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5일 화요일

황동수, 이상호 <석탄사회>(서울: 동아시아, 2022) 서평


작년 겨울, 제가 몸담은 교회 안수집사님으로부터 본인이 공저하신 이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분주한 시간을 지나 이제야 단행본을 읽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지난 주일과 월요일 이틀에 걸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예의와 의무감을 펼쳤지만, 점점 몰입해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저처럼 과학과 공학에 무지한 사람들도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체로 차근하게 논지를 전개합니다.
이를 통해 산업과 환경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고찰할 시야를 틔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뜻 밖에도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철'은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한 물질입니다.
철을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막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철 1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서 무려 1,000킬로그램의 숯이 필요했습니다. 숯 1,000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1제곱킬로미터(약 30만 평)가 넘는 산림이 필요했습니다(참고로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의 총면적이 약20만평입니다.)." 21~22쪽.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철 생산을 둘러싼 갈등과 긴장을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석탄의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오늘날 석탄은 대기오염을 일으키는, 석유에 밀려 한물간 연료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석탄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산림 파괴를 막는, 당시로서는 '친환경적인' 물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석탄이 산업혁명 시기에 활용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 이전에 일어났던 산림 파괴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쪽.

결정적으로 역사 속 석탄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많은 과학자와 사회학자들은 급격한 사회변화에 대한 시발점을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증기기관'이 아니라 '석탄'이라고 주장합니다." 38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석탄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기후 위기 문제를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저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기존 산업 질서를 과격하게 흔들며 '소재'로서 석탄의 기여를 무조건 무시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합니다.

"탄소중립이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쉽지 않더라도 나라의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탄소중립을 이끌어 내는 방안을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중략) '에너지원'으로서의 석탄은 점차적으로 사라져야 하겠지만, '소재'로서의 석탄은 우리나라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자원으로 활용되는 귀중한 물질이므로 이 '소재'를 어떻게 환경친화적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65쪽.

환경운동의 목적이 지구 자원의 '지속 가능성'이라면, 그러한 환경운동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현실적인 우려와 대안을 제시하는 점이 여러모로 흥미로웠습니다.

즉, 지나치게 이상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태양열 발전을 비롯해 소위 '친환경'을 표방한 기술의 위험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산업체계와 공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생태 질서를 회복하는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기술로 태양광 1메가와트 발전설비 건설에 필요한 대지 면적은 1만 5,617제곱미터이며, 이를 약 44만대의 필요량을 고려해서 수식으로 계산해 보면 우리나라 면적의 약 7퍼센트를 활용해야만, 현재 우리가 쓰는 전력을 모두 태양광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략) 하지만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인 우리나라의 형편상 국토 면적의 7퍼센트는 전혀 작은 면적이 아닙니다." 158~59쪽.

"현재 미래 신기술로 화두가 되는 것은 '수소환원제철'입니다.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탄소 소모가 일어니지 않는 철강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지요. 하지만 수소환원제철만을 통해서 철강을 생산할 경우, 이 철강을 우리가 지금까지 활용했던 철강 규격으로 제조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정책적으로 기술 개발에 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정책은 '탄소제로'가 아니라 '탄소중립'입니다." 175쪽.

"왜 인류가 나무와 석탄으로 제철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왜 인류가 원유를 열망하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해석을 동반하지 않은 채 단순히 제거 대상으로서 화석연료를 바라본다면 또다시 같은 결론을 반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190쪽.

평소 낯설고 무지한 영역이기에 더욱더 집중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해당 분야에 대한 저자들의 전문성과 관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를 통해 '과학적 태도'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이 가장 유익한 배움이었습니다. '환경 보전'을을 비롯해, 내가 꿈꾸고 지향하는 바가 숭고할수록 현실 문제를 과학과 정확한 수치로 진단하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따라서 관련 공부를 틈틈이 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실천의 방향을 점검하게 하는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사서오경을 읽고.

