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8일 월요일

[영화 리뷰]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2003)






* 스포일러 포함

'권선징악'은 역사 이래 가장 열광하는 주제다.

가장 보편적이지만 제일 배신 당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문학 혹은 영화에서 악인의 통쾌한 몰락을 기대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사람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그런 까닭에 엔딩 크레딧을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한다.

그 어떤 영화도 주지 못한 불쾌함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인정하게 된다.

감독의 용기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왜 거장인지를, 이 영화가 왜 그의 단연 대표작인지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이 환호를 자아내는 결말로 향하는 유혹을 거부한다.

대신 단호히 서늘한 현실을 비춰준다.

너무나 비참했고 끝내 비굴했던 데이브의 죽음을 보여준다.

몹시 악랄했고 끝까지 이기적인 지미의 미소를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이 걸작은 내게 호소한다.

데이브를 잊지 말아 달라고, 그가 겪은 비극을 기억해 달라고, 함께 아파해 달라고.

역사 속 수많은 데이브들이 떠오른다.

근래 내 마음을 수없이 소용돌이치게 하는 '선감 학원', '형제 복지원' 희생자들이 대표적이다.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길은 여전히 멀다. 이제 겨우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론 나 역시 지미 같은 악인이 되기도 한다.

다만, 계속, 함께 아파하길 다짐한다.

여전히 어둡고 어두운 비극을 이겨내고 있는 수많은 데이브들의 편에 서길 소망한다.

이렇듯 이 영화는 너무나 불쾌하고 아프기에 진정 걸작 반열에 올랐다.

영화 혹은 예술의 지평을 성큼 넓혔다.

오랫동안 먹먹한 마음으로 기억할 작품이다.

2022년 11월 9일 수요일

요한계시록 11장 18절; 21장 1절 “하늘과 땅을 새롭게”

2022년 11월 9일, 포항 YMCA-YWCA 국제친선주간 연합예배
요한계시록 11장 18절; 21장 1절 “하늘과 땅을 새롭게”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포항제일교회 정대진 목사입니다. 뜻 깊은 자리에 말씀 전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보고 조금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요한계시록은 많은 성도들에게 경계 대상입니다. 그동안 심각한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단들이 악용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본래 상황과 맥락을 무시한 문자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계시록에 기록된 종말 심판을 확고부동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연구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굉장히 유별나고 특이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당시 강력한 힘을 휘둘렀던 거대한 로마제국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황제가 아닌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위대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양하고 화려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1차적으로 로마가 곧 몰락할 것을 선언합니다. 즉, 계시록이 향하고 있는 심판의 최종목적지는 바로 ‘바벨론’으로 언급되는 로마 제국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종말 환상 이야기의 절정이 바로 일곱 번째 나팔입니다. 이제 세 번째 재앙이 시작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장면입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 성도들이 이 책을 낭독하는 것을 들을 때 침을 꼴깍 삼키며 몰입해 들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을 읽는 우리도 집중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요한은 바로 이 때, 독자들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을 거듭 들려줍니다. 바로 하늘 어전에 있던 24장로들이 부른 찬양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1장 17~18절입니다. 17절 제가 다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모든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또한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즉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찬양이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처음 기록되고 전해졌던 1세기 교회 상황에서는 절대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제국 반역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곧 주님이시라는 외침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습니다.

특히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제국을 이룬 황제를 주님으로 숭배했던 시대 상황 때문에 고난 받는 교인들조차 움추러 들었습니다. 심지어 신앙을 저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혼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주님입니다. 이 복음을 이 시간, 다시금 마음 깊이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내 삶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소망합니다.

