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신명기 6장 1~9절 "야훼 우리 하나님"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4절과 5절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흔히 <쉐마>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4절 앞부분을 원문 어순대로 직역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들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가 ‘쉐마’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은 어떤 내용일까요?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주님의 백성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즉 온 인격과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진리입니다. 어쩌면 뻔하고 당연하게 들립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씀을 쉽게 오해하곤 합니다. 사랑을 또 다른 낡은 율법으로 변질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쉐마 말씀을 앞뒤 맥락 속에서 차근히 살펴봐야 합니다. 이 위대한 구절의 본래 의미에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 하나님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입니다. 본문 4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들으라!”라고 외치며, 그들이 귀 기울이게 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야훼 우리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야훼’는 하나님의 생생한 인격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모세는 그 야훼께서 곧 ‘우리 하나님’이라고 외칩니다. 어쩌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고백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 진리일수록 항상 낯설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켜,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실 근본적으로 불가능 한 일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신성모독일 수 있습니다. 무모하고 위험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조금만 곱씹어 보면 너무나 놀랍고도 충격적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복음이 시작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막연한 관념으로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공허한 논쟁과 궤변으로 진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도록, 주님께서 몸소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펼쳐 보여줍니다. 따라서 본문을 포함한 신명기 전체가 놓인 삶의 자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나요? 출애굽 공동체는 40년 광야 여정의 종착점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모압 평지에 모인 그들은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마침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힘차게 흐르는 강물 소리와 저 멀리 지중해에서 불어와 뺨을 간질이는 바람이 그들을 맞이하며 손짓합니다. 이스라엘은 흥분하며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육중한 삶의 현실이 그들 가슴을 짓누릅니다. 우선 가나안에 먼저 살고 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가만히 반겨줄 리가 없습니다. 처참한 전쟁이 곧 펼쳐질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거대한 물음표가 그들 머리 위에 그림자처럼 어둡게 드리웁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는 늘 행복한 일만 있을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은 아닙니다. 엄연히 사람 사는 땅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문화에 익숙합니다. 반면 그들을 기른 부모님은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가나안에 건너가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농경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부모로부터 들은 적도 없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낯선 나라로 이민을 떠나 새로운 직업을 가지고 힘겹게 일하며 적응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이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고난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생활과 종교는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옛 사람들은 특정 공간과 특정 직업을 관장하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집트와 광야에서는 그럭저럭 힘을 발휘하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 뿌리내릴 땅에도 과연 그 능력이 변함없을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가나안 신들보다 약할 수도 있다는 거대한 불안과 공포에 그들은 휩싸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그들이 앞서 경험한 은혜를 마음에 거듭 새겼습니다. 그 말씀들을 정리한 성경이 신명기입니다. 그 중심에 ‘쉐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쉐마를 포함하는 6장을 시작하며 모세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1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여기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얼핏 모세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주님을 가리켜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향해 알려준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 말씀을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3절부터 십계명이 시작합니다. 따라서 2절은 십계명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십계명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어서 그 위대한 구원을 이룬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알리십니다. 바로 ‘주 너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존경하는 위인, 가령 주기철 목사님께서 지금 우리 눈 앞에 서 계십니다. 목사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시며 “나 주기철은”이라고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다음 말을 경청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름을 걸고, “나 아무개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에는 누군가가 스스로 이해하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자기 이해는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너무나 깊고도 찬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알리셨을까요? 백성들이 바짝 엎드려서 맹종해야 할 대상, 혹은 마냥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숭배해야 할 존재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너희 하나님’이 되시고자 이스라엘을 고난에서 건지신 구원자이십니다. 당신의 백성과 따스하고 친밀한 관계와 사귐을 이루시려 그들의 눈물에 응답하신 인도자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물론이고,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입니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그 놀라운 복음을 모세에게 다시 들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1세대의 자녀들입니다. 열 재앙과 홍해 이적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돌보심을 따라 광야를 지났습니다. 그 야훼께서 여전히 ‘너희 하나님’이라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습니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을 향해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난날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 가실 구원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그 어떤 모양의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능력과 구원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 다른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항상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성공과 부와 명예로 유혹하는 가나안 신들은 모두 허상이며 반드시 무너질 우상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유일하십니다.
그러한 ‘우리 하나님’께 믿음의 자녀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제 우리는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께 드릴 ‘사랑’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됩니다. 그것은 감정에 겨운 감상이 아닙니다. 의무적인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자랑하려는 율법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너희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출애굽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치열하게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담긴 눈부신 사랑을 마음에 품고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진심으로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문 6~9절에 따르면 쉐마 구절을 몸에 지니고 집 곳곳에 붙여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상당히 오묘합니다. 직전인 5절에서 하나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그 다음에 관련한 종교 행위를 자연스럽게 추측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가정 안의 자녀 신앙 교육으로 이어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참된 신앙은, 그의 하나님 사랑은 가족들과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에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 사랑에 참으로 감격한다면 자녀들에게 더욱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잔소리 하고 다그치며 교회 생활을 강요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쉐마가 되어 가정 안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 온기로 말미암아 모든 일상 가운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이 가득히 울려 퍼지길 바랍니다.
그 소망 가운데 오늘 하루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삶의 어떤 변화와 시련에도 항상 함께 하시고 돌보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기도
야훼, 우리 하나님
설렘과 공포가 교차하는 눈빛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저희도 저마다의 모압 광야를 지납니다. 삶의 끝없는 모순을 절감하며 지치고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수록 자격 없는 죄인을 일으키신 놀라운 구원을 바라봅니다. 저희를 향해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외치신 위대한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여 주님을 향해 진실로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유일하신 주님만 사랑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길 다짐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 하루도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 더욱 진실한 사랑의 관계로 이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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