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7일 화요일

10년 전, 구약학 석사과정 입학


벌써 10년 전이다.

솔직히 입학하고 무척 후회했다.
참 많이 힘들고 버거웠다.
그 때문에 졸업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내 인생에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다.
무엇보다 내 무지함을 처절하게 절감했다.
존경하는 스승을 만났다.
덕분에 성경의 드넓은 대양과 울창한 산맥을 마주했다.
슬슬 히브리어 문법책과 전공서를 다시 꺼내 봐야겠다.

슬램덩크와 나(출판 초고를 끝내고)


나는 농구가 싫었다.
가뜩이나 비참했던 시절이었다.
병약했던 나를 더 초라하게 했다.
때문인지 모른다.
또래들과 달리 슬램덩크에 흥미가 없었다.
서른이 돼서야 봤다.
극장판이 화제를 모을 때도 관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혹하게 했다.
"많이 울었다."고 했다.
지난 주일, 오랜 글 감옥에서 벗어났다.
울고 싶었다.
그날, 밤길을 걸어 영화관으로 향했다.
울지는 않았다.
대신, 충분히 위로받았다.
주인공 송태섭에게 자연스럽게 몰입했다.
그는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농구공으로 이겨냈다.
나에겐 책이 도피처였다.
남들보다 많이 읽은 건 아니었다.
좋은 책을 잘 가려 읽은 것도 아니었다.
'게걸스럽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그냥 책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잘한다고 칭찬받는 게 글쓰기였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막연히 작가가 되길 꿈꾸었다.
시간이 흘러 목사가 되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걸로 대신 만족했다.
그러다 작년에 뜻하지 않은 출간 제안을 받았다.
성경 속 여러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책이었다.
여름부터 반년 넘게 원고를 썼다.
하필 복잡한 상황으로 몸도 마음도 무척 지쳤던 시간이었다.
소책자 분량이지만 버거웠다.
휴가 기간은 물론 월요일도 거의 매주 집필에 매달렸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덕분에 많은 걸 이겨낼 수 있었다.
드디어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송태섭은 마침내 신체 한계를 극복하고 산왕공고의 존 프레스를 뚫었다.
어린 시절부터, 슬픔을 이겨내려 몰두했던 드리블 연습 덕분이다.
극적인 역전승을 끌어낸 결정적인 장면이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식으로 계약한 집필을 힘겹게 끝낸 내 심정 같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무명인에게 기회를 준 출판사에 손해가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저, 제법 긴 시간이 차곡히 쌓여 책 한 권을 낸 사실이 내겐 여러 의미로 먹먹하게 다가온다.
이젠 농구가 싫지 않다.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다.
물론 농구 코트 위를 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젠가 아들과 함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함께 보며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아마도 그때, 눈물이 흐를것 같다.


 

2023년 1월 4일 수요일

야고보서 2장 14~26절 “능히 구원하는 믿음”

2023년 1월 4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야고보서 2장 14~26절 “능히 구원하는 믿음”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의 핵심을 담은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를 제기합니다. 지금 우리는 시간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지녔던 순진무구한 의문을 아직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고민이 더해가며 배움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상당한 답을 알게 됩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명제입니다. 이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천년에 걸친 다양한 논의와 연구 심지어 목숨 걸고 전쟁까지 하며 치열하게 벌인 토론의 결실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구원 사이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두꺼운 세월의 퇴적층이 쌓였습니다. 그 위에 피어난 꽃향기를 맡고,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편지를 썼던 1세기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거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섬기며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생애를 목격했거나 전해 들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위대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믿고 깨달은 바를 명확하게 정리하는 건 어려웠습니다. 저마다 익숙한 문화와 가치관 아래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주장이 교회 한쪽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믿음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그 목소리에 차츰 여러 사람들이 귀 기울였습니다. 어느샌가 그 의견이 상당한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거센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극심한 긴장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의 살벌한 분위기를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주장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 역시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무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야고보가 몹시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에 대한 심각한 왜곡입니다. 병들고 뒤틀리고 그을린 믿음입니다. 유익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그 예를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 15~16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한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어딘가에 누군가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국가의 복지 정책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진 곳에, 지극히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당하며 암담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장 그 모두에게 따뜻하고 풍요로운 도움을 완전하게 베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 말 못 한 채,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해할 뿐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라고 말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영혼이 심각하게 병든 증거입니다. 고통에 휩싸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악행입니다. 따라서 그 누군가를 향해 야고보는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살아있는 믿음일까요? 야고보는 누구나 기꺼이 존경할 위대한 인물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흥미롭게도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 읽어드리겠습니다.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러한 바울의 주장을 과연 야고보가 얼마나 접했고 이해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식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야고보는 바울과 정반대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대신 바울이 쓴 편지로 말미암아 혹시나 교회 안에 생길 오해를 우려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지닌 신앙의 더 깊고 다채로운 면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본문 21~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위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언급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나이 백 살에 어렵게 얻은 아들입니다. 주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바칠 짐승을 토막내고 불태우는 제사입니다. 차마 아비가 자식에게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도무지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아들을 불사를 장작을 챙겨 모리아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 떨리는 두 손으로 날카로운 칼끝을 자식을 향해 겨누고 내리치는 것. 도저히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이 사건의 의미는 너무나 복잡하고 깊습니다. 단순하게 해석하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아브라함의 그 순종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을 능히 구원하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은 입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매끈한 말이 누군가의 믿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비장한 논리로 가득한 궤변이 참된 믿음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본문 26절에서 거듭,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다면 무엇이 참으로 살아 있는 믿음일까요? 어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까요?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몸소 본을 보인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내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이 좌절을 딛고 일어나게 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이 나를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결단하게 하고 있습니까?

