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1일 수요일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땅에서 하늘 살기”

2024년 2월 21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목사 정대진
빌립보서 3장 17절~4장 1절 “땅에서 하늘 살기”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입니다. 밤늦게 퇴근하신 아버지께서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저에게 무언가를 불쑥 건네셨습니다. 바로 홍정욱씨가 지은 “7막7장”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책 선물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많이 기억하실 겁니다. 어쩌면 집에 아직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24살 한국 청년이 무려 하버드대학교를 우수졸업상을 받고 졸업했습니다. 

이 소식에 온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그야말로 ‘홍정욱 신드롬’이었습니다. 조기유학 열풍이 거세게 불었고, 그가 지은 수기 “7막 7장”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 열기에 많은 학부모가 휩싸였습니다. 제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제 부모님은 남해안 섬마을에서 어렵게 자라셨습니다. 가정 형편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습니다. 삶의 여러 풍파를 겪다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도시에서 힘겹게 일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는 지금 당장 자식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책 읽기 좋아하는 아들이 홍정욱씨처럼 하버드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꿈을 품고 이루길 바라셨습니다.

이 사건이 어린 저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 저는 국내외 여러 명문대 졸업생의 에세이를 종종 찾아보곤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련을 딛고 일어나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명망가들의 자서전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후에는 외국 유학을 몇 차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 탓에 원대한 꿈을 품고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러한 ‘상승 의지’는 분명 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 건강한 활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90년대 중후반 ‘홍정욱’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과 그로 말미암아 벌어진 사회 현상 자체를 함부로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승자독식의 엄혹한 경쟁 사회에서 모두가 피라미드 위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승리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면 나머지 수많은 사람은 패배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힘의 질서는 반드시 어두운 그림자를 남깁니다. 따라서 승리를 거머쥐려 맹목적으로 달리는 세상 한 복판에서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를 차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은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참된 성공에 대한 왜곡과 오해가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일류대학교를 졸업해 번듯한 직장에서 많은 연봉을 받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물론 그분들의 선한 의도는 공감합니다. 그 안에 수긍할 만한 내용도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때때로 복음을 심각하게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뜻은 번번이 입시와 취직에 실패하는 청년들, 자녀를 돌보고 가정에 충실 하느라 경력이 단절되어 허무함을 느끼는 어머니들, 억울하게 직업을 잃거나 애써 일군 사업장을 눈물 머금고 닫는 아버지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은 그 모든 좌절과 결핍을 초월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천대받던 변방 성읍 갈릴리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외치신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생명의 진리를 교묘한 욕망의 논리로 뒤바꾸는 현실 앞에 마음이 아프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어느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켜 강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1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로 번역한 원문은 ‘탄식하고 흐느낀다.’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런 표현은 현재 바울을 짓누르는 어두운 감정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 그들을 가리켜 거침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까지 말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앙의 절정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이기에 바울이 이렇게 거침없이 비판했을까요? 그들의 정체를 1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당 구절을 논리 구조로 나누어,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결론 - 그들의 마지막멸망입니다. 
근거3 - 그들은 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근거2 - 자기네의 수치영광으로 삼고, 
근거1 - 땅의 것만생각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들을 향해 ‘멸망’이라는 결론을 먼저 선언합니다. 이어서 그 근거를 역순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먼저 ‘땅의 것’만 생각하고 마음을 씁니다. 여기서 ‘땅’은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상징하는 ‘하늘’과 대비되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탐욕이 꿈틀거리는 세속 영역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땅의 질서와 성공에 집착합니다. 이 땅에서 성취하고 승리하는 일에 삶의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를 오히려 ‘영광’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얻어낸 거대한 성과물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사람들 보기에는 휘황찬란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으스대며 자랑합니다. 끊임없이 과시하고 함부로 휘두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끄럽고 추합니다. 땅에서는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하늘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의 원수들은 마침내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습니다. 이 문장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상당수 학자들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 지 아닌지를 과도하게 따지는 걸로 보았습니다. 즉, 음식 규정을 비롯한 율법에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을 찬찬히 살피면 이 땅에서 거둔 허무한 영광에 취해 배를 가득 채우는 탐식과 음란 등의 방탕으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경제생활의 기초는 ‘조합’입니다. 같은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합의 단체식사 자리에서 여러 무질서하고 방종한 추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그런 불건전한 행태를 비판했던 문서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회 문화를 토대로, 이와 비슷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그들은 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통제받지 않는 욕망이 곧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바로 멸망입니다. 주님께서 내리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엄중한 심판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바울이 이렇게 분개하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불신자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매 주일 함께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삶의 목적과 태도와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방탕한 조합원들처럼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을 언뜻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매우 놀랍게도 그들은 빌립보교회 교인, 즉 신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면서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끔찍한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교회 생활은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자기 탐욕을 정당화할 이용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 분께 매력은 느끼지만 십자가의 정신과 삶은 부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될 주님의 다스림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땅에서 일어나는 세상살이에만 골몰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더 높이 오르려 했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 더 많은 것을 손에 움켜쥐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눈부시게 화려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주님 보시기에 더럽고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은 성공에 취해 예수님이 아닌,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 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존립을 뒤흔들 정도로 복음이 심각하게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격정적으로 아픔을 토로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왜곡된 신앙을 바로잡는 참된 진리를 20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시민권’으로 번역한 헬라어는 <폴리튜마>입니다. 곧바로 옮기면 ‘국가’인데, 상당히 복잡한 의미를 지닌 정치용어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로마제국의 정복 정책을 반영합니다. 로마는 각 식민지마다 본국 시민과 퇴역 군인들이 편안하게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습니다. 해당 지역과 상관없이 제국 시민권자의 이익을 철저히 우선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을 가리켜 <폴리튜마>로 불렀습니다.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 있는 미군기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스’의 경우, 여의도 3배 규모입니다. 거기에는 학교, 도서관, 병원 뿐만 아니라 영화관과 대형체육관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느 도시 풍경과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작은 미국’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통 신호체계를 비롯한 모든 문화와 질서가 미국과 같습니다. 그곳에 있는 미군과 가족들은, 한 마디로 한국에서 미국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빌립보에서 로마를 산다.’라는 높은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로마의 대표적인 식민 도시, 즉 ‘폴리튜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자기 편지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생생하게 와닿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 즉 ‘궁극적인 소속과 다스림’이 바로 하늘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참된 정체성은 하늘에 속해 있다고 알려줍니다.

