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일요일

누가복음 18장 18~30절 “구원 너머의 구원”

2022년 3월 3일, 목,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8장 18~30절 “구원 너머의 구원”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남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얼핏보기에 좋은 태도입니다. 질문에는 그 사람이 가진 관심사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는 영생에 관한 내면 깊은 목마름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한 갈증이 그의 걸음을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9절에 보면 이렇게 퉁명스럽게 되 받아 칩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그런다음 이미 그가 답을 알고 있다며 십계명 중 5~10번째 계명을 나열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런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예상하셨다는 듯이 곧바로 날카로운 진리를 그에게 들이 미셨습니다. 22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십계명으로 대답하는 관리에게 예수님은 또 다른 계명을 제시합니다. 바로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러한 베품은 헛되지 않고 그에게 하늘 보화가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말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몹시 근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관리를 따뜻하게 다독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쐐기를 박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24~25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렵냐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쉬울 정도입니다. 절대적인 난이도입니다. 사실상 ‘불가능’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그 부자 관원 한사람의 마음만 흔들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둘러싼 모든 사람들을 심난하게 하였습니다. 본문 26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26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부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부자들로 하여금 가진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 금과옥조처럼 떠 받들었던 율법에 근거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모두는 율법의 영향력 아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에 관해 그토록 엄중하게 선언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담감은 예수님의 명백한 의도입니다. 주님은 어느 이름모를 관리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내면에 숨긴 진실을 폭로하였습니다. 그가 주님께 질문한 것은 답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답을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즉, 자기가 얼마나 철저히 율법을 따르는 사람인지를 내세우고 싶었습니다. 그 시대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한 영생의 방법을 자신이 얼마나 굳세게 걸어가고 있는 지를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스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악한 의도에 말려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가진 오류를 냉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2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느 부자 관원과의 대화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포함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에 있어 인간은 철저히 무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더 정확히는 인간에게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다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절망과 시련을 이기는 길은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토록 철저히 죽임당하고, 마침내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독재자의 횡포가 아닌 사랑의 섬김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철저히 낮아지시고 연약하고 비참해져야 합니다. 그 결과 끔찍하게 죽임당해야 합니다. 창조주시며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는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전능을 기꺼이 낮아지고 내려놓는 일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권능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 세상의 허무함 힘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침 어제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을 맞이하는 사십일 동안 우리 주님의 위대한 구원에 담긴 희생을 마음 깊이 묵상하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더욱더 스스로를 돌보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님의 능력이 그런 우리 모두를 감싸안고 생명의 여정으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9장 1~17절 “오병이어와 제자들”

2022년 2월 1일, 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9장 1~17절 “오병이어와 제자들”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식사는 숭고한 예식입니다. 단순한 생존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동입니다. 밥은 살아갈 이유와 힘을 제공하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식탁은 함께 둘러 앉은 이들을 식구로 연결시키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즐겨 식사하시며 말씀을 나눈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병이어’ 사건은 성경에서 매우 큰 울림을 가집니다. 갈릴리 들판에서 성인 남자만 5천명이 되는 어마어마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작은 한 어린 아이가 내어 놓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감격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읽기만 해도 가슴이 벅찬데, 그 위대한 식탁에 함께 참여하며 얼마나 큰 감격을 했겠습니까?

그 때 그들의 배를 채운 것은 단순한 식품이 아닙니다. 그들은 절망에 익숙해진, 가난한 현실을 넘어서는 따뜻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메마른 몸을 끌어안아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로마 제국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생생히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습니다. 단지 작은 물건이 순식간에 많이 늘어난 마술적인 현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자’의 시선으로 이 위대한 이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관련해서 누가복음 9장의 내용 흐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1~6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해 전도하게 하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검소한 복장으로 길을 나섰지만 복음을 전하는 곳곳마다 병을 고치는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전도여행은 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갈릴리 지역을 통치했던 분봉왕 헤롯을 긴장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례자 요한을 그가 처형시켰기 때문입니다. 가장 걸림돌이었던 인물을 없앴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인물인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분봉완 헤롯은 예수님을 주목하고 관심을 가집니다. 이것은 나중에 십자가 처형에 그가 관여할 것을 미리 암시합니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에게 곧 닥쳐올 고난과 시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간소한 차림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섰습니다. 분명 몹시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권능을 경험하며 그 모두를 넘어서는 보람과 희열 또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자들을 더욱더 흥분시키는 일이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이적은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건의 관람자가 아닙니다. 14~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수많은 무리 사이를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니며 질서를 유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50명씩 앉히고 떡과 물고기를 전달 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실컷 먹었을 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사건 전체를 몸소 경험하였습니다.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신비를 절절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스승,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이토록 강력한 능력이 있는 주님,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감동시키시는 주님께서 분명 왕좌에 오를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을 너무나 설레고 들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황홀한 풍요와 성취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취한 성공이 어떤 위기를 가져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고 답했습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을 들은 후 주님은 비로소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오병이어를 둘러싸고 제자들의 마음은 냉탕과 온탕을 오갔습니다. 뜨거운 감격과 서늘한 긴장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뼈아픈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제자도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십자가의 사명 가운데 때로 힘겨운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배당을 들락거리는 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삼고 그분을 배우고 닮아가길 소망하는 제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감격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진리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이 중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환호만하거나 제자로서 겪는 시련에 절망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 둘을 모두 끌어 안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러한 균형감각을 유지하길 소망합니다. 제자로서의 올바른 소명의식을 회복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참으로 풍요롭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장 57~66절 “그 이름, 요한”

