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9일 수요일

창세기 32장 21~30절 "져 주시는 하나님"

삼덕교회 수요기도회, 2019년 10월 9일, 정대진 목사
창세기 32장 21~30절 "져 주시는 하나님"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우리는 때때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 하여 숨었을 때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또한 그의 아들 가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처럼 인간에게 질문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질문’이란 1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아는 이에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연약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의 또 다른 기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확인’입니다. 연인들이나 부부사이에 흔히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는 바로 ‘나 정말 사랑해?’입니다. 분명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했는데 자신에 대한 감정을 왜 계속 물어보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동서양의 위대한 스승들이 문답을 통해, 제자들이 무지함을 깨닫고 지혜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하시는 이유는 그 답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확인시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속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에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창세기 32장에서의 야곱은 한 마디로 ‘위기에 빠진 가장’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초라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찾아가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청춘을 다 바쳐 마침내 많은 가족과 가축 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그 모두는 단순한 피붙이와 재산이 아닙니다. 삶의 숱한 전투 끝에 마침내 얻은 소중한 전리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모든 것들을 단 한 순간에 잃을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지금 형 에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있어 야곱은 자신의 축복을 가로채어 굴욕적인 패배감을 안겨준 동생입니다. 때문에 그는 강렬한 증오심에 불타올랐습니다. 심지어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빨리 세상을 떠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야곱이 형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깊은 염려와 불안 속에 애타게 마음을 졸였습니다. 때문에 본문 바로 앞에는 금세 닥쳐올 재난을 철저히 대비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에서가 400명이나 달하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 앞에서는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결국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몸부림치며 절규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와 ‘씨름’하였습니다. 24절에 기록된 그 상대가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 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러 맥락을 종합해 보면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와 권한을 위임 받은 대행자, 곧 ‘천사’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호세아 12장 4절에도 그를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오늘 설교에서는 편의상 ‘하나님’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붙잡으며 간구하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부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야곱에게 주님께서는 불쑥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한 편으로 당혹스럽지 않으십니까? 한 인간이 처한 극한 절망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난데없이 야곱의 이름을 물어보셨을까요? 정말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란 그의 이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 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형과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부모는 그의 이름을 ‘발꿈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케브>에서 유래하여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을 가진 <야아코브>, 우리말로 “야곱”으로 지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은 관용적으로 ‘남을 걸려 넘어뜨리는 자, 속이는 자’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와 같은 야곱의 이름을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 쳤던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야곱의 삶은 그의 이름처럼 성공을 향한 치열한 욕망과 좌절로 어지럽게 뒤 섞여 있습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형은 물론이고 시각 장애를 가진 연로한 아버지를 속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외삼촌과 사촌들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기 못지않게 성공을 향한 탐욕으로 가득한 라반의 교활한 속임수에 빠져 번번이 인생의 쓴 맛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삶의 성취를 이루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 깨달은 것은 여전히 자신이 위태로운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급히 탈출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반의 추격에 붙잡히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과거 자신이 복을 손에 넣고자 저지른 악행의 결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있어 그의 이름은 단순히 자신을 향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승리자가 되길 꿈꾸었으나 끝없는 좌절과 마주하는 그의 눈물어린 인격과 존재를 가장 정확히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의 ‘야곱’은 과연 무엇입니까?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면 오늘 이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 내 안의, 나만의 야곱이 누구이고 그가 어떤 몸짓과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향해 엄숙히 물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살펴볼 때,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실패한 나. 지나온 시간들 가운데 새겨진 가장 경멸어린 패배한 삶의 자취, 여전히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좌절의 상처들.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름을 물으신 까닭이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야곱”으로서의 진정한 나를 주님께서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온갖 실패와 좌절로 지쳐 쓰러져 울고 있는 나를 기꺼이 품어 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우리 안의 야곱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길 바라십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 시리즈를 통해 정신건강의학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탁월한 통찰과 위로를 안겨준 스캇 펙 박사의 또 다른 저서 “거짓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을 정신 질환으로 죄를 지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해 주는 것은 그들이 특정한 유형의 고통으로부터 부득부득 피하여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특정한 고통 하나뿐이다.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자기 성찰에서 오는 이 특정한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거의 못할 일이 없는 게 그들이고 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정신 치료를 가장 완벽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바로 악한 사람들이다. 악한 사람들은 빛을 미워한다. 자기 모습을 비춰 주는 착한 선의 빛, 자신을 드러내는 성찰의 빛, 자신의 기만을 들춰내 버리는 진리의 빛을 그들은 죽도록 싫어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야곱 때문에 괴로워하며 움츠러드는 것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의 영혼이 정 반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마다의 야곱에 얽매여 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내 안의 야곱을 증오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선한 진리의 빛을 향해 나아가, 나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정직히 마주하여 ‘제 이름은 야곱’이라고 기꺼이 토해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이렇게 누군가가 하나님에 의해 이름이 바뀐 것은 우리에게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앞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에 의한 ‘이름 짓기’의 참된 의미를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창세기 1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을 때 그냥 ‘밝아져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빛’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또,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며’ 그 둘의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며, ‘하늘’이란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또한 셋째 날에도 뭍을 “땅”이라 부르시며 이름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곧 ‘이름 짓는 일’ 이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심으로 천지 창조의 서막을 알리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단지 한 인간의 호칭변화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갑에서 을로 부르기 쉽게 이름을 바꾼 게 아니라. 야곱을 향한 당신의 창조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야곱이 야곱으로서 쓰라린 좌절과 실패를 안고 당신께 나아갔기 때문에 결코 예전처럼 야곱으로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온 생명과 의지를 다해 이스라엘로 야곱을 기어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얍복 나루에 지쳐 쓰러져있는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이는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야곱들에게 동일한 언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야곱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 안에 새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창조의 초대와 외침을 계속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야곱의 새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28절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져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의 배경이 되는 24절과 25절의 ‘씨름하다’입니다. 이 동사의 히브리어 원문의 어근인 <아바크>는 성경 전체에서 오직 본문에만 단 두 번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즉, 야곱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야곱을 가리키는 원어의 자음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야곱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히브리적인 언어유희입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문장을 “야곱이 야곱했다.”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의 이러한 어휘 사용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 쳤던 사람’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는 부모 형제간의 우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었습니다. 어떤 속임수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번번이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외삼촌에게 수도 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인생의 극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싸움입니다. 이기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그를 위해 져 주셨습니다.

