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토요일

역대상 15장 1~29절 "말씀으로의 회복"

2019년 5월 13일, 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역대상 15장 1~29절 "말씀으로의 회복"

1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사도행전 4장 32~37절 “부활 공동체의 나눔”

2019년 5월 16일, 삼덕교회 전도부 경건회,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4장 32~37절 “부활 공동체의 나눔”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지금까지 사도행전 말씀을 정리해 보자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용기 있게 전했고 거기에 성령님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마디로 ‘부활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부활만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3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교회에 대한 매우 단순명료한 정의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거기에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런 부활 공동체가 보여준 삶의 모습입니다. 먼저 32절을 보면 개인 재산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물건을 나누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결과 34절에 따르면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5절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사도들이 주도해서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초기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너무나 놀랍고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이런 기록은 많은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사유재산을 쌓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는 것을 정당화 하거나 심지어 이단이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하는데 악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고 일생 검소하게 살아간 교회 역사 속 수많은 수도사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문자적 사실 보다는 그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봐도 오늘 본문 속 장면은 여기에만 나오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무모하게 동경하거나 따라할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그 나눔의 정신입니다. 다시 정리하지만 초기 교회에서의 섬김은 교회 사역의 일부거나 주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리더인 사도들이 주도해서 섬긴 교회의 중심 사역이었고 또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재산에 욕심을 두지 않았고 그 결과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핵심 사역이 어디에 있는가? 교인들이 돈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결과 교회 안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기준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예배를 비롯해서 이 보다 더 중요한 일 많습니다. 또한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고 모아두는 것 자체가 죄는 결코 아닙니다. 게다가 가난 쉽게 해결할기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본문에 펼쳐지는 초기 교회의 모습을 마음에 품고 두고두고 묵상해야할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부활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바람직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 부활을 믿으실 줄 믿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기 위해 이 무더운 날씨에 길거리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그 믿음의 건강함을 확인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 누군가의 부활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매우 훌륭한 경건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에 함께 마음 아파하고 나눌 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막연한 공상이나 허구가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 내면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종교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을 치열한 현실을 완전히 뒤 바꾸는 삶의 전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돈입니다. 이것을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본문 속 초기 교회의 모습처럼 돈의 정신에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늘 부활의 은혜로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후반부는 그러한 초기 교회의 매우 모범적인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 장면 뿐만 아니라 뒤 이어질 사도행전 내용에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36~3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 시간 주목해야할 것은 그의 별명입니다. 태어날 때 정해지는 이름과는 달리 별명은 그가 살아온 삶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별명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위대한 이름입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압축하는 단어가 ‘위로’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고 경청하기 보다는 판단하고 가르치는 것에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네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즉,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자만이 참된 위로의 아들 딸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교인들보다 모범적이고 더욱 앞장서서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안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입고 떠나곤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삶의 시련과 고통이 찾아올 때 위로해주기는커녕 함부로 가르치려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입은 것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진실로 깨달아 아는 사람은 바나바처럼 진실로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그 결과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 신앙은 절대로 모호하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돈을 섬기지 않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나누게 하고 그것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또한 우리를 참된 위로의 자녀로 세워줍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생명이 가득히 흘러넘치는 우리 전도부와 삼덕교회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부활과 생명의 하나님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입은 초기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아파하고 나의 소유를 기꺼이 나눌 수 있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바나바와 같이 진실한 위로를 삶으로 전하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이런 위대한 섬김과 나눔을 통해 복음을 더욱 온전히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사도행전 4장 1~12절 “살리시는 이름”

