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8일 토요일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2019년 6월 7일,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본문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 애 3:19~24, 새번역 성경

예레미야는 구약에서 상당히 독특한 인물 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기록된 예언서와 함께 시가서인 ‘예레미야애가’를 후대에 남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예언과 기도의 바른 의미와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예레미야애가는 일반적으로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함락당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이해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은 단지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정치·군사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고 섬긴 신이 다른 나라의 신에 굴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시대 유다 사람들 가슴 깊이 새겨진 절망과 슬픔은 우리가 감히 헤아리기 힘든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긴 했지만 그 역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의 시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연거푸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애가의 원문은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예언자는 자신의 울분과 원망을 주님께 거침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 방식입니다. 이 책은 총 다섯 편의 시(詩)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1,2,4,5장은 모두 22절로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개수가 22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절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자음 순서로 이어져 운율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글로 예를 들면 초성을 “ㄱㄴㄷㄹ”순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머리장단에 맞춘 노래’라는 의미로 ‘답관체’(踏冠體, acrostic)로 불리는 히브리 문학 형식입니다. 본문 외에도 25편과 119편을 비롯한 여러 시편과 잠언 31장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포함된 3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3절씩 이어져 다른 장들보다 3배 더 많은, 총 6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보시는 화면은 예레미야애가 3장 1~9절의 구약 원문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시더라도 세 절 씩 같은 글자로 시작하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이런 표현방식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3장이 예레미야애가 전체의 핵심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그 중심 주제에 사람들이 좀 더 집중하도록 시편의 예배 전통을 따라 무척 정교한 구성을 갖추어 자신의 시가서를 완성하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형식을 유지하며 글을 쓰기위해서는 굉장히 탁월한 지성과 냉철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레미야애가가 담고 있는 내용 자체는 매우 격정적입니다. 하지만 그 정서를 표현한 방법은 너무나 질서정연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아무렇게나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1절 말씀과 같이 그 절망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며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손에까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예배 정신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당부 드립니다. 부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삶의 고난 속에 신앙으로 위장한 미신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초월을 기대하면 할수록 동시에 이성과 상식의 눈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병적인 맹신에서 벗어나 건강한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2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그 고통”을 “쓴 쑥”과 “쓸개즙”이라는 미각(味覺)적인 단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마치 혀끝을 강력히 자극하고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쓴 맛”처럼 그 고통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마음 깊이 밀어닥친 우울함으로 내면 깊은 떨림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확신하기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예언자의 탄식에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겪었고 또 지금 맛보고 있는 인생의 “쓴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현실입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비관론이 건강하지 못하듯이 무모한 낙관론 또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런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모든 상처와 똑바로 마주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충분히 아파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덮쳐온 그 모든 문제들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탄식은 자기 자신만이 아닌 민족과 열방을 향한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단순히 사적인 몰락과 실패 때문에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언자가 흘린 눈물은 그 한 사람의 여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눈물에 담긴 세계는 유다와 바벨론과 서아시아와 온 세상을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아픔은 분명 각각 고유의 영역이기에 충분히 존중 받아야 합니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에 대해 결코 함부로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괴로운 처지에만 집착하며 주위 고통에 무관심한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소통과 공감 없이 오로지 나의 손해와 억울함에만 골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이 겪었던 힘겨운 시간들을 통해 이웃의 아픔에 더욱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민국과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그러지고 뒤틀린 질서 아래 절망하는 약자들과 함께 눈물 흘려야 합니다. 파괴되는 생태계와 함께 신음하며 주님의 창조 세계가 다시금 아름답게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 절망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깊고 깊은 절망의 중심에서 전혀 뜻밖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21~23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절망과 직면하며 처참하게 몸부림치던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고통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깨달음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움터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희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성의 저항”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실패하고, 날마다 힘겨운 일들만 계속 이어지는 상황 가운데서도 무모하게 “희망”을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학습된 강박을 내려놓고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분명히 마주할 때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그 놀라운 희망을 가슴에 품게 된 까닭은 혹독한 불행가운데서도 매일 아침 마다 새롭게 자신을 향해 오는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끝없는 긍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흔히 말하는 굉장히 독실한 믿음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삶 전반에는 모범적이고 얌전한 신앙인의 모습 보다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처럼 절규하며 흐느끼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인 예레미야 20장 14~18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15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16 바로 그 사람은 주님께서 사정없이 뒤엎어 놓으신 성읍들처럼 되어서, 아침에는 울부짖는 고통 소리를 듣고, 대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어야 했는데. 17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도저히 체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예레미야의 가슴 절절한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그의 적나라한 통곡소리를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이 그 모든 고통의 몸부림을 품고 다가와 그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망의 언덕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애써 착한 척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얼마든지 주님께 원망하고 탄식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 위에서 처참히 피를 흘리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피맺힌 십자가가 부활의 생명을 꽃 피웠듯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내뱉는 우리의 신음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생생히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은 말랑말랑한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새하얗게 표백된 종교 관념도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로 찐득찐득한 땀과 눈물과 피로 뒤범벅된 채 달려오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제아무리 부정하려 애쓰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결코 믿어지지 않지만, 날마다 새롭게 내면 깊이 자리 잡는, 그리하여 결국 끝내 안길 수밖에 없는 주님의 놀라운 긍휼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수도사인 성 파이시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 속에서 이렇게 말하자.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성 파이시오스, 아토스성산의 수도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시련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지니는 숙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을 관통해 볼 줄 아는 내면의 시력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하시기에, 그 모든 좌절과 굴욕과 고통은 결코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진실로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은혜의 과정임을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문제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에 억지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어두움에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충분히 아파해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마음껏 울어야 마침내 웃을 수 있습니다. 한없이 절망해야 오히려 희망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회복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의 고백을 함께 드리길 원합니다. 24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한 번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여기서 새번역 성경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문학적으로 풀어서 옮겼고, 개역개정성경은 “기업”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지파와 가문 별로 제비 뽑아 나눈 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토지는 유목생활을 마치고 이제 농경생활을 막 시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예언자의 고백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존하고 생활하는 근거입니다.”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이러한 선언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기꺼이 동참 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조금만 더 정직히 들여다본다면 매우 다른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 대신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우상화 하며 나의 어리석은 탐욕을 대신 이루어줄 분으로 이용하려 들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진리를 따르기 보다는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이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주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믿고 따르는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레미야처럼 위기 가운데 어떤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지 보면 됩니다. 누구나 곤란함과 어려움 속에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거창하게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과연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좀 더 많은 돈을 움켜쥐기 위해 추한 모습으로 애쓰기 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약자들을 억누르며 존재감 과시하기 보다는 더욱 섬겨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진정 소망한다면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손해보고 희생해야 합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의연한 찬양을 드리는 예레미야의 상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진실로 자신을 풍요롭게 하며 희망을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공동체를 향해 참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부디 거듭 바라기는 이와 같은 찬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도 이어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도 제 마음은 한 없이 무겁고 또 죄송하기만 합니다. 험난한 세상 가운데 성도님들이 겪고 계신 온갖 불안과 염려가 때로는 감사와 찬양조차 사치스럽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아닌,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걷는 길벗으로서 당부 드립니다. 온 몸으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며 진리를 외친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의지하여 간곡히 권면합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신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을 날마다 가득히 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맞서 그 하나님만이 진정 우리의 모든 것이요 희망임을 항상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나님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주님을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는 한결같은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요 참된 희망임을 온 삶을 통해 고백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의 현실을 몸소 살아내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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