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4일, 삼덕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새예배당 건축 현장에 일하는 노동자 한 분이 무더위에 너무 지치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잠시 이성을 잃고 지하 주차장 한쪽 구석 벽에 못으로 이렇게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
그리고 이 천년의 시간이 흘러서 서기 4019년이 되었습니다. 용케도 새예배당이 무너지지 않고 형체를 잘 지킨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2019년 대한민국 대구 기독교인들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몰려와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지하 공간의 벽 한쪽에 새겨진, 그 시대 기준으로는 고대 한국어로 된 짧은 문장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엇이죠?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좀 더 상상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그 때 브라질에 사는 한 청년이 그 시대에 번역된 언어로 그러한 발굴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아, 이 천년 전에 동아시아에 위치했던 한국이라는 나라는 ‘배고파 죽겠다.’고 괴로워하며 글자를 새길 정도로 무척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였구나!”
왜 그럴까요? 2019년 대한민국과 4019년 브라질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역사와 문화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이러저러해서 죽겠다.’라는 표현 안에는 가난과 전쟁과 질병 등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이 녹아있습니다. 옛 문장에 담긴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무시한다면 분명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언어’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소한 말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곤 합니다. 따라서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대화수단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문자를 통하여 기록하신 당신의 말씀인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언어의 한계 역시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와 남미 사이의 이 천년의 시간과 문화와 역사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오해와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후로 완성된 책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설명 드리면 신약 성경은 삼국 시대가 막 시작될 때,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주몽이 활을 쏘며 고구려를 세울 때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심지어 구약 성경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너무나 먼 옛날에 기록하고 편집되었습니다. 게다가 고대 중동과 유럽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쓰였고,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은 그것을 ‘번역’한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한 순간에 쿵! 하고 떨어진 책이 아니라, 오늘날과 전혀 다른 전통과 상황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불쾌한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경을 반드시 원전으로만 봐야하고 번역된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의 손에 들려진 성경책을 사랑하고 여기에 담긴 말씀을 날마다 꾸준히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합니다. 말씀 묵상이 주는 은혜와 유익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경이 ‘언어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씀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그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대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고 인용하여 자신의 무리한 신념을 고집합니다. 그 결과 성경이 본래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멀어진 채 분노와 증오에 가득차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공격하고는 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경을 올바르게 읽고 이해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34~3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의 ‘논쟁 단락’안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3~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권위에 대해 변론하셨습니다. 22장 15~22절은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논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 절인 23~33절은 사두개인들에게 말씀에 근거하여 부활의 진리를 외친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로서는 적의 논리가 무참히 깨졌다는 사실에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도 그 예수라는 사나이는 몹시 성가신 존재였기에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바리새인들과는 정반대로,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완벽히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세세한 규칙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창기와 세리들과 어울리며, 당시 신앙 전통의 눈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죄를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 대표선수로 ‘한 율법사’가 주님께 나아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 성경에서 어느 말씀이 가장 크냐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토론하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율법사의 의도는 정말 어떤 계명이 성경에서 가장 큰 것인지에 대한 답을 듣는 게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예수님의 수준과 실력을 만 천하에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활하고 위험한 계략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자무식의 촌놈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속임수로 백성들을 속였을지 모르지만 말씀에 대해 깊은 토론을 시작하면 금세 바닥이 드러나 보일걸로 기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자칫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공격당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나사렛 군중들을 열광시킨 주님의 가르침과 비유가 한 순간에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40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언급하시면서 사람들이 지켜야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할 점은 그 앞에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언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은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 층 낮은 차원이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거짓된 자기기만에 불과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으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 즉 모든 구약성경의 “강령”(綱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강령”이라는 한자말을 국어사전은 ‘어떤 일의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매우 적절한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에 해당되는 헬라어 <크레만타이>는 “걸려 있다” 혹은 “의존 한다”라는 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커튼과 커튼 봉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커튼을 구입했다 할지라도 잘못된 봉에 끼우면 본래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튼튼한 막대기에 제대로 걸려있을 때 비로소 커튼은 커튼다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 구절들이 기대어 걸려있는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중요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사실을 그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은 이른바 <쉐마>이라고 불리는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할 뿐만 아니라 ‘메주자’라고 불리는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구에 붙여 두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에 있는 책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항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레위기 19장을 십계명에 대한 주석 혹은 해설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레위기 19장 18절, 한 구절만을 인용하신 게 아니라 19장 전체를 언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기록된 이웃 사랑은 십계명의 배경과 권위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탈무드에 등장하는 가장 존경받는 랍비이자 유대인들의 영웅인 아키바 역시 ‘이웃사랑’이 최고의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신선하고 기상천외한 대답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시대 종교 기득권들에게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럴듯한 거짓이 복음을 대신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셨습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운 신앙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으로 멸망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열정적인 신앙을 불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 나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구약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으로 지키는 것 이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서기관’으로도 불리는,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신학자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5%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그들의 권위는 실로 막강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각종 정결 규정들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특별히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절대다수의 백성들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약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말씀을 통해 위로하고 격려 해주기는커녕 함부로 비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들의 경건함을 더욱 내세우고 으스대기 일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성경 글자에는 철저히 집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인 “사랑”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억눌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며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다름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죄악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에 무관심 한 채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소명을 모독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어 댔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신앙을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스스로 인정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폭로하는 엄중한 진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할 것은 예수님 스스로가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핵심에 대해 단지 입술로만 정리하지 않으시고 그 본질인 “사랑”을 이 땅위에서 직접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약점을 잡아 집어 삼키려드는 악랄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모든 죄인들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시며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영원한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찬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해야만 성경이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연약한 이성과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자세는 너무나 훌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자신의 뜻과 욕심을 고집하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성경 구절을 가져다가 그 권위를 훔쳐 휘두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많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십자가 사랑을 품고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사랑으로’라는 조건과 합해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모한 열정으로만 가득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했듯이 거짓을 몰아내고 어둠을 이겨내며 절망에 맞서는 진리와 빛과 희망의 사랑을 내 삶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바리새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존재감을 부적절하게 드러내려 말씀마저 이용하려드는 죄악에서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연약함과 좌절과 한계와 결핍을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이 이 세상에 유일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안에 인간의 실수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고 모든 내용들이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스스로 직접 말씀 하실 수 있지만 놀라운 깊으신 뜻 가운데 굳이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죽은 문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으로 변하게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철저히 비본질에 불과한 성경의 다른 내용들에만 집착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먹이지만 정작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이웃들을 찌르고 무너뜨리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마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은 분명 창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얼룩과 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그러한 흠결을 보고 창문 자체를 무시하고 외면하며 엉뚱한 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문 유리 혹은 창틀에만 눈길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결코 그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창문 너머 아름다운 풍경과 햇살을 전해주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문의 흠집으로 그 전체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혹은 유리의 값어치에만 지나치게 시선을 고정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며 가져야할 바른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록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4019년에 발견된, 이천년 전 먼 나라에 지어진 예배당의 발굴기록을 읽는 사람은 지하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낙서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독단적인 이해와 고집으로 멋대로 해석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건물 전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당의 존재 목적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글자들이나 지극히 부분적 내용들에 집착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길 기대하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새롭게 확인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올바르게 섬기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언어를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시고 우리 손에 들려주신 이유를 말씀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위대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경험하며 그 사랑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탐욕을 멈추고, 우리 모두가 진리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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