 


마침내 사서오경을 다 읽었다.
사실 겉핥기다.
대부분 이기동 선생님의 번역에 의지했다.
예기와 춘추의 경우 축약본으로 읽었다.
거대한 유교 사상에 살짝 발만 적신 셈이다.
그럼에도 그 찰랑거리는 물결이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5년 전이다.
직전에 섬기던 교회가 분란에 휩싸였다.
흡사 전쟁 같았던 시기였다.
도덕경과 장자를 전자책으로 조금씩 읽어갔다.
왠지 모를 끌림이 있었다.
짤막하게 읽기 편하다는 이점도 있었다.

마침 대학 때 사둔 논어와 맹자가 있었다.
논어에 이어 맹자를 읽으며 가슴 벅차게 감격하였다.
자연스레 사서오경 독서를 다짐했다.
몇 년이 흘러 오늘, 드디어 그 결심을 이루었다.

분명 겉핥기다.
매일 꾸준히 읽은 것도 아니었다.
해설을 충실히 살펴보며 의미를 완벽히 파악하지도 못했다.
드문드문 조금씩 읽은 결과다.
그럼에도 이 안에 담긴 깊은 지혜와 통찰을 발견했다.
그 덕분에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음을 새삼 깨닫는다.
평생, '인의예지'를 두루 익히며 '군자'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앞으로도 틈틈이 동양고전을 계속 읽고 싶다.
여유가 생기면 한자 공부도 집중해서 하고 싶다.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미처 시작하지 못한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2023년 4월 11일 화요일

마태복음 26장 36~50절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

2023년 4월 5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6장 36~50절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이상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게 됩니다. 모순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단지 힘 있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구하고 받아내는 거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사귐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을 지닌 참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참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아픔과 고통을 느끼십니다. 연약함과 한계를 절감하십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 주님께서 굳게 지켜온 삶의 언어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과 두터운 교제를 이어 나가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읽는 마태복음 안에 ‘주기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 이 세상 가장 위대한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사복음서 곳곳에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끊임없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든 기도를 좀 더 잘 이해하도록 여러 비유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대하시는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이 세상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결정적 순간을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는 가슴 절절한 말을 남기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앞장서 나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이 호언장담이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말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곧 당신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아셨습니다. 마음 깊이 고통과 번민이 차올랐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자락에 있는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따로 물러나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께서 데려가신 세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에서 특별히 그 세 명의 제자와 더욱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산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께서 해 같이 밝게 빛나셨습니다. 게다가 그 곁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황홀한 장면입니다. 그 변화산 위를 주님께서는 제자들 전체를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특별한 신뢰와 애정이 드러납니다. 세 제자 역시 분명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릅니다. 스승에게 총애를 받는 다면 그 기대를 따를 책임이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주님께 직접, 수없이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본문 3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 12명 중에서 굳이, 평소에도 많은 은혜를 베풀었던 세 명을 따로 데려오셨습니다.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바로 당신과 함께 깨어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함께 하는 기도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바람을 철저히 무너뜨립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돌아오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한 번 깨운 후 다시 기도하고 돌아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눈이 몹시 피곤해 보였습니다. 이제는 깨우지도 않으시고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본문 내용이 오해를 주는 게 사실입니다. ‘피곤’이라는, 지극 자연스러운 신체 한계를 무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무작정 열심히 하는 고행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철저히 오해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 사람이신 주님께서는 사람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조건 오래 기도하라고 닦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그 날, 주님은 왜 제자들을 다그치셨을까요? 그 이유를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내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주기도의 시작인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를 축약한 호칭입니다. 그리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매듭지었습니다. 이 역시 주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연결됩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당신이 몸소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그 인격을 신뢰하셨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의 원대로 하시길 기도하기 전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고통, 그 거친 절망 앞에 예수님은 초연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하셨습니다. 그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당신을 통해 실행되길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기도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참된 기도는 섣불리 정답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도 당연하고 뻔한 소리만 늘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감출 게 없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며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다만, 그 모두를 끌어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도를 통해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그 믿음 가운데, 비록 당장 내게 아픔과 시련이 찾아올지라도 주님의 뜻이 마침내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신 까닭은 단지 피곤해 곯아떨어져서가 아닙니다. 졸아도 괜찮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면 기도하다가도 얼마든지 잘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예 기도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나누시며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의기양양해 엉뚱한 소리를 하며 어리석은 탐욕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을 고백한다면, 도무지 값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다면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제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털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연약하지,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얼마나 의심에 가득한 지를 주님께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안으실 줄 믿습니다. 그 가운데 저마다를 향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부디 오늘 하루 그 뜻을 깨닫고 이루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6~35절 “떡과 잔을 가지사”

