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9일 일요일

마태복음 26장 6~16절 “분노를 넘어 헌신으로”

2023년 4월 3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6장 6~16절 “분노를 넘어 헌신으로”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충격과 분노’,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는 두 단어입니다. 주님을 향해 많은 사람이 보였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겪은 반응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열기와 인기만 얻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향해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게 항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긴장이 흘렀습니다.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주위에 충격과 분노가 넘실거렸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주님께서 다분히 의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듣기 편한 뻔한 소리를 하시려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좋게 좋게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무난하고 원만하게 자기 역할만 하려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황제로 대표되는 당시 제국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절대진리로 믿었던 생각을 뒤흔드셨습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 당연하지 않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모두가 본질로 여기던 것들이 실상 비본질에 지나지 않음을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의 삶과 가르침은 어떤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분노하는 일이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처참한 결과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직접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한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동쪽에 있는 마을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거기에 ‘나병환자 시몬’으로 불리는 사람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가 현재 나병환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을에 함께 살지 못하고 따로 격리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전에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가 지금은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나병환자’는 그의 실제 상태가 아닌 ‘별명’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는 본문의 배경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이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둔 급박한 시기에 그의 집에서 머물며 식사를 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살아오신 삶의 태도와 방향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욱더 따뜻한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많은 이들이 반응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식사 자리에 한 여인이 불쑥 나타납니다. 그녀의 손에는 향유 한 옥합이 들려 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향신료는 무척 귀했습니다. 주로 인도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멉니다. 따라서 작은 양도 무척 비쌉니다. 향유는 그런 향신료를 모아서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진귀한 물건입니다.

아마도 그녀가 향유를 들고 시몬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의 발자국 소리보다 향기가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그윽한 향내가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조금씩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도무지 예상하기 힘들었습니다. 순간, 적막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그녀가 그 값진 항유를 예수님께 바치리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 덕분에 자기들이 좀 더 여유롭게 누리길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나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주님의 머릿카락에 향유를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본문 8~9절 다시 한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지금 자기 눈에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7번만 나옵니다. 격렬한 분노를 가리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재빨리 표면적인 명분을 댑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들을 돕지 않고 낭비했다고 그녀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비장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과하게 이상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솔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향유는 자연스럽게 욕망의 대상입니다. 제자들의 이익과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치 자기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듯 행동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탐욕을 드러납니다. 그런 까닭에 황급히 자기를 감추기 위해 격정적으로 화를 내며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차분히 돌아봐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화를 내는 대상이 과연 그녀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불만도 담겨 있습니다.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스승을 향한 원망입니다. 점잖고 고상해야 할 랍비로서 지킬 체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답답했습니다.

앞서 설교를 시작하며 충격과 분노는 예수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두 단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둘러싼 많은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그 놀라움은 예수님은 향해 화를 내는 반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진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날카로운 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움켜쥔 거짓과 탐욕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충격과 분노를 드러낸 사람들은 대적자들 만이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로마 관리들만이 아닙니다. 복음과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동고동락한 제자들도 주님의 언행에 충격을 받고 화를 냈습니다. 사실 당연합니다. 그들 또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욕망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결핍과 한계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솔직히, 예수님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화가 납니다. 억지로 안 그런척 할 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10~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화가 났던 그 상황, 어느 여인이 자기 머리에 항유를 부은 사건은 대충 덮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그녀가 귀한 물건을 허비하고 낭비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의 편에 섭니다. ‘좋은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모든 존엄한 죽음에는 적절한 장례가 필요합니다. 당시 장례 풍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후 여인들이 항유를 들고 무덤으로 간 이유입니다.

그날, 베다니 시몬의 집에 찾아온 여인이 과연 어디까지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충동으로 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그녀의 행동을 통해 십자가로 향하는 주님의 뜻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죽음에 담긴 놀라운 복음의 향기를 온전하게 풍겨 주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축복을 선언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가 행한 일을 기억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어리석은 충격과 분노가 아닌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나치게 많은 헌금 혹은 과도한 봉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소유와 시간을 주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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