따라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입니다. 18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마지막 문장들 한 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18절의 문장 구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신약 원문도 순서가 거의 비슷합니다. 먼저 전반부에 주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상을 노래합니다. 이 자체로 상과 심판이라는, 충분한 완결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접속사 ‘또’, 혹은 ‘그리고’가 굳이 등장합니다. 심판 받을 무리에서 특정 사람들을 떼어서 분명히 언급합니다. 게다가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 시킨다는 언어 기교를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어 원문도 같은 어근의 단어를 두 번 변형해 사용했습니다. 이토록 요한계시록이 엄중하게 심판을 경고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관련해서 요한계시록이 “땅”에 대해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헬라어로 땅을 <게>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가 마태복음 27회, 마가복음 9회, 누가복음 16회, 요한복음 4회, 사도행전에서 18회 나옵니다. 모두 합하면 74번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땅이라는 말이 몇 번 언급될까요? 무려 82번입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한 것보다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칠게 정리하자면, 요한계시록에서 땅은 단순하게 자연 중 일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태질서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한 땅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심판의 가장 처참한 피해자가 됩니다. 관련해서 계시록 16장 1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자세히 읽지는 않겠지만 요한계시록 16장은 일곱 대접 심판을 묘사합니다. 그 대부분은 환경 파괴와 연결됩니다. 더 이상 생태 질서가 유지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감탄한 창조세계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세상은 도무지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 못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땅에 일곱 대접이 쏟아진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요? 자연이 심판 대상일까요? 역사가 끝날 때 환경이 어쩔 수 없이 파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계시록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 운명론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죄는 인간이 지었습니다. 땅을 포함한 자연 질서는 인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판에 희생 당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24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멸망이 있습니다.”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직접 해당되는 사람들은 분명합니다. 바로 로마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몰락을 우선 겨냥합니다. 특히나 17장에 기록된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여러 묘사들은 단연코 그 시대 일반적으로 이해했던 로마에 대한 상징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가 영원하듯이 주님의 심판 경고도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여전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오늘날의 로마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분간해야 합니다. 현재 급속도로 진행되는 기후 위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적극 대처해야 합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너무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당신을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잘못을 찾아내고 벌주기 위해 눈에 불을 켜지 않으십니다. 드넓은 은혜 가운데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역사의 마지막에 반드시 완성하실 줄 믿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의 공의 또한 분명히 세우십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것을 절대로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무너져 가는 생태질서를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분노하고 심판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역사 종말이 하나님의 진노로 끝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완성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사도 요한은 역사의 마지막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물질적인 개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새 사람이 됩니다. 이 때, 그 전의 몸은 완전히 사라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형체는 그대로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의 전 존재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질서가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마치 잘못 구운 도자기를 가지고 도예가가 그러하듯이 마음에 안 든다고 깨서 버리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새로움의 근원이신 주님 품 안에서 하늘과 땅을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신의 뜻 가운데 우리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태계를 지켜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심판을 두려워 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 이루고자 하시는 가장 간절한 소망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 경고를 듣고 뉘우치고 돌이켜 당신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키길 바라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 이 곳에서, 바로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이런 다짐 가운데 무력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너무나 연약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환경 보호를 위한 여러 실천을 결심하지만 금세 좌절하곤 합니다. 개개인의 작은 걸음이 대체 거대한 기후 위기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회의감에 사로잡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분명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듭 명심해야할 복음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께서 극복하지 못할 절망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거듭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온갖 종류의 불의와 폭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끝내 이루실, 주님의 참 생명이 우리를 통해 온 세상에 가득히 흘러넘칠 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담대히 걸음을 내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주님께서 선하신 뜻 가운데 지은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인간의 탐욕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급속한 기후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땅을 망하게 한 어리석은 죄악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끝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주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창조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생태 질서를 다시금 아름답게 만들도록 헌신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참사가 있었습니다. 무려 156명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갑자기 잃은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부상 당한 149명이 속히 치유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건을 목격하고 후유증을 겪는 이들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포항 YMCA와 YWCA가 지금껏 그러하였듯이 앞으로도 더욱도 주님의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시는 이들 가운데 한 없는 은혜와 평화를 덧 입혀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자료
안용성 [두 이야기가 만나다](새물결플러스)
구기정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요한계시록의 땅 이야기"(신약연구 제 12권 1호)

