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5일 토요일

사도행전 4장 32~37절 “부활 공동체의 나눔”

2019년 5월 16일, 삼덕교회 전도부 경건회,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4장 32~37절 “부활 공동체의 나눔”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지금까지 사도행전 말씀을 정리해 보자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용기 있게 전했고 거기에 성령님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마디로 ‘부활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부활만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3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교회에 대한 매우 단순명료한 정의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거기에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런 부활 공동체가 보여준 삶의 모습입니다. 먼저 32절을 보면 개인 재산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물건을 나누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결과 34절에 따르면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5절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사도들이 주도해서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초기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너무나 놀랍고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이런 기록은 많은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사유재산을 쌓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고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는 것을 정당화 하거나 심지어 이단이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하는데 악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저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고 일생 검소하게 살아간 교회 역사 속 수많은 수도사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문자적 사실 보다는 그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봐도 오늘 본문 속 장면은 여기에만 나오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무모하게 동경하거나 따라할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그 나눔의 정신입니다. 다시 정리하지만 초기 교회에서의 섬김은 교회 사역의 일부거나 주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리더인 사도들이 주도해서 섬긴 교회의 중심 사역이었고 또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재산에 욕심을 두지 않았고 그 결과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핵심 사역이 어디에 있는가? 교인들이 돈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 결과 교회 안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기준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예배를 비롯해서 이 보다 더 중요한 일 많습니다. 또한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고 모아두는 것 자체가 죄는 결코 아닙니다. 게다가 가난 쉽게 해결할기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본문에 펼쳐지는 초기 교회의 모습을 마음에 품고 두고두고 묵상해야할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부활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바람직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 부활을 믿으실 줄 믿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기 위해 이 무더운 날씨에 길거리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그 믿음의 건강함을 확인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 누군가의 부활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매우 훌륭한 경건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에 함께 마음 아파하고 나눌 수 있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막연한 공상이나 허구가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 내면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종교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을 치열한 현실을 완전히 뒤 바꾸는 삶의 전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돈입니다. 이것을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본문 속 초기 교회의 모습처럼 돈의 정신에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늘 부활의 은혜로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후반부는 그러한 초기 교회의 매우 모범적인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 장면 뿐만 아니라 뒤 이어질 사도행전 내용에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36~3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 시간 주목해야할 것은 그의 별명입니다. 태어날 때 정해지는 이름과는 달리 별명은 그가 살아온 삶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별명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 위대한 이름입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압축하는 단어가 ‘위로’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고 경청하기 보다는 판단하고 가르치는 것에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네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즉, 참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자만이 참된 위로의 아들 딸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교인들보다 모범적이고 더욱 앞장서서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안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입고 떠나곤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삶의 시련과 고통이 찾아올 때 위로해주기는커녕 함부로 가르치려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입은 것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진실로 깨달아 아는 사람은 바나바처럼 진실로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그 결과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 신앙은 절대로 모호하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돈을 섬기지 않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나누게 하고 그것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또한 우리를 참된 위로의 자녀로 세워줍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생명이 가득히 흘러넘치는 우리 전도부와 삼덕교회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부활과 생명의 하나님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입은 초기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아파하고 나의 소유를 기꺼이 나눌 수 있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바나바와 같이 진실한 위로를 삶으로 전하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이런 위대한 섬김과 나눔을 통해 복음을 더욱 온전히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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