2022년 1월 5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장 57~66절 “그 이름, 요한”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모든 생명을 소중합니다. 따라서 모든 출산은 당연히 축하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위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 모은 출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이 그러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인 사가랴입니다. 모세 율법에 따라 제사장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렇기에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임신에 대한 더욱더 큰 부담을 안고 살았습니다. 단지 한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을 넘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낳고 기를 책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로마제국의 압제로 인해 크나큰 시련을 겪고 있는 유다 민족의 상황에서 그 부담감은 무척 압도적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두 부부의 상황에 대해 누가복음 1장 5~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이 중에서 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한 채 두 부부가 나이 들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사실을  덤덤한 문체로 알려주지만 이 안에 담긴 내밀한 상황은 무척 처절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 겪고 있는 불행을 두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무시한 채, 뭔가 지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아 그런 일을 겪은 거라며 잔인한 말을 내뱉는 살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어리석은 우월감을 느끼려는 무지 몽매한 행동입니다.

하물며 고대 사람들은 더욱더 그런 어리석음을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난임을 곧 신의 저주로 당연시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겪었던 어려움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만 두 부부가 얼마나 많이 아파하고 괴로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임신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것입니다. 때로 꿈을 꾼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려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 분향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주의 사자, 즉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 말씀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마침내 엘리사벳이 사가랴의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에는 하나의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을 ‘요한’으로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기도 제목이 이루어 질 거라고 천사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기뻐 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장면은 정반대입니다.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대행자인 천사이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눈부시게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사가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렇기에 되 물었습니다. 나와 내 아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너무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불신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아기가 태어나는 날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다시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내용입니다. 엘리사벳이 마침내 아기를 낳았습니다. 앞서 설명한 배경대로 이 사건은 흔히 볼 수 있는 출산 장면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나이 많은 여인의 잉태능력이 소생한 끝에 맺은 결실입니다. 

제사장의 소임을 감당할 또 다른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성전제도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드러난 놀랍고도 복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척들이 주님의 크신 긍휼을 바라보며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고 팔일이 되어 율법에 따라 할례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유아세례 못지않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뜻깊은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때 아기 이름을 두고 실랑이가 펼쳐집니다. 

이름이 가진 엄청난 상징성 때문에 지금도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부모들에게 큰 고민 거리입니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명문대가 일수록 항렬을 따져 신중하게 짓기 마련입니다. 카스트 제도로 신분질서가 엄격한 인도의 경우 이름만 듣고도 어느 계급인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사가랴의 엘리사벳이 낳은 아기의 이름 또한 두 부부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기는 엄연히 제사장 가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친척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가랴’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은 엉뚱하게도 ‘요한’으로 이름짓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친척들은 뭘 모르는 엘리사벳이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제사장인 사가랴가 누가 들어도 제사장 같은 품격을 가진, 이미 친척들 중에 사용하는 이름으로 정해 줄거라 기대 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글씨를 쓸 수 있는 서판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역시 엘리사벳처럼 ‘요한’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천사를 통해 아기의 탄생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께 주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앞서 자신이 성전에서 보인 불신앙에 대한 반성이자 약속을 이루신 주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요한의 입이 다시 열리고 혀가 풀려서 10개월간의 언어 장애에서 벗어났습니다. 능숙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본문이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때 자기가 지난 번 성전에서 왜 한참동안 시간을 보냈는지, 어떻게 한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는지, 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게되었는지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천사를 통해 하신 주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을 기꺼이 찬송 하였습니다.

