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일 화요일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12절 "전도자의 바른 태도"

2019년 7월 2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12절 "전도자의 바른 태도"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구약 성경과 이어지면서도 구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리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학자로서의 역할만 그치지 않고 지중해 지역 곳곳을 다니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각별히 애정을 쏟았습니다. 직접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핍박이 닥쳐왔을 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미안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몰라도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교회들보다 가장 먼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에는 선교와 목회에 대한 바울의 진솔한 생각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더욱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복음을 따르고 전하는 바른 태도를 배우기 원합니다.


첫 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3~4절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맡은 그대로의 복음입니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문제는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십자가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끼고 미련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주신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내용을 덧붙일 때가 많습니다. 3절에 기록된 ‘간사함, 부정, 속임수’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과 분명히 대조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거짓을 전했다면 그 개인에게는 훨씬 유익했을 것입니다. 굳이 사람들로부터 지탄과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히려 얼마든지 나름의 방식으로 풍요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순전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고난과 핍박이 따른다 할지라도, 오히려 진리를 따르다 겪는 희생이 눈부신 영광으로 변화될 것을 주님의 부활을 통해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을 온전히 지킨 교회가 오랜 시간을 지나오며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바울을 본받아 사람을 기쁘게 하는 탐욕의 속임수를 과감히 물리치고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 째, 권위를 내려놓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7~8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우리는 지금 탈 권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던 영역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친 권위주의는 사회의 역동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 역시 굉장히 위험합니다. 정당한 권위가 건강하게 존중받을 때 공동체가 보다 질서 있게 유지 될 수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권위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 자체를 내팽겨 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권위 따위는 필요 없다는 과격한 주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권위를 교회 안에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참된 권위는 스스로 고집한다고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사도의 권위는 그 근거가 철저히 하나님입니다. 그 앞에서 자신의 높은 학식과 경험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어떻게든 내세우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권위를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8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교회를 참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권위는 분명 유익한 덕목입니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건강한 권위가 무너진다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권위가 사랑보다 앞설 때 공동체가 병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바울을 본받아 사랑함으로 권위를 내려놓고 유순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셋째, 나누고 희생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9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사도행전 18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은 때때로 천막 만드는 기술을 활용하며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이른바 ‘텐트메이커’라고 부르며 스스로 노동하여 선교하거나 목회하시는 분들의 롤모델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 견해 자체는 충분히 타당합니다. 또한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교회의 사례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일을 병행하시는 목사님들을 저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는 하나님 백성의 신앙을 돌보기 위해 다른 직업 없이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이들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역시도 고린도전서 9장 9절에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신명기 25장 4절을 인용하여 백성들을 대신해 전업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긍정하였습니다.

사실 소위 텐트메이킹 사역이 바울의 일관된 원칙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편지 곳곳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얼마든지 일정한 돈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따지고 들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대신 밤낮으로 일하며 자신의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9절 중반부에 분명히 언급 되듯이 교인들에게 “폐 끼치기”싫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이 한 주간 고된 노동으로 흘린 땀과 눈물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결실을 기꺼이 내어 드린 헌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너무나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 몫을 무리하게 고집하며 예물을 자기 손에 마음대로 움켜쥐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교회를 위해 보다 선하게 사용되도록 자신에게 돌아올 재물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바울을 본받아 나의 소유를 어리석게 고집하기 보다는 공동체를 위해 나누고 희생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바울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을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나누고 희생하며 전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대단한 초인이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다가오신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몸소 보이신 위대한 은혜와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모범을 비단 목회자나 선교사만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명령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하나님의 방법과 태도로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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