혹시 그 반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힘을 과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기려고 이를 앙다물고 있지 않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현재 주어진 위치와 힘에 안주하며,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건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거짓 믿음에 자기를 숨기고 나를 속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믿음을 바르게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닌, 자기를 능히 구원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꾸고 지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13절 “최고의 법, 이웃 사랑”

2023년 1월 3일, 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야고보서 2장 1~13절 “최고의 법, 이웃 사랑”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본문 말씀은 가장 평범한 대상에게 제일 익숙한 주제를 제시하며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자기 편지를 받는 이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내 형제들아”. 얼핏 사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야고보와 따뜻한 교분을 나누는 신앙공동체가 이 편지의 수신자임을 다시금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 형제들에게 야고보는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곧 예수님을 우리 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도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정체성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다음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철저한 경건 생활을 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고상한 몸가짐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불쑥 익숙하지만 불편한 진리를 툭 던집니다. 바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입고 전하는 우리 역시 지극히 마땅히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할 때, 드높고 거친 장벽과 마주하게 됩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차별이 교회 안에서조차 만연하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당시 신앙 공동체 안에 있었던 차별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본문 2~4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장면이 마치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습니다. 이 상황에 담긴 씁쓸한 공기를 직관적으로 느끼실 겁니다.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도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현실을 쉽게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야고보가 분개하며 토로한 행태가 여전히 우리에게도 익숙한 까닭입니다.

제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님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목사님이 대학 시절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채소를 팔던 어느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곳을 오갈 때마다 그 할머니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꼭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가까운 교회에 가보시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침내 할머님은 이렇게 속내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보게 청년, 교회는 나 같은 사람 싫어해. 나처럼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을 별로 환영하지 않아. 헌금도 잘하고 많이 배워서 교양있는 사람을 더 좋아해”

그 목사님은 펄쩍 뛰며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겪고 꽤 시간이 지나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때 그 어르신 생각을 조금씩 수긍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 말이 전부 다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그 정도까지 엉망은 아닙니다. 교회를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거북해집니다. 분명 과장이지만, 애써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죄악으로 일그러진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지위와 재산 때문에 차별을 겪었거나 혹은 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 가운데 더욱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 8~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문제가 복잡할수록 본질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때는 아직 신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기준에서 구약이 당시에는 성경 전체였습니다. 야고보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네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입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주님께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명쾌하게 답합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때,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며 가져온 본문이 레위기 19장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시려고 아무 구절이나 끌어온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레위기 19장은 단연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은 ‘거룩함’이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십계명을 확장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상 속에 실천해야 할 다양한 율법을 기록합니다.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핵심이 바로 18절입니다. 여기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랑의 범위가 34절에 급격히 확대됩니다. 바로 가나안에 함께 사는 이방 민족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까지 언급하시며 가나안 땅에 함께 사는 이방인들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방인들은 이스라엘로서는 쉽게 사랑하기 힘든 대상입니다. 상당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교회가 힘써 지키고 이루어야 할 사랑, 성도가 자신의 온 삶을 다해 이루어 가야 할 사랑은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감상적인 감정도 아닙니다. 치열하고 숭고한 소명입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소 행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철저히 무력한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찬란한 영광의 주님께서 죄인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함께 살던 이방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뛰어넘는 눈부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이루면 모든 걸 다 이룹니다. 사랑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습니다. 한 사람이 지닌 신앙의 깊이는 그의 삶에서 풍기는 사랑의 향기, 그리고 사랑을 행하기 위한 성실로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참된 사랑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고 노력하는 지 여부로 드러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원초적인 복음을 무시할 때 성도의 인격과 삶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순수함과 본질이 어그러지게 됩니다.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오늘 하루도 마음 깊이 묵상하며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을 온 몸과 마음 다해 지켜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27절 "흠 없는 경건"