바울은 로마 지배 아래 있는 땅의 현실을 분명 인정했습니다. 땅은 빌립보 교인들이 매일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충분히 존중해야 할 삶의 터전입니다. 하지만 땅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탐욕의 법칙이 아닌 ‘하늘’ 뜻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구원하는 자”로 옮긴 헬라어 <소테르>는 신격화된 황제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을 제국 시민의 건강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소테르, 즉 ‘구원자’로 온 제국에 선전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소테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을 참으로 구원 하는 길은 화려하고 거대한 로마제국의 힘과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진리를 이토록 뜨겁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자신이 하늘 시민권을 따라 담대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관련하여 바울의 일생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곳은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헬라 철학과 수사학을 익히며 자랐습니다. 동시에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으로 흠 잡힐 만한 게 없는 정통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대 최고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로 들어가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삶을 일제 강점기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민족이 깊은 위기에 빠진 때에 어떤 사람이 미국 뉴욕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잘할 뿐 아니라 서양의 최신학문도 해박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안동에 있는 서원에서 정통 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연히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일으킬 유능한 인재로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그 앞에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넓게 열려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민족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보편적인 국제정세도 능통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러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속에 소멸해 가는 이스라엘을 건질 유능한 인재로 많은 격려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손에 든 배경입니다. 그 역시 자신을 향한 기대에 부응하려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야망에 사로잡혀 다메섹을 향해 맹렬하게 내달리던 길에서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돌연히 만났습니다. 마침내 그 분을 자신의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바울에게 일어난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화려한 성공과는 철저히 거리가 멀었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웠고, 끊임없이 짓밟히고 억눌리는 삶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결단이 바울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도 얼마든지 기득권을 움켜쥐며 살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와 로마 제국 사이를 약삭빠르게 오가며 성공가도를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을 감추고 몰래 교회를 도우며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늘 시민권이 그를 강력히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에게도 후회할 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동문수학 했던 친구들의 화려한 성공을 바라보며,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라며 수 없이 스스로 되물었을 겁니다. 그런 자신을 초라하게 여겼던 순간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꿋꿋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외롭고 고된 소명을 묵묵히 살아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학문과 배경을 성공 수단이 아니라 선교의 통로로 사용하였습니다.