그 때, 이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65~66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요한이 태어난 것 자체가 이루말 수 없는 복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서 울고 있는 아기 요한은 단순히 제사장의 후계자로서 정해진 뻔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이제 분명히 이루실 것이고 그 일을 알리는 존재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소식에 그들은 압도되었습니다. 한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이 온 유대 산골에 퍼졌습니다. 듣는 사람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제 펼쳐질 요한의 삶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 그대로 요한은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며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충실히 살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요한과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감격적인 순종과 믿음의 상징인 ‘요한’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셨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요한과 같은 특별한 탄생 과정을 거친것도 아니고 거창한 성장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금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와 요한이 뭐가 같다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알리는 점에서 우리 역시 같은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본문을 뒤집어 이해해야 합니다. 당장 겉보기에는 요한의 탄생 장면과 우리의 삶이 달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목 하시고 기대하십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비범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 하루도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장 39~56절 “다른 세상을 향한 노래”

2022년 1월 4일, 화,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장 39~56절 “다른 세상을 향한 노래”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어제 함께 읽은 본문에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메시아를 임신하게 될 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천사는 그녀에게 이 사실이 은혜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로서는 너무나 위험한 은혜였습니다.  

점점 불러올 그녀의 배를 보고 사람들이 싸늘한 눈길들 보낼 것이 분명했습니다. 더 나아가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녀에게 돈과 권력의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공포는 마리아의 비천함을 새삼 드러내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같은 상황이 예루살렘 궁궐에 살던 왕족이나 로마 총독의 딸에게 있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 나름의 어려움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대한 재물과 권세가 보호막이 되어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리아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녀 앞에 어떤 시련이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천사가 위로하며 언급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친척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들어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잉태하였습니다. 그 아기는 마리아가 낳을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단지 친척으로, 혈육으로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실에 마리아로서는 무척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토로할 대상이 마침, 평소 믿고 의지하던 친척 엘리사벳입니다. 그래서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곧바로 엘리사벳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 때 마리아가 후덕한 어른에게 기대한 것은 따뜻한 말 몇 마디와 포옹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마리아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뜻 밖의 놀라운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기뻐하며 움직였습니다. 

엘리사벳으로서는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마리아로부터 아무런 얘기를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행하실 일을 금세 깨달았습니다. 마리아와 그녀의 아기가 복이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 뛰놀았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5절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은 38절에 기록된, 천사에게 한 마리아의 대답을 인용합니다. 그때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이같은 마리아의 말을 엘리사벳은 직접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신앙 고백을 엘리사벳이 다시 언급하며 마리아가 참으로 복 받은 존재임을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마리아가 너무나 큰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극심한 두려움을 떨치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좌절을 딛고 일어나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찬양으로 녹여 불렀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마리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감정만 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펼치실 사역의 본질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미 오래전 한나가 어렵게 낳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한 내용을 명확히 이해 하였습니다. 여기에 담긴 주님의 통치가 자기 뱃속에 찾아올 아기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찬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핵심 주제는 ‘뒤집어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본문 52~5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세상살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단연코 권력과 돈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갖고자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살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제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풍족한 재물을 소유한다면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이른바 기득권들은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기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움켜쥐려 합니다. 더 나아가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역사책 곳곳은 그렇게 흘린 피로 흥건하게 적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아래로 내리십니다. 대신 비천한 사람들을 위로 높입니다. 또한 가난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반대로 늘 탐욕에 휘둘려 살았던 부자들은 빈 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권력과 재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닙니다. 지난날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과격한 체제전복을 가리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억누르는 현실적인 실체를 지적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막연한 관념이나 내세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삶의 정황 가운데 뿌리내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서슬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 종교 권력을 향해 주저없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셨습니다. 부자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재물의 덧없음을 거침없이 폭로하였습니다. 그 대신 갈릴리 빈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그들을 괴롭게 하는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래 주셨습니다. 항상 존중하며 내면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사회의 철저히 변방에 살아가는 밑바닥의 사람들에게도 따스한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여성 인권을 존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롯하여, 민족적으로도 멸시 당하던 이들에게도 배려를 잊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견고한 철옹성 같았던 돈과 권력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 사랑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마리아의 찬양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깊이 묵상해야할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 스스로 엄중히 되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가? 아니면 주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되길 바라는가? 돈과 힘을 맹목적으로 따르는가? 아니면 과감히 물러서고 있는가?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현실 체계를 폭력적으로 과격하게 뒤엎자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혹은 권력과 재물 모두를 불결한 것으로 여기고 금욕적으로 살라는 의미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는 그 모든 우상을 넘어서는 진정한 은혜와 평화의 세상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마리아처럼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마리아 또한 오늘 본문에서 큰 위안을 얻긴 했지만 금세 삶의 구체적인 시련 속에 많이 힘겨워 하였을 것입니다. 숱한 좌절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가운데 따뜻한 돈과 권력의 온기를 멀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무수한 타협책속에서 적당히 눈을 감고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오르고픈 유혹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복음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안에 참 소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본문 54~5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셨습니다.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살이하며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험난한 포로살이 하던 백성들을 다시금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 거대한 구원의 역사의 정점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온 우주 가운데 가장 높으시고 풍요로우신 주님께서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결단과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시어 이 세상 누구보다 진정 위대한 분이심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주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마땅히 마리아와 같은 신앙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싸늘한 이념이나 혼탁한 욕망이 아닌 사랑을 통해 뒤집혀진 전혀 다른 세상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 어떤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꿈꾸시는 나라, 누구도 차별하거나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위대한 다스림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충만히 돌보시고 긍휼가운데 삶의 여정을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38절 "위험한 은혜"

