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일요일

누가복음 1장 39~56절 “다른 세상을 향한 노래”

2022년 1월 4일, 화,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장 39~56절 “다른 세상을 향한 노래”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어제 함께 읽은 본문에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메시아를 임신하게 될 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천사는 그녀에게 이 사실이 은혜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로서는 너무나 위험한 은혜였습니다.  

점점 불러올 그녀의 배를 보고 사람들이 싸늘한 눈길들 보낼 것이 분명했습니다. 더 나아가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녀에게 돈과 권력의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공포는 마리아의 비천함을 새삼 드러내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같은 상황이 예루살렘 궁궐에 살던 왕족이나 로마 총독의 딸에게 있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 나름의 어려움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대한 재물과 권세가 보호막이 되어 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리아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녀 앞에 어떤 시련이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리아를 천사가 위로하며 언급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친척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들어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잉태하였습니다. 그 아기는 마리아가 낳을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단지 친척으로, 혈육으로만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실에 마리아로서는 무척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토로할 대상이 마침, 평소 믿고 의지하던 친척 엘리사벳입니다. 그래서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곧바로 엘리사벳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 때 마리아가 후덕한 어른에게 기대한 것은 따뜻한 말 몇 마디와 포옹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마리아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뜻 밖의 놀라운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기뻐하며 움직였습니다. 

엘리사벳으로서는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마리아로부터 아무런 얘기를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행하실 일을 금세 깨달았습니다. 마리아와 그녀의 아기가 복이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 뛰놀았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5절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은 38절에 기록된, 천사에게 한 마리아의 대답을 인용합니다. 그때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이같은 마리아의 말을 엘리사벳은 직접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신앙 고백을 엘리사벳이 다시 언급하며 마리아가 참으로 복 받은 존재임을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마리아가 너무나 큰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극심한 두려움을 떨치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좌절을 딛고 일어나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찬양으로 녹여 불렀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극적인 순간에 마리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감정만 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펼치실 사역의 본질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미 오래전 한나가 어렵게 낳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한 내용을 명확히 이해 하였습니다. 여기에 담긴 주님의 통치가 자기 뱃속에 찾아올 아기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찬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핵심 주제는 ‘뒤집어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본문 52~5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세상살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단연코 권력과 돈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갖고자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살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제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풍족한 재물을 소유한다면 욕망을 마음껏 충족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내키는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이른바 기득권들은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기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움켜쥐려 합니다. 더 나아가 폭력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역사책 곳곳은 그렇게 흘린 피로 흥건하게 적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아래로 내리십니다. 대신 비천한 사람들을 위로 높입니다. 또한 가난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반대로 늘 탐욕에 휘둘려 살았던 부자들은 빈 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권력과 재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닙니다. 지난날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과격한 체제전복을 가리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억누르는 현실적인 실체를 지적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막연한 관념이나 내세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삶의 정황 가운데 뿌리내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서슬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 종교 권력을 향해 주저없이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셨습니다. 부자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재물의 덧없음을 거침없이 폭로하였습니다. 그 대신 갈릴리 빈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셨습니다. 그들을 괴롭게 하는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래 주셨습니다. 항상 존중하며 내면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사회의 철저히 변방에 살아가는 밑바닥의 사람들에게도 따스한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여성 인권을 존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롯하여, 민족적으로도 멸시 당하던 이들에게도 배려를 잊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견고한 철옹성 같았던 돈과 권력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 사랑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마리아의 찬양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깊이 묵상해야할 진리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 스스로 엄중히 되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가? 아니면 주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되길 바라는가? 돈과 힘을 맹목적으로 따르는가? 아니면 과감히 물러서고 있는가?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현실 체계를 폭력적으로 과격하게 뒤엎자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혹은 권력과 재물 모두를 불결한 것으로 여기고 금욕적으로 살라는 의미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는 그 모든 우상을 넘어서는 진정한 은혜와 평화의 세상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마리아처럼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마리아 또한 오늘 본문에서 큰 위안을 얻긴 했지만 금세 삶의 구체적인 시련 속에 많이 힘겨워 하였을 것입니다. 숱한 좌절을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가운데 따뜻한 돈과 권력의 온기를 멀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무수한 타협책속에서 적당히 눈을 감고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오르고픈 유혹에 시달릴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복음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안에 참 소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본문 54~5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셨습니다.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살이하며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험난한 포로살이 하던 백성들을 다시금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 거대한 구원의 역사의 정점에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온 우주 가운데 가장 높으시고 풍요로우신 주님께서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결단과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시어 이 세상 누구보다 진정 위대한 분이심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주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마땅히 마리아와 같은 신앙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싸늘한 이념이나 혼탁한 욕망이 아닌 사랑을 통해 뒤집혀진 전혀 다른 세상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 어떤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꿈꾸시는 나라, 누구도 차별하거나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위대한 다스림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충만히 돌보시고 긍휼가운데 삶의 여정을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