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8일, 토,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역대상 18장 1~17절 "승리의 이면"
1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고
2 또 모압을 치매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3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세력을 펴고자 하매 다윗이 그를 쳐서 하맛까지 이르고
4 다윗이 그에게서 병거 천 대와 기병 칠천 명과 보병 이만 명을 빼앗고 다윗이 그 병거 백 대의 말들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5 다메섹 아람 사람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7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하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8 또 하닷에셀의 성읍 디브핫과 군에서 심히 많은 놋을 빼앗았더니 솔로몬이 그것으로 놋대야와 기둥과 놋그릇들을 만들었더라
9 하맛 왕 도우가 다윗이 소바 왕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무찔렀다 함을 듣고
10 그의 아들 하도람을 보내서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벌써 도우와 맞서 여러 번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무찔렀음이라 하도람이 금과 은과 놋의 여러 가지 그릇을 가져온지라
11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들과 아말렉 등 모든 이방 민족에게서 빼앗아 온 은금과 함께 하여 드리니라
12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인지라
13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14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1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행정장관이 되고
16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비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사워사는 서기관이 되고
17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다스리고 다윗의 아들들은 왕을 모시는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니라
‘승리’라는 단어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이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치에 오르길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보다 이름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길 원합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처럼 좋은 직장에 취직하길 바랍니다. 취직한 이후에는 잘 진급하길 소원합니다. 사업체를 경영하는 경우 좀 더 많은 매출을 올려서 남들 앞에 떳떳하게 서는 것을 꿈꿉니다.
이 모두는 지극히 타당한 욕망입니다. 절대로 애써 부정하거나 죄악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지로 외면하다가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나의 욕망을 진리 앞에 내려놓고 다스리기 보다는 어리석은 탐욕을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말씀을 이용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기록된 화려한 영웅들의 행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곤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성경 속 가장 위대한 영웅입니다.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 천덕꾸러기 신세로 자란 목동 출신 소년이 극적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무술과 음악 모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군대를 용맹하게 지휘했고 마침내 내전을 매듭짓고 통일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종대왕을 존경하듯 이스라엘 역사상 제일 훌륭한 왕으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성공 모델로 삼아 그와 같은 힘과 명예를 꿈꾸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거머쥔 금은보화에만 눈길을 두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건,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 대신 다윗을 섬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화려한 성공이 기록된 본문 말씀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1절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인 블레셋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완전한 압승을 뜻합니다. 또한 2절을 보면 블레셋 못지않은 강력한 적이었던 모압으로부터 조공을 받아냈습니다. 그 외에도 3절 이하에 따르면 소바, 아람, 하맛을 비롯한 주변국을 정복하여 강력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화려한 성공을 13절 후반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주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신다면 그보다 최소 몇 십 몇 백 배의 땅을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정확히는 제국을 세우길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주님은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범위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님과 함께 어디로든 갔지만 아무데나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할 것은 다윗이 거둔 승리대신 나라를 다스린 방식입니다. 14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다윗의 통치 이념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 보시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네모와 네모를 행하였다고 할 때 이 두 단어 안에 들어갈 말이 참 많지 않겠습니까? 사랑, 은혜, 평화, 생명 등등 성경에 담긴 무궁무진한 의미 있는 개념들을 그 안에 대신 넣어도 내용이해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단어 중에 역대기 역사가가 굳이 ‘정의와 공의’ 이 두 단어를 통해 다윗의 이스라엘 정치를 설명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정의와 공의, 혹은 공평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와 <츠다카>는 하나의 짝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구약 성경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구절 몇 개만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18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여호와의 도’와 동일시되는 ‘의와 공도’는 본문 속 ‘정의와 공의’와 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신명기 33장 21절에 갓 지파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질서 또한 ‘공의와 법도’인데 이 역시 ‘정의와 공의’와 같은 원문단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단어는 시편과 예언서,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사야에서 여러 번 하나님 나라의 핵심을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4절을 이렇게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새”,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새”, “‘하나님의 마음’을 행할 새”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윗을 보며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라야할 것은 그가 거둔 화려한 성공과 승리가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은 그의 왕관에 묻은 피 비린내를 싫어하시고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역사와 전통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진리를 행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메시아를 강력한 힘을 휘두른 다윗의 귀환으로만 생각했던 지난날 유대교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제국의 질서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복음 이해가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나의 탐욕을 이루는 증빙자료로 삼는 죄악과 단호히 결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비틀고 난도질해서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 대신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그리고 그것을 꽃 피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슴에 품고 성경을 다시 읽어내려가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성경은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 숨 쉬며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진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그의 진솔한 신앙을 본받길 바랍니다. 그분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정의와 공의의 길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오늘도 주님께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 이 설교는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의 "김근주 교수님"의 글과 강연에 영감을 얻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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