그에게 복음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진실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진정 죽어야 다시 사는, 완전한 패배 가운데 찾아오는 부활의 위대한 능력을 온전히 신뢰 하였습니다. 제국이 손짓하는 화려한 성공의 길을 뒤로하고 우직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땅에서 하늘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묵상하며 제 마음에 떠오르는 역사 속 한 장면이 있습니다. 1919년 2월 8일, 그날 일본 동경에는 30년 만에 폭설이 내려 온 도시가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 사이를 헤치고 조선인 청년 600여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YMCA회관에 모였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정기총회로 소집되었습니다. 하지만 총회는 개회기도 후에 곧바로 ‘조선청년 독립단’의 ‘독립선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유학생 대표 백관수가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주창했습니다. 곧이어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이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바로 기독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3.1운동으로 이어지게 한, 2.8독립선언입니다.

저는 대학 시절 총회파송 견습선교사로 1년간 일본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마침 제가 다닌 일본어 학원 건물에 2.8독립선언 기념관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종종 둘러보며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유학생들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땅의 일’만 생각했다면, 일제와 손을 잡고 얼마든지 막대한 권세와 재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동경은 아시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도심 한복판에는 거대한 신궁이 건설되고 있었고 골목마다 신사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꺾은 일본의 힘과 돈과 종교가 너무나 막강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제국의 눈부신 영광은 영원해 보였습니다. 

반면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유학생들은 당시로서는 소수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식민지 청년이었습니다. 조국에서 뒷바라지 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비겁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과는 한 걸음만 물러서고, 열심히 교회 생활하는 것으로 충분히 자기 정당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든 험난한 유혹을 어떻게 결연히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제국의 풍요에 둘러 싸여 그 한 복판에 살았지만, 비록 일본 땅에서 일본어로 공부하며 일본 문화에 젖어 생활했지만, 그들 가슴 깊은 곳에는 하늘 시민권이 뜨겁게 살아 숨 쉬었기 때문입니다. 천황을 자처하며 막강한 무력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일왕이 아니라 갈릴리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을 진정 자신의 유일한 왕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득실거리는 배를 하나님 삼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삶의 기준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2.8 운동의 후예입니다. 한국교회 정신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가오는 엄중한 질문 앞에 마주서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따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땅의 일만 생각하여 부끄러움을 자랑하고 탐욕을 섬기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너무 비장하게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에서 도망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정당하게 열심히 노력해서 필요한 물질과 지위를 얻고 그것을 누리는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일입니다. 다만, 근본적인 삶의 태도와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탐욕에 굴복하고 익숙해져 심지어 신앙마저도 이용하는 죄악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비록 휘청거리고 때때로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슴에 끌어안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약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 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함으로 천국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자신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땅의 욕망에 휘둘려 하늘의 복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위한 참으로 소중한 위로와 권면이 있습니다. 4장 1절 말씀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이 말씀은 앞서 나눈 빌립보서 3장 후반부 내용에 대한 결론입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경청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따뜻하게 위로 하셨습니다. 그 위로 가운데 주님 안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 구절을 오늘 설교 내용에 비추어 문장을 덧붙여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학벌과 재산과 지위와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드넓은 품 안에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삶의 여러 시련으로 비굴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허무한 욕망을 따라 애써 자신을 포장하지 말고) 이와 같이 (그 어떤 좌절과 실패에도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위대한 패배자인)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기도  
참된 왕이신 하나님
때때로 이 땅의 어리석은 경쟁에 골몰하였습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 부끄러운 성공을 자랑하였습니다. 허무한 탐욕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죄악을 회개합니다. 십자가를 대적하며 걸어가는 길의 끝에는 오직 멸망뿐임을 올바로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구원자이심을 삶으로 고백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발은 땅의 현실 위를 굳게 디디지만 마음의 중심은 저 높은 곳을 향하며 하늘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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