관념으로 바꾸지 말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뼈와 살을 입히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어떠한 세파에도 무너지지 않고 진정한 생명을 지키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이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믿음’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람을 참으로 구원하는 것은 그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믿는 것이라는 진리자체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을 실천하는 참된 행동만이 우리의 믿음을 변질시키거나, 더 나아가 욕망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는 죄악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십자가를 지는 구체적인 삶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어 믿음의 반석 위에 복음의 집을 짓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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