2022년 1월 3일, 월,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장 26~38절 "위험한 은혜"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은혜’, 이 단어는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따뜻하게 합니다. 기쁨을 안겨주고 희망으로 이끌어 줍니다. 따라서 은혜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은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경험과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 마리아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어느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향해,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지칭합니다. 그녀가 주님의 은혜를 입었음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에 의해 확고하고 분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마리아를 향해 평안과 임재가 선언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순간입니다. 특히나 이렇게 이른 새벽 잠을 깨우고 기도하러 모인 본질적인 목적은 다름아닌 주님의 은혜를 선명하게 깨닫기 위함입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궁극적인 열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뜻 밖의 태도로 반응합니다.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바로 ‘공포’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가 놀랐습니다. 상당히 점잖은 번역입니다. 하지만 원문의 어감은 매우 강합니다. 극심하고 격렬한 혼란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천사가 확인합니다. 그렇기에 30절에 이렇게 위로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그런 다음에 다시 한번,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천사는 지금 상황이 마리아에게 너무나 소중한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그녀에게 전할 말씀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은혜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31~33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제 마리아에게 일어날 일은 이러합니다. 바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뒤 이어 그 아기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름은 구원을 뜻하는 ‘예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윗의 통치를 이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기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진심으로 고백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 쓰임받는 당사자인 마리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시작이 몹시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약혼자가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덜컥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짐작하는 그 이상의 공포입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혼례를 치르지 않은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을 대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되었다고 과연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쉬웠겠습니까? 천사가 알려주기를 그 아이가 바로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말 할 때, 주위 사람들이 선뜻 믿을 수 있겠습니까? 비웃음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금세 목숨의 위협으로 이어집니다. 율법을 어기고 가문에 수치를 안긴 댓가로 당장 처형 위기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리아는 기꺼이 그 위험한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38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이해했습니다.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여종입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진리에 순종했습니다. 기꺼이 위험한 은혜를 감수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아직 처녀인 자신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결과 찾아올 고난은 분명합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분명 말 못할 서러움과 모진 수모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그녀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심을 천사를 통해 굳건히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35~37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는지 묻자 천사가 대답한 말입니다. 성령님이 그녀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강조법입니다. 같은 내용을 비슷한 단어로 다시 말하는 방법입니다. 이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마리아에게 함께하셔서 그녀를 감싸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마리아 주변에 일어난 놀라운 일을 소개합니다. 바로 친척 엘리사벳이 나이 들어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음에도 아들을 잉태한 사건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더 이상 이땅에 남아있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저주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죽었던 몸의 기능이 다시 살아나 명예를 되찾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겪는 그 어떤 시련과 고난도 넘어서게 하는 참 생명의 주이심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 진리에 진심으로 화답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탄의 통로로 쓰임받는 위대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생명으로 꽃 피운 것처럼 그녀가 겪었던 위험한 은혜가 찬란한 복으로 열매 맺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나 두렵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으십니까? 삶의 모든 소망을 잃은 채 쓰러져있지는 않으십니까? 꿈을 꾸고 희망을 품는 것을 사치스럽게 여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그 모든 눈물겨운 순간 또한 은혜임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리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사람이 감히 예측하고 다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때때로 위험하게 보입니다. 당황하고 불쾌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 있는 참 생명의 기대하고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그런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날개 아래 포근히 품어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