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6일 화요일

에스겔 16장 1~14절 "화려함이라는 유혹"

2019년 8월 1일,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에스겔 16장 1~14절 "화려함이라는 유혹"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7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 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11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목걸이를 목에 걸고
12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14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서의 중요한 특징은 굉장히 현란하고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런 특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본문이 바로 에스겔 16장입니다. 무려 63절이나 되는 긴 분량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담긴 비유가 굉장히 노골적인 성적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그나마 성경을 번역하며 최대한 순화하긴 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성적음란을 거침없이 묘사하였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정해진 본문으로 읽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적인 예배에서 선택 해 읽기에는 상당히 민망하고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언자 에스겔은 극단적인 표현으로 예루살렘의 모습을 질타하였을까요? 그만큼 그들의 죄악이 극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요일에도 말씀 드렸듯이 진리는 변함 없지만 상황은 바뀌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저마다 다른 때에 다른 방법으로 들려옵니다. 그것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어색하거나 불편하다해서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경청하는 태도가 무척 중요합니다. 듣기 좋은 거짓보다 듣기 싫은 진리가 비교할 수 없이 유익합니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절 말씀은 이 비유의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바로 예루살렘, 더 정확히는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온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을 그들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6장에서 예루살렘은 한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3절부터 그녀의 충격적인 출생배경을 알려줍니다. 그녀의 출생지는 본래 가나안이고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입니다. 가나안, 아모리, 헷 모두 이스라엘이 경멸하는 이방나라들입니다. 

여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실제 그들 조상 가운데 이방인이 섞여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의 신앙이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변질되었음을 상징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묘사는 아브라함의 순수한 혈통이라는 이스라엘의 자존심에 상당히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어지는 4~5절은 그 여자 아이의 출생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습니다. 당시 태아보호 풍습에 따르면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씻긴 후 소금을 뿌린 다음 보자기로 싸맸습니다. 소금을 뿌리는게 조금 특이할 뿐 오늘날도 이어지는 지극히 기본적인 조치입니다. 하지만 그 아기는 이중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버려졌습니다. 심지어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도 없이 천하게 여겨져 들에 버려졌습니다.

이러한 잔인한 장면은 사실 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듭니다. 따라서 고대 빈민들에게 육아는 어찌보면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대로된 피임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계속 태어났고 그 결과 남성우월주의 문화에서 여자 아이들이 희생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들은 첫 번째 무리들 혹은 독자들은 그 끔찍한 영아 유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본문의 묘사가 더욱 피부에 분명히 와 닿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6절 이하에는 그와 같은 비극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놀라운 구출과 구원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 버려진 아기 곁을 한 왕자가 지나갑니다. 본문은 그의 입장에서 1인칭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이야기 흐름 속에서는 일단 장차 왕이 될 가상의 인물로 이해하고 16장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는 버려진 핏덩이 여자 아기를 구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건강하고 성숙한 몸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전혀 다른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13~14절 다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3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14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조차 환영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들판에 버려져 죽음을 앞두었던 그 여자 아이는 자기를 구해준 왕과 결혼하여 왕후가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극적인 변화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그녀에게 주어진 전적인 은혜입니다. 지난날 도무지 기대할 수도 예상할 수 없었던 감격적인 축복입니다.

이러한 비유가 상징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보다 남달리 의롭거나 경건해서는 더욱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이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한 없이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그들을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시어 온 세계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고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춘다면 너무나 아름다운 구원사건이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함께 읽은 14절까지의 말씀은 에스겔 16장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내일 살펴보겠지만 앞서 설명 드렸듯이 적나라한 성적묘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극적으로 구원 받았지만 죄악에 물든 이스라엘의 모습은 사실 먼 옛날 남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망을 향하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악의 유혹에 흔들리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할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할 본문 속 왕후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화려함’입니다. 그녀는 왕과 결혼한 후 온갖 금은보화로 치장하였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14절은 두 번이나 ‘화려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본문이 그러한 화려함 자체를 절대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 화려함은 분명 주님께서 직접 주신 화려함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주어지는 여러 결실들을 소중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는 금욕 종교가 아닙니다. 정직하게 열심히 땀 흘려 얻는 풍성한 재물을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명예와 권력을 합당한 선 안에서 얼마든지 유용하게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동시에 그 화려함이 주는 위험 역시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뒤이어 지는 1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5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왕후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화려함과 명성을 아름답고 선하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 풍요에 취해 오히려 행음하며 음란한 죄악에 빠졌습니다. 왜 이런 비극으로 빠졌을까요? 그녀는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화려함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며 지난날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강조합니다. 지나친 금욕에 빠질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런 욕망마저 부정하는 결벽과 강박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받은 선물에만 열광한 채 정작 그것을 주신 주님을 잊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기도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십자가를 우러러 봐야합니다. 추악하고 초라한 죄인에게 주신 눈부시고 찬란한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바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생명과 소유가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든 좀 더 움켜쥐기 위해 몸부림 치고 남들보다 높이 올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적은 결코 화려함이 아닙니다. 그 모든 눈부신 삶의 결실은 성도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은혜의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건강한 신앙의 가장 큰 위험은 화려함에 대한 맹복적인 추구와 열망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할 유혹 역시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입니다. 화려함만을 추구하다가 정작 십자가는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지금 짓고 있는 우리 교회 새예배당 십자가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콘크리트에 소박하게 새겨진 그 모습이 십자가 복음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4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大直若屈(대직약굴)이요 大巧若拙(대교약졸)이요 大辯若訥(대변약눌)이니라.

“가장 곧은 것은 굽은 듯이 보이고, 가장 좋은 솜씨는 서툴게 보이고, 가장 좋은 언변은 어눌하게 보인다.”

이러한 동서고금의 진리를 가장 위대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초라함을 주저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화려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겸손히 낮아져야만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죽어야 다시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야 합니다. 여러 모양으로 비참하게 버림당한 이들을 향해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입은 생명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꺼져가는 생명을 겨우 붙잡은 연약한 이들에게 돌봄과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이 더욱 풍성히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