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토요일

사도행전 3장 1~16절 "수단보다 내용으로"

2019년 5월 2일, 삼덕교회 전도부 경건회,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3장 1~16절 "수단보다 내용으로"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이 안에는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진 장면을 비롯해 각종 다양한 이적들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도 살리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번째 치유 이적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 다양한 이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 역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적이 가진 위험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적의 화려함은 본능적으로 사람의 욕망을 자극시키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에 담긴 복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인 제자들이 그 이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 시간으로 제 구 시, 오늘날로 따지만 오후 세 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선천적 하반신 마비를 가닌 장애인을 만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고통과 불편을 의미합니다. 하물며 그 옛날의 상황을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된 복지체계나 의료도구가 없었던 그 시대 장애인으로서 겪었을 고단함은 분명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그 시대의 세계관은 장애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즉, 본인 혹은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지극히 미개한 견해입니다. 몸이 불편한 것도 서럽고 괴로운 일인데 그렇게 차갑고 냉담한 시선은 그의 내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남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으로 가서 구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평소처럼 사람들의 동정을 자극하는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 장애인이 바라는 것은 그저 좀 더 많이 배를 불릴 먹을거리와 좀 더 편하게 잠을 잘 공간을 제공할 금은보화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 두 제자의 눈을 통해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했던 중요한 말이 담긴 6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지금 일어날 이적은 은과 금을 넘어서는 진정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 안을 휘저어 다녔습니다. 

팔이든 다리든 몸의 근육이나 뼈가 아빠서 움직임에 큰 무리를 겪으셨던 분들을 잘 아실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를 만나 좋은 약을 처방받고 순조롭게 치료가 진행된다 할지라도 단 한 순간에 정상적으로 움직이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은 애초에 펄쩍 뛰고 달려본 경험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놀라운 몸짓을 보인 것은 이 치유 사건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평소 성전을 정기적으로 오가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겪은 장애가 그들로서는 너무나 친숙한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건강한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성전 여기저기를 오가자 사람들은 베드로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김없이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12~26절까지 이지만 편의상 오늘은 16절까지만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인 14~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선포한 내용이 무엇이었죠? 예수님 잘 믿으면 이 사람처럼 병이 낫는다. 일까요? 아니면 우리한테 잘 보이면 이렇게 신비로운 일들을 체험할 수 있고 또 실행할 수 있다고 선전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기적에만 눈길을 뺏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궁극적으로 전한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병 고침은 그 생명의 주님을 증거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내용과 그 복음을 전하는 도구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생명의 진리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신앙의 본질은 절대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수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찬양도 다양한 악기와 장르를 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위해 각종 영상물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전도 물품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화려한 도구에만 신경 쓰다가 정작 복음을 놓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바로 ‘건물이 전도한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한 때 큰 교회 건물 자체가 홍보 수단이 되어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릇된 신념에 근거해 무리하게 교회를 건축하다가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처럼 병 고침을 통해 전도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자체는 매우 감격적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병 고치는 일에만 집착하여 정작 복음에는 관심을 적게 두는 교회가 적지 않았고 심지어 김기동이나 이재록의 경우처럼 이단으로 변질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그 어떤 화려한 이적도 절대로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앞서 읽었던 6절에서 베드로는 그 장애인이 걷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이름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뭐가 더 붙죠? 바로 ‘나사렛’입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담긴 베드로의 고백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사렛은 그 시절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대받고 소외된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즉, 병을 고치는 화려한 이적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철저히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압축하는 호칭이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이루셨지만 사람들과 세상을 살리는 참된 힘은 화려한 이적이 아니라 나사렛의 초라한 일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복음의 본질을 무시한 채 오로지 비본질적인 화려한 겉모습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실상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그 장애인이 본래 구했던 ‘은과 금’을 구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자극적이고 눈부신 수단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 역시 함부로 피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정작 도구에 신경 쓰느라 복음의 내용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가만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신 오늘 본문 속 사도들처럼 그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을 살아내고 전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온 세상을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명과 진리의 하나님
가난하고 병든 삶 가운데 이루실 놀라운 이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이 화려한 도구에만 머물지 않게 하시고 죽어야 다시 사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 자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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