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일요일

누가복음 1장 57~66절 “그 이름, 요한”

2022년 1월 5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장 57~66절 “그 이름, 요한”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모든 생명을 소중합니다. 따라서 모든 출산은 당연히 축하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위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어 모은 출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이 그러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사장인 사가랴입니다. 모세 율법에 따라 제사장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렇기에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임신에 대한 더욱더 큰 부담을 안고 살았습니다. 단지 한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을 넘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낳고 기를 책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로마제국의 압제로 인해 크나큰 시련을 겪고 있는 유다 민족의 상황에서 그 부담감은 무척 압도적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두 부부의 상황에 대해 누가복음 1장 5~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이 중에서 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한 채 두 부부가 나이 들었음을 알려줍니다. 이 사실을  덤덤한 문체로 알려주지만 이 안에 담긴 내밀한 상황은 무척 처절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군가 겪고 있는 불행을 두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무시한 채, 뭔가 지은 죄가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아 그런 일을 겪은 거라며 잔인한 말을 내뱉는 살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어리석은 우월감을 느끼려는 무지 몽매한 행동입니다.

하물며 고대 사람들은 더욱더 그런 어리석음을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난임을 곧 신의 저주로 당연시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겪었던 어려움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만 두 부부가 얼마나 많이 아파하고 괴로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임신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것입니다. 때로 꿈을 꾼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려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 분향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주의 사자, 즉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 말씀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마침내 엘리사벳이 사가랴의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에는 하나의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을 ‘요한’으로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기도 제목이 이루어 질 거라고 천사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기뻐 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장면은 정반대입니다.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대행자인 천사이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눈부시게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사가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렇기에 되 물었습니다. 나와 내 아내가 이미 늙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너무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불신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아기가 태어나는 날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다시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내용입니다. 엘리사벳이 마침내 아기를 낳았습니다. 앞서 설명한 배경대로 이 사건은 흔히 볼 수 있는 출산 장면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나이 많은 여인의 잉태능력이 소생한 끝에 맺은 결실입니다. 

제사장의 소임을 감당할 또 다른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성전제도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임재가 선명하게 드러난 놀랍고도 복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척들이 주님의 크신 긍휼을 바라보며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고 팔일이 되어 율법에 따라 할례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유아세례 못지않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뜻깊은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때 아기 이름을 두고 실랑이가 펼쳐집니다. 

이름이 가진 엄청난 상징성 때문에 지금도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부모들에게 큰 고민 거리입니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명문대가 일수록 항렬을 따져 신중하게 짓기 마련입니다. 카스트 제도로 신분질서가 엄격한 인도의 경우 이름만 듣고도 어느 계급인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사가랴의 엘리사벳이 낳은 아기의 이름 또한 두 부부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기는 엄연히 제사장 가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친척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가랴’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은 엉뚱하게도 ‘요한’으로 이름짓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친척들은 뭘 모르는 엘리사벳이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제사장인 사가랴가 누가 들어도 제사장 같은 품격을 가진, 이미 친척들 중에 사용하는 이름으로 정해 줄거라 기대 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글씨를 쓸 수 있는 서판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역시 엘리사벳처럼 ‘요한’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천사를 통해 아기의 탄생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께 주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앞서 자신이 성전에서 보인 불신앙에 대한 반성이자 약속을 이루신 주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요한의 입이 다시 열리고 혀가 풀려서 10개월간의 언어 장애에서 벗어났습니다. 능숙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본문이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때 자기가 지난 번 성전에서 왜 한참동안 시간을 보냈는지, 어떻게 한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는지, 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게되었는지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천사를 통해 하신 주님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을 기꺼이 찬송 하였습니다.

그 때, 이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65~66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요한이 태어난 것 자체가 이루말 수 없는 복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서 울고 있는 아기 요한은 단순히 제사장의 후계자로서 정해진 뻔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이제 분명히 이루실 것이고 그 일을 알리는 존재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소식에 그들은 압도되었습니다. 한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이 온 유대 산골에 퍼졌습니다. 듣는 사람마다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제 펼쳐질 요한의 삶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 그대로 요한은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며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충실히 살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요한과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감격적인 순종과 믿음의 상징인 ‘요한’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셨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요한과 같은 특별한 탄생 과정을 거친것도 아니고 거창한 성장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금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와 요한이 뭐가 같다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전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알리는 점에서 우리 역시 같은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본문을 뒤집어 이해해야 합니다. 당장 겉보기에는 요한의 탄생 장면과 우리의 삶이 달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목 하시고 기대하십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비범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 하루도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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