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창세기 40장 1~8절 "해석은 하나님께"

2022년 10월 26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40장 1~8절 "해석은 하나님께"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삶은 난해합니다.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는 이집트의 두 관원장이 등장합니다. 각각 파라오의 술과 떡을 맡았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이 둘은 말단 실무자가 아닙니다. 핵심 관료입니다. 술과 떡이 상징하는 바를 총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파라오가 마실 술을 미리 맛보는 일을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술은 단순한 알콜음료가 아닙니다. 당시 국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두 행사는 제사와 연회입니다. 그 자리에서 술은 중심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술 맡은 관원은 왕의 측근으로서 국가제의를 주관한 사람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파라오가 먹을 음식을 미리 맛보는 일을 합니다. 해당 원문을 ‘어전 탁자에서 근무하는 서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흔히 오해하듯 평범한 요리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파라오는 단순한 황제가 아닙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숭배 대상으로 신격화 된 존재입니다. 그런 파라오의 식사를 관리한다는 것은 술 맡은 관원장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핵심 측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지금까지 거대한 제국의 풍요를 누려왔습니다. 황제의 후광을 등지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둘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입에 발린 말을 했습니다. 온 집안이 값비싼 선물로 가득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두 관원장은 금세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아찔하도록 가파른 추락을 경험합니다. 본문 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이들의 상황을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범죄’와 ‘분노’와 ‘투옥’입니다. 두 사람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범죄’하였습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그들에게 ‘분노’했습니다. 그 결과 ‘투옥’, 즉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왕에게 정확히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감옥에 갇힐 만한 흉악한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서고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절대군주의 사법 판단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이익과 감정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벌주고 잡아 가두는 경우를 수 없이 발견합니다.


어쩌면 두 관원장은 정적들에 의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지는 않더라도 과거에는 무사히 넘어갔던 일들이 갑자기 문제가 되어 벌을 받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엄연히 상상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인생은 난해하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임금과 내가 이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자랑하며 떵떵 거리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보냈던 찬란한 일상과 감옥에서 지내는 음습한 하루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이처럼 무거운 현실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수 없이 많은 물음표에 둘러싸였을 것입니다. 대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헤쳐나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소유했던 지식과 부귀영화가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깊은 어둠 속에서 짙은 한 숨만 내쉴 뿐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복잡다단함은 꿈에서도 이어집니다. 어느날 두 사람이 같은 날 꿈을 꾸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현대인들 보다 훨씬 더 꿈에 대해 막중하게 의미부여를 했습니다. 당연히 자고 일어나 서로 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의 꿈이 서로 정반대였습니다. 더욱더 혼란스럽습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길몽과 흉몽의 경계가 아리송합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에 들어서도 인생의 난해함을 절감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사기꾼의 궤변 속에서만 명쾌합니다. 누구나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과거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무나 막막한 앞날에 대한 염려로 근심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복잡한 실타래 같은 번민에 둘러싸여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인생의 암흑을 만난 두 관원장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당신의 종을 붙여주셨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마침 그들이 투옥된 곳은 친위대장, 즉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그곳에 요셉이 먼저 갇혀 있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옛 동료 두 사람을 수종들게 했습니다. 고위 관료출신 범죄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날 요셉은 자신이 모신 두 어른의 얼굴 색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당돌합니다. 예로부터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은 힘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비록 지금 함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과 요셉은 배경과 지위가 전혀 다릅니다. 그들 눈에 요셉은 엄연히 외국인 노예 출신의 어린 범죄자입니다. 호의라 할지라도 자기들 낯빛을 두고 질문하는게 불쑥 언짢을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인생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치 앞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요셉에게라도 뭔가 도움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움터 올랐습니다. 본문은 그들 사이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두 관원장이 눈물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대인들인 꿈에 대해 굉장한 의미 부여를 했습니다. 꿈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 도무지 알 수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단순히 간밤에 꾸었던 꿈의 해몽 문제가 아닙니다. 꿈이 상징하는, 삶의 처절한 난제를 부여잡고 내뱉는 호소입니다. 두 사람은 싸늘한 의문의 늪에서 평생 헤어나오기 힘든 모든 인류를 대표해 절규하며 묻고 있습니다.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그 두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반드시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가다오는 참혹한 삶의 모든 시련과 절망에 대한 해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인류의 가장 커다란 모순을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더없이 찬란한 해답을 온 우주에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납득하기 힘든 아픔에 허덕일 때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처절한 죽음을 통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 만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어둠을 물리치는 진정한 능력임을 믿습니다. 무덤을 비우시고 다시 사신 참 생명 만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번민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원한 소망임을 믿습니다.