2019년 5월 9일, 삼덕교회 전도부 경건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4장 1~12절 “살리시는 이름”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지난주에 함께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던 선천적 하반신 장애인이 치유 받은 놀라운 사건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이적이 일어났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 자체에 눈길을 고정하지 않고 그 신비한 일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4장 말씀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자와 장로님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성전 앞에서 장애인이 고침 받은 사건을 두고 누구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2절 후반부에 기록된 것처럼 병 고침 이후에 벌어진 모든 상황들을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관심사는 한 인간에게 찾아온 불행과 그것이 치유되며 얻은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에 따르면 하반신 장애인의 병이 나은 후에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성인 남자만 무려 5천명이나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교회로 모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생명의 말씀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두고 자칫 자신들의 지위에 손상을 있을까봐 불쾌하며 언짢아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담긴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 해서 그 자체가 신앙의 건강성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근 슬쩍 신앙을 이용해 내 욕심을 이루고 싶어할 위험이 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늘 다가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의 내 위치나 지위나 영향력이 아니라 오직 복음 앞에 자신을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을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병 고침 받은 사람에게는 관심 없이 사도들이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행했는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위기의 순간을 복음을 전한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는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핵심을 외쳤습니다. 10~11절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날 때부터 걷지 못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과 아픔을 겪은 한 사람을 살린 것은 로마 제국의 강한 힘이 아니었습니다. 견고한 율법주의도 아니었습니다. 혹은 사도들 개인의 권능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영광 가운데에만 둘러싸인 분이 아닙니다. 쓸모없이 건축자들에게 버림 받은 돌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만이 생명의 진리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방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본문 속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종교생활은 하지만 정작 진리 보다는 욕심을 따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입으로 십자가는 말하지만 정작 그 십자가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낮아지고 양보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힘과 자리를 어떻게든 고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구원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을 12절에 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천하 사람'이 가리키는 로마의 힘과 부유함도 인간을 궁국적인 죽음에서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지 교회라는 조직에 들어와 있고 어떤 교리를 기계적으로 달달 외운다는 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껏 살펴본 12절 앞뒤 맥락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오직 철저히 자기를 비울 때에만, 나의 그릇된 탐욕을 인정하고 나눌 때에만, 때로는 바보처럼 억울하게 당하더라도 참고 희생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구 시내 한 복판에서 전해야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방법과 삶 역시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려한 힘과 많은 돈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름만을 전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만 진정한 희망과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우리를 살리시는 참 생명의 하나님
본문 속 종교지도자들처럼 어리석은 욕심에 사로잡혀 정작 한 생명을 살리는 진리에 무관심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구하는 참된 복음은 황제가 말하는 화려한 승리와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의 본질을 올바로 마음에 새기며 삶으로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사도행전 3장 1~16절 "수단보다 내용으로"

2019년 5월 2일, 삼덕교회 전도부 경건회,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3장 1~16절 "수단보다 내용으로"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이 안에는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진 장면을 비롯해 각종 다양한 이적들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도 살리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번째 치유 이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 다양한 이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 역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적이 가진 위험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적의 화려함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욕망을 자극시키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에 담긴 복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인 제자들이 그 이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시간으로 제 구 시, 오늘날로 따지만 오후 세 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선천적 하반신 마비를 가닌 장애인을 만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고통과 불편을 의미합니다. 하물며 그 옛날의 상황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된 복지체계나 의료도구가 없었던 그 시대 장애인으로서 겪었을 고단함은 분명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그 시대의 세계관은 장애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즉, 본인 혹은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지극히 미개한 견해입니다. 몸이 불편한 것도 서럽고 괴로운 일인데 그렇게 차갑고 냉담한 시선은 그의 내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남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으로 가서 구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평소처럼 사람들의 동정을 자극하는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 장애인이 바라는 것은 그저 좀 더 많이 배를 불릴 먹을거리와 좀 더 편하게 잠을 잘 공간을 제공할 금은보화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 두 제자의 눈을 통해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했던 중요한 말이 담긴 6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지금 일어날 이적은 은과 금을 넘어서는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 안을 휘저어 다녔습니다. 