2023년 1월 2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야고보서 1장 12~27절 "흠 없는 경건"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은 여정입니다. 신앙은 한순간 결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 이후로 저마다의 경건을 올바로 가다듬기 위한 과정을 이어갑니다. 모든 성도가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이렇듯 진리는 총천연색입니다. 단 한 가지 색으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같은 목적지라도 사람마다 좋아하는 길은 다릅니다. 어떤 누군가는 거칠더라도 빠른 길을 선호 합니다. 다른 누군가는 좀 멀리 돌아가더라도 평탄한 길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채롭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다양합니다. 다름을 충분히 존중해야 합니다. 함부로 누군가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도 무려 네 권이나 되는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서들은 각자 개성을 지닙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예수님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다른 걸 넘어 틀리는 것입니다. 모든 걸 다 포용할 수는 없습니다. 명백히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다양성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표적으로 잘못된 신앙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행위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근거가 선한 행위라고 믿는 생각입니다. 

물론 착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문제는 착한 행실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매우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선행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나름의 착한 일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선행’을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한겨울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광장에 커다란 온도계를 설치하는 것을 간혹 보셨을 것입니다. 목표한 후원금을 정하고 그 수치에 따라 온도계 조형물 눈금을 빨갛게 표시하곤 합니다. 만약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 그러한 온도계 눈금이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인간은 그 누구도 그 모든 목표를 완성할만한 도덕성을 갖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는 그 어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굉장한 추앙을 받다가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 손가락질 받은 사람들을 금세 떠올릴 수 있으실 겁니다.

이렇듯 착한 행실만을 경건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헛된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리하게 몰아붙이게 됩니다. 지나치고 위축되거나 교만하게 합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다그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오류에 대한 반발로 또 다른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잘못된 신앙을 발견합니다. 바로 행위는 무시하고 믿음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인간은 높은 도덕성으로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거짓입니다. 동시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천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이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철저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무력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을 지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감정이 아닙니다. 어떤 의지나 신념도 아닙니다. 마치 어른이 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 아이가 손을 내밀 듯이 구원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절대로 우리의 공적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잘 믿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맹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은 자기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다치게 합니다. 가슴 아프게도 주변에서 쉽게 보셨을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사라집니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보내는 일상은 무너집니다. 지나치게 교회에만 매달리곤 합니다. 정확하게는 종교 생활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점점 공허해집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은 사라지고 허무한 열정만 남게 됩니다.

이렇듯 두 가지, 대표적으로 그릇된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둘은 양쪽 끝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행위에 집착합니다. 다른 하나는 과도하게 믿음에만 매달립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 땅에 시작된 이후 계속 이어온 갈등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올바른 신앙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편지들이 오갔습니다. 그 편지 중 일부가 신약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야고보서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신앙의 여정을 온전히 걷기 위한, 바른 경건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본문 27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제멋대로 오해하는 경건, 세상의 거짓에 뒤틀린 경건이 아닌, 주님께서 참으로 바라시고 원하는 경건입니다. 그것은 둘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고아와 과부로 대표하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실천입니다. 내 곁에서 피눈물 흘리는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위선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기꺼이 나누고 섬기고 보듬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수평적인 경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나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믿음을 온전히 지킬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은혜에 안겨 자신을 돌아볼 때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가 그러하듯이 수평과 수직이 아름답게 교차합니다. 착한 일을 통해 업적을 쌓고 인정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삶을 돌아보지 않고 믿음만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되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서는 됩니다. 특히나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과 마주하며 내면을 돌아보고 신앙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경건을 주님께서 분명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의 여정 가운데 신실하게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를 소망하며 오늘도 성숙과 성장을 경험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