2023년 4월 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6장 26~35절 “떡과 잔을 가지사”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들, 그리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 복음서가 내내 반복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간 동고동락했습니다. 하지만 스승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계속 헛발질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끝까지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많은 비유와 이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음험한 거래를 마쳤습니다. 본문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님은 유다가 저지른 배신을 언급합니다. 운명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돌려 말할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가장 중요한 목적을 명확하고 생생히 제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식사는 예수님 사역의 핵심입니다. 식탁은 가장 거룩한 성전이자 위대한 교실입니다. 단지 허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습관처럼 음식물을 뱃속에 욱여넣는 자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식사 중에 놀라운 순간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식사 때,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주목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쑥 손에 떡을 가졌습니다. 잠시 적막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떡을 치켜들었습니다. 축복하셨습니다. 두 손으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그런 다음, 포도주잔을 들어 올렸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자리에 모인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스승께서 대체 무얼 말씀하시려는 건지, 당장 그 순간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곧 죽임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처참한 죽음입니다. 누르스름한 빵과 붉은 포도주의 색깔, 은은하게 코 끝으로 다가오는 향기. 떡이 북 찢어 질 때와 포도주가 또르르 잔으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 아직 남아 있는 온기를 머금은 떡의 촉감. 슴슴한 무교병과 시큼한 포도주의 맛과 식감.

짧은 시간 제자들이 느낀 다양한 감각이 주님의 피와 살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죽음이 순식간에 입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보다 명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절절한 바람이 담깁니다. ‘내가 이렇게 죽을 거야! 이제 곧 어둡고 두려운 시간이 찾아올거야!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복음을 명심해!’ 주님의 애끓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이후 제자들의 반응을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곧바로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이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향했다고 알려줍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거북한 진실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3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끝내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은 앞서 유월절 만찬에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하게 죽임당할지를 떡과 잔을 통해 생생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못지않은 또 다른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배신입니다. 아무도 주님 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 무서워 떨며 도망갑니다. 이제 곧 일어날 일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자신감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3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 말 자체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말이 비장하고 거창할수록 더욱 공허합니다. 잠시 후 벌어질 상황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보낸 커다란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이 호언장담은 마치 거대한 폐건물처럼, 감람산 위에 흉물로 남았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 하시는지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떡과 잔을 들고 생생하게 당신의 죽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심지어 감람산에 올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대놓고 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왜 스승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계속 말귀를 못 알아 들었을까요?

소음 때문입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쿵쾅대며 울려 퍼지는 소리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 괴성을 탐욕이 더욱 공명시켰습니다.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탓에, 예수님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진실로 하시려는 말씀 대신, 그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주워 담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도 일그러진 시선으로 주님을 왜곡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참한 도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쓰라리고 아픈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절망을 넘어서는 위대한 희망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한 뒤에 곧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버림받으셨습니다. 아무도 주님 곁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분명 죽었지만 결코 죽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처음 만나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입니다. 그 이후, 그들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덮고 새롭게 내딛는 걸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참 소망이 있음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그 어떤 절망보다 큽니다. 주님의 사랑이 사람의 그 어떤 허물보다 위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과 탐욕과 배신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당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장 극적으로 깨우침을 얻고 변화하리라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인내하며 그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순간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언젠가 생생히 살아있는 말씀으로 마음을 뒤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은 넘어지고 실패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성령님께서 그들을 변화시켜 신실한 제자로 세우실 것을 알았습니다. 성찬을 통해 경험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한 때 도망자였으나, 목숨을 걸고 순교하며 진리를 외치고 교회를 지킨 신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생명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 목, 금 저녁 집회가 있습니다. 특별히 목요일에는 성찬 예배를 드립니다. 이 거룩한 시간을 형식적으로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전한 복음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내 신념과 의지와 지식과 경험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어야 다시 사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앞에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찬으로 생생하게 알려주신 복음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겸손히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시어 갈릴리로 먼저 가신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죽음과 어둠에서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그 주님과 함께 오늘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2023년 4월 9일 일요일