팔이든 다리든 몸의 근육이나 뼈가 아빠서 움직임에 큰 무리를 겪으셨던 분들을 잘 아실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를 만나 좋은 약을 처방받고 순조롭게 치료가 진행된다 할지라도 단 한 순간에 정상적으로 움직이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은 애초에 펄쩍 뛰고 달려본 경험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놀라운 몸짓을 보인 것은 이 치유 사건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평소 성전을 정기적으로 오가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겪은 장애가 그들로서는 너무나 친숙한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건강한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성전 여기저기를 오가자 사람들은 베드로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김없이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12~26절까지 이지만 편의상 오늘은 16절까지만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인 14~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선포한 내용이 무엇이었죠? 예수님 잘 믿으면 이 사람처럼 병이 낫는다. 일까요? 아니면 우리한테 잘 보이면 이렇게 신비로운 일들을 체험할 수 있고 또 실행할 수 있다고 선전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기적에만 눈길을 뺏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궁극적으로 전한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병 고침은 그 생명의 주님을 증거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내용과 그 복음을 전하는 도구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생명의 진리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절대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수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찬양도 다양한 악기와 장르를 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 각종 영상물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전도 물품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화려한 도구에만 신경 쓰다가 정작 복음을 놓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바로 ‘건물이 전도한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한 때 큰 교회 건물 자체가 홍보 수단이 되어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릇된 신념에 근거해 무리하게 교회를 건축하다가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처럼 병 고침을 통해 전도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자체는 매우 감격적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병 고치는 일에만 집착하여 정작 복음에는 관심을 적게 두는 교회가 적지 않았고 심지어 김기동이나 이재록의 경우처럼 이단으로 변질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그 어떤 화려한 이적도 절대로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앞서 읽었던 6절에서 베드로는 그 장애인이 걷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이름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뭐가 더 붙죠? 바로 ‘나사렛’입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담긴 베드로의 고백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사렛은 그 시절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대받고 소외된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즉, 병을 고치는 화려한 이적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압축하는 호칭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이루셨지만 사람들과 세상을 살리는 참된 힘은 화려한 이적이 아니라 나사렛의 초라한 일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복음의 본질을 무시한 채 오로지 비본질적인 화려한 겉모습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실상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그 장애인이 본래 구했던 ‘은과 금’을 구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자극적이고 눈부신 수단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 역시 함부로 피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정작 도구에 신경 쓰느라 복음의 내용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가만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신 오늘 본문 속 사도들처럼 그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을 살아내고 전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온 세상을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명과 진리의 하나님
가난하고 병든 삶 가운데 이루실 놀라운 이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이 화려한 도구에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죽어야 다시 사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 자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19년 6월 8일 토요일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2019년 6월 7일,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본문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 애 3:19~24, 새번역 성경