그 대신 그의 허벅지 관절, 개역한글판 성경은 ‘환도뼈’로,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에는 ‘엉덩이 뼈’로 옮긴 인간의 가장 강한 뼈를 부러 뜨렸습니다. 굉장히 모순되는 장면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기세등등한 새 이름을 가졌는데 겉모습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승리자의 화려한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레슬링 경기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 선수처럼 영락없는 패배자의 몰골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얍복 나루’의 경험이 있습니다. 성장과정에서의 크나큰 결핍, 도무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가정 문제, 학벌과 취직과 승진 등, 그토록 간절히 손에 넣길 원하며 애써 발버둥 쳤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던 수많은 패배의 경험들과 부러진 엉덩이뼈로 한없는 고통에 빠져들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그 모든 비참한 절뚝거림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미처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지만, 여전히 패배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져 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이 세상 가장 처절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의 사랑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진정한 승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우리를 이스라엘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회복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단순히 한 인간의 호칭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이 땅위에 역사상 실존했던 언약 공동체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당신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이름은 시조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아닙니다. 손자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얍복 나루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실 때 그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훗날 이 땅에 세울 언약공동체를 향한 그분의 기대와 소망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 번째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새 이스라엘, 즉 이미 실현되었고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세우기 위해 바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면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믿고 따른다면,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우리의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무게를 온 삶으로 지탱하는 책임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구원의 감격만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 간다는 내면의 위로와 만족만을 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저 교회 생활만을 열심히 하여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 대신 ‘참 이스라엘’로서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온전하고 향기로운 삶으로 그분의 나라를 넓혀가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져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력하게 의지를 꺾는 패배주의에 빠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태와 태만을 정당화 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공을 향한 숭배를 멈추고 승리에 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당하게 경쟁해서 필요한 것을 얻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능한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도록 격려하는 것, 이왕이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노력하고, 승진 혹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서 거기에 합당한 성과를 누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성공과 승리를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하며, 자연스러운 패배와 좌절을 추하게 부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이토록 사회적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마저도 어떻게든 이기려 온갖 추태를 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만든 법과 원칙마저도 마음대로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헛되고 헛된 성공을 위해서라면 복음마저도 제멋대로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기꺼이 양보하고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알기 때문에 탐욕을 뿌리치고 한 걸음 더 물러설 줄 알아야 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지나치게 높이 오르고 과도하게 손에 움켜쥐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나 나보다 약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거나 이용하지 말고 따뜻한 사랑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관련해서 한 인물을 소개하고 설교를 매듭짓고자 합니다.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의 위대한 애국정신을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잘 아실 것입니다. 특히나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여 선생님의 삶이 각종 언론과 방송을 통해 더욱 많이 알려졌습니다.