마태복음 26장 6~16절 “분노를 넘어 헌신으로”

2023년 4월 3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6장 6~16절 “분노를 넘어 헌신으로”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충격과 분노’,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는 두 단어입니다. 주님을 향해 많은 사람이 보였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겪은 반응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열기와 인기만 얻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향해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게 항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긴장이 흘렀습니다.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주위에 충격과 분노가 넘실거렸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다분히 의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듣기 편한 뻔한 소리를 하시려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좋게 좋게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무난하고 원만하게 자기 역할만 하려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황제로 대표되는 당시 제국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절대진리로 믿었던 생각을 뒤흔드셨습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 당연하지 않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모두가 본질로 여기던 것들이 실상 비본질에 지나지 않음을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의 삶과 가르침은 어떤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분노하는 일이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처참한 결과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직접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한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동쪽에 있는 마을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거기에 ‘나병환자 시몬’으로 불리는 사람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가 현재 나병환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을에 함께 살지 못하고 따로 격리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전에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가 지금은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나병환자’는 그의 실제 상태가 아닌 ‘별명’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는 본문의 배경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둔 급박한 시기에 그의 집에서 머물며 식사를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살아오신 삶의 태도와 방향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욱더 따뜻한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많은 이들이 반응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식사 자리에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납니다. 그녀의 손에는 향유 한 옥합이 들려 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향신료는 무척 귀했습니다. 주로 인도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멉니다. 따라서 작은 양도 무척 비쌉니다. 향유는 그런 향신료를 모아서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진귀한 물건입니다.

아마도 그녀가 향유를 들고 시몬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의 발자국 소리보다 향기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그윽한 향내가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조금씩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도무지 예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순간, 적막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그녀가 그 값진 항유를 예수님께 바치리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 덕분에 자기들이 좀 더 여유롭게 누리길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나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주님의 머릿카락에 향유를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본문 8~9절 다시 한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지금 자기 눈에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7번만 나옵니다. 격렬한 분노를 가리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재빨리 표면적인 명분을 댑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들을 돕지 않고 낭비했다고 그녀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비장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과하게 이상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솔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향유는 자연스럽게 욕망의 대상입니다. 제자들의 이익과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치 자기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듯 행동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탐욕을 드러납니다. 그런 까닭에 황급히 자기를 감추기 위해 격정적으로 화를 내며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차분히 돌아봐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화를 내는 대상이 과연 그녀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불만도 담겨 있습니다.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스승을 향한 원망입니다. 점잖고 고상해야 할 랍비로서 지킬 체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답답했습니다.

앞서 설교를 시작하며 충격과 분노는 예수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두 단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둘러싼 많은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그 놀라움은 예수님은 향해 화를 내는 반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진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날카로운 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움켜쥔 거짓과 탐욕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충격과 분노를 드러낸 사람들은 대적자들 만이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로마 관리들만이 아닙니다. 복음과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동고동락한 제자들도 주님의 언행에 충격을 받고 화를 냈습니다. 사실 당연합니다. 그들 또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결핍과 한계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솔직히, 예수님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화가 납니다. 억지로 안 그런척 할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10~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화가 났던 그 상황, 어느 여인이 자기 머리에 항유를 부은 사건은 대충 덮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그녀가 귀한 물건을 허비하고 낭비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의 편에 섭니다. ‘좋은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모든 존엄한 죽음에는 적절한 장례가 필요합니다. 당시 장례 풍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 여인들이 항유를 들고 무덤으로 간 이유입니다.

그날, 베다니 시몬의 집에 찾아온 여인이 과연 어디까지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충동으로 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그녀의 행동을 통해 십자가로 향하는 주님의 뜻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죽음에 담긴 놀라운 복음의 향기를 온전하게 풍겨 주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축복을 선언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가 행한 일을 기억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어리석은 충격과 분노가 아닌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나치게 많은 헌금 혹은 과도한 봉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소유와 시간을 주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