삶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 주님께 오늘 하루도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39장 11~23절 "밑바닥에서도 여전히 함께"

2022년 10월 25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39장 11~23절 "밑바닥에서도 여전히 함께"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어제 읽은 창세기 39장 1~10절은 요셉이 지닌 위대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리는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집트의 화려한 제국 종교에 둘러 싸였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성공을 통해 상당한 권력과 재물을 손에 쥐었습니다. 자칫 방탕해지기 쉬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세웠습니다.


이런 요셉의 신앙은 유혹 가운데 빛납니다.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그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답합니다. 그의 고결한 신앙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습니다.


보디발 아내는 탐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요셉이 보인 뜻 밖의 반응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지 모릅니다. 어느날 작정하고 계획을 꾸몄습니다. 하인들을 모두 집에서 내보내고 요셉을 기다렸습니다. 일하러 들어온 그의 옷을 붙잡고 또 다시 동침을 제안합니다. 


이 때 요셉은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죄를 지을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녀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지 않습니다. 욕망으로 불타오른 사람과는 더 이상 대화와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요셉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의복은 사막 지역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 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 손에 자기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요셉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하인들을 집 안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진실과 정 반대로, 요셉이 자기에게 동침을 요구했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소리질렀더니 그가 도망갔다고 음해 해습니다. 보디발이 집으로 돌아오자 같은 모함을 반복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과연 보디발 아내의 말을 하인들과 보디발이 있는 그대로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며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노회한 군인이자 정치가인 보디발이 노예 요셉을 신임 하고 가정 총무로 세웠습니다. 그동안 요셉이 얼마나 성실하고 진실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요셉에 대한 평가는 다른 하인들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주인 마님의 명령에 따라 집 밖으로 나갔을 때, 이 후 벌어질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대담한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적 방종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무척 높습니다. 


심지어 보디발 조차 자기 아내의 행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정황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을 살려둔 것입니다. 아내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요셉은 얼마든지 즉결처분 대상입니다. 고대 사법체계에서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자체로 보디발의 상당한 선의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보디발로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나름 호의를 입은게 사실입니다. 어쨌든 목숨은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입니다. 형들에게서 살해 위협에 받은 후 낯설고 먼 땅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부족함 없이 자라온 요셉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고통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좀 살만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런 죄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랜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교정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보내는 삶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처참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바닥을 경험했습니다.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닥에서 더 밑으로 내려가는 상황을 감옥에서 맞이했습니다. 누구라도 쉽게 살아갈 의욕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놀라운 반전을 거듭 맞이합니다. 본문 21~2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은 앞서 보디발의 집에서 경험한 상황을 감옥에서도 다시 겪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했습니다. 자기 집 운영 대부분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마찬가지로 간수장이 요셉을 신임합니다. 감옥 행정 전반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와 동행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긍휼로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어떤 절망도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인생의 그 어떤 밑바닥 속에도 주님께서 늘 풍성한 사랑으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부활의 빛은 더욱더 찬란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부활의 생명은 더욱더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과 같은 인생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늘 명심해야할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겪는 절망과 고통을 딛고 이루시는 주님의 참된 형통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관련해서 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입니다.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의 마지막 연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훈계하지 말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아픔 자체를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부러 아플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자기 학대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며 도무지 피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올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주님의 넓은 품 안에서 분명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내밷는 신음을 절대로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주님의 광대한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을 통해 주님께서 온 세상에 들려주실 청아한 종소리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 가운데 요셉처럼 하나님의 참된 형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창세기 39장 1~10절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2022년 10월 2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39장 1~10절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신학대학원 필수과목 중에 “선교학 개론” 수업이 있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선교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해외 선교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 물으셨습니다. 다양한 답이 남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건강 관리나 안정적인 재정 후원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본인 경험을 이야기 하시면서 한 가지를 언급하셨습니다. 바로 ‘자기 예배’입니다.


