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토요일

사도행전 4장 1~12절 “살리시는 이름”

2019년 5월 9일, 삼덕교회 전도부 경건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4장 1~12절 “살리시는 이름”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지난주에 함께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했던 선천적 하반신 장애인이 치유 받은 놀라운 사건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런 이적이 일어났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 자체에 눈길을 고정하지 않고 그 신비한 일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4장 말씀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목회자와 신학자와 장로님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성전 앞에서 장애인이 고침 받은 사건을 두고 누구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2절 후반부에 기록된 것처럼 병 고침 이후에 벌어진 모든 상황들을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관심사는 한 인간에게 찾아온 불행과 그것이 치유되며 얻은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에 따르면 하반신 장애인의 병이 나은 후에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자 성인 남자만 무려 5천명이나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교회로 모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생명의 말씀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두고 자칫 자신들의 지위에 손상을 있을까봐 불쾌하며 언짢아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 담긴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많은 봉사를 한다 해서 그 자체가 신앙의 건강성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근 슬쩍 신앙을 이용해 내 욕심을 이루고 싶어할 위험이 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늘 다가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의 내 위치나 지위나 영향력이 아니라 오직 복음 앞에 자신을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을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병 고침 받은 사람에게는 관심 없이 사도들이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행했는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위기의 순간을 복음을 전한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는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핵심을 외쳤습니다. 10~11절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날 때부터 걷지 못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과 아픔을 겪은 한 사람을 살린 것은 로마 제국의 강한 힘이 아니었습니다. 견고한 율법주의도 아니었습니다. 혹은 사도들 개인의 권능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영광 가운데에만 둘러싸인 분이 아닙니다. 쓸모없이 건축자들에게 버림 받은 돌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만이 생명의 진리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방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본문 속 제사장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종교생활은 하지만 정작 진리 보다는 욕심을 따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입으로 십자가는 말하지만 정작 그 십자가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낮아지고 양보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힘과 자리를 어떻게든 고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구원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을 12절에 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천하 사람'이 가리키는 로마의 힘과 부유함도 인간을 궁국적인 죽음에서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지 교회라는 조직에 들어와 있고 어떤 교리를 기계적으로 달달 외운다는 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껏 살펴본 12절 앞뒤 맥락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오직 철저히 자기를 비울 때에만, 나의 그릇된 탐욕을 인정하고 나눌 때에만, 때로는 바보처럼 억울하게 당하더라도 참고 희생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구 시내 한 복판에서 전해야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방법과 삶 역시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려한 힘과 많은 돈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름만을 전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만 진정한 희망과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우리를 살리시는 참 생명의 하나님
본문 속 종교지도자들처럼 어리석은 욕심에 사로잡혀 정작 한 생명을 살리는 진리에 무관심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구하는 참된 복음은 황제가 말하는 화려한 승리와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습니다.
그 믿음의 본질을 올바로 마음에 새기며 삶으로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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