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30일,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에스겔 14장 1~23절 "환난 속의 위로"
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 중에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9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며 다시는 모든 죄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여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 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 가령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 다니게 하여 그 땅을 황폐하게 하여 사람이 그 짐승 때문에 능히 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자
16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고 그 땅은 황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가령 내가 칼이 그 땅에 임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칼아 그 땅에 돌아다니라 하고 내가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18 비록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9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노를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에서 끊는다 하자
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
22 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함께 읽은 에스겔 14장은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을 다룬 1~11절과 ‘예루살렘에 대한 징벌’에 대한 말씀인 12~23절, 둘로 나뉘어 집니다. 이 중에서 앞부분의 주제가 어제 읽은 에스겔 13장의 거짓예언자를 향한 심판 경고와 많이 비슷하기 때문에 오늘은 편의상 뒷부분인 12~23절에 집중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 혹은 웅장한 교향곡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인 성경은 절대로 획일화된 교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다채롭고 입체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까이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매우 다른 모습의 봉우리들 혹은 음계가 넓은 시선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특정 구절이나 단락에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에스겔은 상당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의 전통적인 견해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말씀을 과감한 표현으로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 선언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작인 12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어제 읽은 13장 1절을 비롯하여 에스겔을 포함한 예언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예언자의 외침이 거짓 예언자들과는 달리 자기 마음대로 떠드는 게 아닌 주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머지 구절들은 20절까지 두 절씩 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각 절의 첫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3절만 앞에 ‘인자야’가 붙긴 한데 바로 뒤에 “가령”이라고 시작합니다. 14절은 “비록”이라는 말이 먼저 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15~16절, 17~18절, 19~20절 모두 “가령”과 “비록”이라는 낱말로 각 구절이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14, 16, 18, 20절, 무려 네 번에 걸쳐 각 소단락을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표현형식을 통해 새삼 확인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직통 계시를 빙자해서 자기 마음대로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뜻을 떠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치열한 고민과 성찰을 거쳐 굉장히 정교한 문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입니다.
에스겔 역시 치열한 논리구조를 통해 만약 어떤 나라가 죄를 저질렀을 경우 겪을 분명한 심판을 외쳤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죄악에 대한 선명한 경계를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세 인물입니다. 바로 노아와 다니엘과 욥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당시 기준으로도 고대의 현자인 나머지 두 사람과는 달리 다니엘은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던 1차포로 중 한 사람으로서 에스겔과 동시대를 살았던 젊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원문에 보면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표기한 히브리어 단어가 다니엘서의 다니엘과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본문 속 다니엘이 구약 예언자 다니엘과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상당수 구약학자들은 이 사람이 고대 서아시아의 고대 문명 중 하나인 페니키아의 전설적인 성군 <단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 단엘이 비록 존경받는 어진 왕이긴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자 였습니다. 게다가 구약의 다니엘은 그 시대에 청년이긴 해도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본문에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만만치 않은 반론이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점은 노아와 욥과 같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의인인 있다할지라도 그들 자신만 구원 받을 뿐이지 죄악을 저지른 나라를 주님이 반드시 심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재앙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도 예외 없이 임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철저히 개별적이라는 에스겔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혹시 정반대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바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입니다. 창세기 18장 16절 이하의 기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땅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열 명이 없었기에 마침내 그곳에 심판이 임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만약 성 안에 의인 10명이 있다면, 죄가 사라지지도 않았고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았어도 의인들의 신실함 덕분에 그 땅을 살려두겠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대속죄일 규정은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은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구원은 구약의 중심인 오경 전반에 흐르는 핵심 신학입니다. 반면 에스겔은 본문 외에도 곳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공동체와는 별개로 철저히 각자의 몫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경과 에스겔은 마치 한 성경 안에 있기에는 어색한,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스겔이 놓인 상황이 오경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평화시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한편 에스겔은 이미 앞서 몇 주간 살펴보았듯이 이방나라의 군대들에 의해 그 성전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패배와 바벨론의 포로살이를 배경으로 합니다. 즉, 오경은 아직 끔찍한 심판을 겪지 않았던 때를 전제로 하지만 에스겔은 그 심판을 이미 겪은 후에 전해진 말씀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처한 각 상황에 맞는 가장 합당한 말씀을 예언자를 통해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위로'입니다. 22~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2 그러나 그 가운데에 피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23 너희가 그 행동과 소행을 볼 때에 그들에 의해 위로를 받고 내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절과 23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위로'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아합니다. 본문 전체에서는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재앙의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예루살렘도 예외는 아닙니다. 따라서 비록 예루살렘에서 심판을 피한 백성들이 바벨론에 뒤이어 포로로 잡혀 오는 모습이 먼저 포로살이 하던 이들에게 전혀 좋게 보일 리 없습니다. 여전히 그것은 끔찍한 동족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아픔이 그들에게 위로일 수 있는 까닭은 극심한 재앙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은혜의 씨앗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저질렀던 추악한 죄악을 생각해본다면 온 백성이 화를 입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백성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의인은 살리셨습니다.
숫자와 수량으로만 본다면 엄연히 불행입니다. 계속된 포로 행렬은 겉보기에 너무나 볼품없고 초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증거입니다. 실제로 그 위대한 뜻 가운데 그들은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새로 짓고 나라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 흐름 속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평강의 때에는 비록 다른 의인들의 중보 덕분에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 환란의 기간에는 하나님의 냉정하고 공의로운 심판 중에도 의인들을 살려두셨다는 사실에 위로를 발견해야 합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최후의 심판은 분명 개개인의 신앙에 따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는 빛과 어둠, 구원과 심판이 교차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서로를 향한 중보와 격려를 끊임없이 이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모세 오경과 반대되는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포로 생활로 신음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마음을 일깨워 준 사람입니다. 다만 그가 외친 내용이 그 시대에 낯선 진리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광대한 복음을 담고 있는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삶에서 당장 주님의 뜻과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답답해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오늘도 생생히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신뢰하여 평강 중에 더욱 깨어 회개하고 고난 중에 오히려 감사하여 참된 위로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