선교사로서 외국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익명성’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교회가 없는 곳도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사람들이 주위에 없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스스로 정한 시간에 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무릅쓰고 자기 예배를 성실히 드린 선교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됩니다. 반대로 자기 예배가 무너지면 선교사로서 자질과 영성도 함께 붕괴됩니다.


굳이 선교사를 예를 들지 않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홀로 멀리 출장을 갔을 때 예배 드리는 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러 핑계를 대며 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한 타지 혹은 해외에 보낸 자녀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는 부모님들도 흔히 보게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요셉이 보여주는 신앙은 거의 기적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수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 안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라는 탄탄한 조직이 있고 성경이라는 위대한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과 비교하면 요셉 당시 야훼 신앙은 이제 겨우 4대째 내려온 가족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와 전통은 고사하고 종교로서 그럴듯한 외형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부모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삭,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유목민들의 전통에 따라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사그라들것처럼 보이는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형들의 음모로 이집트에 팔려왔습니다. 그 형들도 똑같이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들 역시 아버지 야곱과 함께 주님께 제사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을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즉, 같은 야훼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다가 포기하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후안무치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상황 자체가 요셉으로서는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환경입니다. 나를 이토록 위험에 몰아넣는 원수같은 형들이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기란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채색옷을 빼앗기고 웅덩이 안에 있었을 때, 제발 나를 구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이 원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쩌면 하염없는 원망이 솟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집트에 도착했습니다. 이집트는 한마디로 화려한 신들의 제국입니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토대는 휘황찬란한 종교였습니다. 누구라도 압도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아무런 의지할 데 없이 노예로 끌려온 젊은 요셉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집트 신들 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마음까지 뺏기기 마련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곳에서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기 마련입니다. 보디발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눈부신 제국 핵심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눈에 들었습니다. ‘가정 총무’라는 파격적인 승진을 했습니다. 본문 6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신분만 노예일 뿐입니다. 보디발의 철저한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집트의 어지간한 귀족 못지 않은 부귀영화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 때 요셉이라면 쉽게 안주할 것 같습니다. 때때로 형들에 대한 복수심은 타오르겠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인생입니다. 딱히 남부러울 게 없습니다. 얼마든지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있습니다. 집안의 다른 종들은 물론이고 보디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이집트 귀족들도 요셉의 눈치를 보고 마음에 들려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나 내면이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하나님은 이제 안중에 없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풍요에 눈이 멀기 쉽습니다. 쓰디쓴 과거를 지워버리기 위해서라도 주님은 잊고 마음 내키는대로 살기 쉬운 환경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놀랍게도 이 모든 위기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기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요셉의 신앙이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보디발 아내의 유혹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본문 6절 후반부에서 요셉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그의 빼어나고 아름다운 용모가 보디발의 아내를 사로잡았습니다. 여러번 그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혈기왕성한 청년 요셉으로서 참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주인에 대한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셉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는 주님을 향한 놀랍도록 순수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앞서 길게 설명드린대로 지금 요셉의 삶은 하나님을 지워버리기 쉬운 환경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기를 버리셨다고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깊이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를 놓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 요셉이 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법으로 그가 처한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 빛과 희망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요셉은 그 사랑에 반응 했습니다. 안겼습니다. 주님과 신실하게 동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런 요셉의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하려는 온갖 시련과 유혹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때마다 우리와 언제나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고 죄를 물리치며 은혜의 길을 걷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