예레미야는 구약에서 상당히 독특한 인물 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기록된 예언서와 함께 시가서인 ‘예레미야애가’를 후대에 남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예언과 기도의 바른 의미와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예레미야애가는 일반적으로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함락당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이해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은 단지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정치·군사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고 섬긴 신이 다른 나라의 신에 굴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시대 유다 사람들 가슴 깊이 새겨진 절망과 슬픔은 우리가 감히 헤아리기 힘든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긴 했지만 그 역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의 시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연거푸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애가의 원문은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예언자는 자신의 울분과 원망을 주님께 거침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 방식입니다. 이 책은 총 다섯 편의 시(詩)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1,2,4,5장은 모두 22절로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개수가 22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절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자음 순서로 이어져 운율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글로 예를 들면 초성을 “ㄱㄴㄷㄹ”순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머리장단에 맞춘 노래’라는 의미로 ‘답관체’(踏冠體, acrostic)로 불리는 히브리 문학 형식입니다. 본문 외에도 25편과 119편을 비롯한 여러 시편과 잠언 31장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포함된 3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3절씩 이어져 다른 장들보다 3배 더 많은, 총 6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보시는 화면은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의 구약 원문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시더라도 세 절 씩 같은 글자로 시작하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이런 표현방식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3장이 예레미야애가 전체의 핵심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그 중심 주제에 사람들이 좀 더 집중하도록 시편의 예배 전통을 따라 무척 정교한 구성을 갖추어 자신의 시가서를 완성하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형식을 유지하며 글을 쓰기위해서는 굉장히 탁월한 지성과 냉철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레미야애가가 담고 있는 내용 자체는 매우 격정적입니다. 하지만 그 정서를 표현한 방법은 너무나 질서정연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아무렇게나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1절 말씀과 같이 그 절망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며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손에까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예배 정신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당부 드립니다. 부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삶의 고난 속에 신앙으로 위장한 미신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초월을 기대하면 할수록 동시에 이성과 상식의 눈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병적인 맹신에서 벗어나 건강한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2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그 고통”을 “쓴 쑥”과 “쓸개즙”이라는 미각(味覺)적인 단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마치 혀끝을 강력히 자극하고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쓴 맛”처럼 그 고통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마음 깊이 밀어닥친 우울함으로 내면 깊은 떨림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확신하기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예언자의 탄식에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겪었고 또 지금 맛보고 있는 인생의 “쓴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현실입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비관론이 건강하지 못하듯이 무모한 낙관론 또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런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모든 상처와 똑바로 마주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충분히 아파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덮쳐온 그 모든 문제들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탄식은 자기 자신만이 아닌 민족과 열방을 향한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단순히 사적인 몰락과 실패 때문에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언자가 흘린 눈물은 그 한 사람의 여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눈물에 담긴 세계는 유다와 바벨론과 서아시아와 온 세상을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아픔은 분명 각각 고유의 영역이기에 충분히 존중 받아야 합니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에 대해 결코 함부로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괴로운 처지에만 집착하며 주위 고통에 무관심한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소통과 공감 없이 오로지 나의 손해와 억울함에만 골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이 겪었던 힘겨운 시간들을 통해 이웃의 아픔에 더욱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민국과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그러지고 뒤틀린 질서 아래 절망하는 약자들과 함께 눈물 흘려야 합니다. 파괴되는 생태계와 함께 신음하며 주님의 창조 세계가 다시금 아름답게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 절망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깊고 깊은 절망의 중심에서 전혀 뜻밖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21~23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절망과 직면하며 처참하게 몸부림치던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고통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깨달음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움터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희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성의 저항”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실패하고, 날마다 힘겨운 일들만 계속 이어지는 상황 가운데서도 무모하게 “희망”을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학습된 강박을 내려놓고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분명히 마주할 때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그 놀라운 희망을 가슴에 품게 된 까닭은 혹독한 불행가운데서도 매일 아침 마다 새롭게 자신을 향해 오는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끝없는 긍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흔히 말하는 굉장히 독실한 믿음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삶 전반에는 모범적이고 얌전한 신앙인의 모습 보다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처럼 절규하며 흐느끼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인 예레미야 20장 14~18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15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16 바로 그 사람은 주님께서 사정없이 뒤엎어 놓으신 성읍들처럼 되어서, 아침에는 울부짖는 고통 소리를 듣고, 대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어야 했는데. 17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도저히 체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예레미야의 가슴 절절한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그의 적나라한 통곡소리를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이 그 모든 고통의 몸부림을 품고 다가와 그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망의 언덕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애써 착한 척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얼마든지 주님께 원망하고 탄식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 위에서 처참히 피를 흘리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피맺힌 십자가가 부활의 생명을 꽃 피웠듯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내뱉는 우리의 신음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생생히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은 말랑말랑한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새하얗게 표백된 종교 관념도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로 찐득찐득한 땀과 눈물과 피로 뒤범벅된 채 달려오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제아무리 부정하려 애쓰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결코 믿어지지 않지만, 날마다 새롭게 내면 깊이 자리 잡는, 그리하여 결국 끝내 안길 수밖에 없는 주님의 놀라운 긍휼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수도사인 성 파이시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 속에서 이렇게 말하자.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성 파이시오스, 아토스성산의 수도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시련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지니는 숙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을 관통해 볼 줄 아는 내면의 시력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하시기에, 그 모든 좌절과 굴욕과 고통은 결코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진실로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은혜의 과정임을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문제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에 억지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어두움에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충분히 아파해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마음껏 울어야 마침내 웃을 수 있습니다. 한없이 절망해야 오히려 희망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회복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의 고백을 함께 드리길 원합니다. 24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한 번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여기서 새번역 성경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문학적으로 풀어서 옮겼고, 개역개정성경은 “기업”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지파와 가문 별로 제비 뽑아 나눈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토지는 유목생활을 마치고 이제 농경생활을 막 시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예언자의 고백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존하고 생활하는 근거입니다.”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이러한 선언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기꺼이 동참 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조금만 더 정직히 들여다본다면 매우 다른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 대신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우상화 하며 나의 어리석은 탐욕을 대신 이루어줄 분으로 이용하려 들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진리를 따르기 보다는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이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주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믿고 따르는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레미야처럼 위기 가운데 어떤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지 보면 됩니다. 누구나 곤란함과 어려움 속에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거창하게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과연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좀 더 많은 돈을 움켜쥐기 위해 추한 모습으로 애쓰기 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약자들을 억누르며 존재감 과시하기 보다는 더욱 섬겨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진정 소망한다면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손해보고 희생해야 합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의연한 찬양을 드리는 예레미야의 상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진실로 자신을 풍요롭게 하며 희망을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공동체를 향해 참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부디 거듭 바라기는 이와 같은 찬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도 이어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도 제 마음은 한 없이 무겁고 또 죄송하기만 합니다. 험난한 세상 가운데 성도님들이 겪고 계신 온갖 불안과 염려가 때로는 감사와 찬양조차 사치스럽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아닌,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걷는 길벗으로서 당부 드립니다. 온 몸으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며 진리를 외친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의지하여 간곡히 권면합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신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을 날마다 가득히 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맞서 그 하나님만이 진정 우리의 모든 것이요 희망임을 항상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나님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주님을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는 한결같은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요 참된 희망임을 온 삶을 통해 고백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의 현실을 몸소 살아내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