선생님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인 백사 이항복의 직계 10대손입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를 포함한 영의정 네 명을 비롯하여 무려 10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입니다. 게다가 한양 최고 부자였습니다. 즉, 집안 배경과 학식과 재산 등, 이 세상에서 이른바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입니다.

한국 근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사람들은 일제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포섭 대상이었습니다. 여러 친일매국노들이 그러하였듯이 자기들 뜻만 잘 따라 주면 지금까지의 기득권을 얼마든지 지키고 누리며 오히려 더 풍요롭게 살게 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당 선생님도 마음만 먹으면 일제에 협력하고 백성들에게 적당히 눈치껏 베풀면서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화려한 성공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형제들과 함께 뜻을 모아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 급하게 처분한 금액이 지금 돈으로 최대 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렇게 과감한 결단으로 만주에 갔지만 그 이후의 삶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족 모두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선생님은 1934년 11월 17일 뤼순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하셨습니다. 그 순간은, 누가 봐도 무모한 이상주의자의 허무한 패배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아셨습니까? 이회영 선생님은 기독교인입니다. 저도 최근에 알고 무척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대표적인 유학자 집안에 태어나셨지만 젊은 나이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당시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주로 다녔던 상동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담임이자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전덕기 목사님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같은 교회 교인인 안창호 선생님과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만드셨습니다. 또한 감리교 권사 직분을 받았고 주로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상동청년학원의 교감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당 선생님의 눈부신 애국애족의 삶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신앙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 기꺼이 성공이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좌절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거친 광야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용기의 근원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주되심을 믿었기에,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분명히 깨달아 알았기에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져 주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을 초라한 패배자가 아니라 시대의 어둠에 맞선 위대한 승리자로 기억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우당 선생님처럼 대단한 결단을 내리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집과 땅을 내다팔고 거창한 일을 해내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삶의 방향과 살아가는 방식을 되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참된 승리를 위해 누군가에게 져주는 삶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진심으로 고백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땅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시시때때로 얍복 나루위에서 지쳐 쓰러진 야곱의 절망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이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음성 앞에 주저 없이 저마다의 야곱을 낱낱이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해 져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승리를 향한 헛된 탐욕에서 벗어나 기꺼이 져주는, 찬란한 패배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날마다 선한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져 주시는 하나님
저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저의 이름은 실패이기도 하고 좌절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굴욕을 겪었고 절망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이름에 담긴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기꺼이 져 주시는 놀라운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는 손길에 의지합니다.
저희 모두도 그 사랑 가운데 어리석은 탐욕에서 벗어나 기꺼이 져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진실로 낮아지고 나누어야 참으로 승리하는 복음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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