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창세기 16장 6~16절 “살피시는 하나님”

2023년 9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6장 6~16절 “살피시는 하나님”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한 여인이 도망칩니다. 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내 달릴 수는 없습니다. 몸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홀몸이 아닙니다. 생명이 몸 안에 자라 배가 불러옵니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앙다물고 황급히 걸음을 옮겨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임신부 도망자’, 이렇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처지는 한 인간이 경험하는 극한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쩌다 이러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본문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브라함의 책임 회피입니다.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한 아내 사래, 그리고 임신한 여종 하갈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방치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내가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가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로 옮긴 히브리어는 <아나>입니다.

이 단어가 출애굽기에도 매우 중요한 순간에 등장합니다. 바로 이집트 사람들이 히브리 노예들에게 고된 중노동을 강요하며 괴롭힐 때입니다. 이를 통해 하갈이 겪었던 고통의 무게와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절망입니다. 그녀는 마침내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다 하갈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을 지납니다. 물이 부족한 서아시아 지역에서 여행자들은 자연스럽게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하갈에게도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뜻밖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입니다. 달리 말하면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샘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지켜보는 눈’이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당히 오묘하고 역설적인 상황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쳐 숨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디에도 주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당황스럽고 두렵지만,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위로를 안겨주는 진리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며 누구나 저마다의 사래를 만납니다.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힘 있는 자에게 학대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나와 전혀 무관한 존재 같습니다. 나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우주 어딘가에 숨어 계신 것만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각기 살고자 도망쳐 달아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꾸짖고 다그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살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8~9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몰라서 물어보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아시지만, 질문과 대답을 통해 당사자에게 명확히 확인시키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하갈이 경험하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하갈이 원해서 아브라함의 아기를 가진 게 아닙니다. 힘없는 여종의 뜻과 무관하게, 나이 든 주인 어르신과 마님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우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그 전에는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사라가 어느 순간 우스워 보였습니다. 자기와는 전혀 다른, 여주인의 늙은 몸이 만만해 보였습니다. 겁 없이 사래를 깔보았습니다. 그 댓가는 혹독했습니다. 겁에 질린 채, 아기를 밴 몸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고대 사회에서는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는, 죽음과 절망입니다.

천사는 하갈과 대화를 나누며 이 사실을 그녀에게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셔야 할까요? 그녀를 힘들게 했던 상황에서 한순간에 벗어나 안락한 길을 열어줄 것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자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전합니다. 9절 후반부를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하나님은 하갈의 탈출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시간 그녀를 괴롭게 했던 사람과 장소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 합니다. 굉장히 잔인합니다. 하갈이 겪었던 학대에 눈을 감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무심하고 냉정한 명령처럼 들립니다.

게다가 지금 하갈과 천사가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술 광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이집트 고대 문서에 따르면 이 동네에 시내 반도와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국경 수비대 담장이 있었습니다. 즉, 술 광야는 그 지역 자체가 거대한 국경선입니다. 이곳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집트 영토입니다. 아마도 그녀의 목적지였을 고향입니다. 친숙하고 풍요로운 제국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북쪽으로 돌아가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갈은 지금 그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이 말씀이 하갈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너무나 듣기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또다른 학대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그녀의 손 아래에서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서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는 극적인 해방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또다시 고통스런 현실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핏 이 장면만 보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냉정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10~11절 제가 읽겠습니다.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분명 고통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갈은 나중에 다시 한번 더 쫓겨났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아들 이스마엘도 함께 버려집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고난을 뚫고 다가오는 찬란한 은혜와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통에 응답하시며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녀 뱃 속에 있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도 크게 번성 할 거라는 약속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자녀가 주는 상징성은 지금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단지 사랑스런 가족, 혹은 대를 잇는 자손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녀는 곧 신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자녀가 태어났고 그들 또한 많은 자손을 낳아 퍼뜨린다는 것은 조상의 인격과 생명이 이 땅에 마땅히 이어질 만하다는 걸, 그들이 믿는 신이 확증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그 누군가의 존재 가치가 없다는 저주로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경 인물들이 자녀가 없음을 두고 매우 심각하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갈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한다는 것은 보통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다. 비록 당장은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대를 경험한 별 볼 일 없는 여종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습니다. 그녀 또한 아브라함 못지 않게 의미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갈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말을 거는 여성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이 여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진귀한 장면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왕족이나 귀족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육도 아닙니다. 이방인 여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이 알려주는 복음의 위대함을 알려줍니다.

흔히 구약 성경을 유대인만의 복음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1세기 교회,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품은 원대합니다. 협소하고 어리석은 기준으로 함부로 사람들을 나누고 판단하고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넉넉히 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갈은 위대한 고백을 남깁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과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까닭에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고대 서아시아 사회에서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십계명 3계명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갈은 용기있게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지금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그녀가 부른 주님의 이름이 너무나 적절하기에 성경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그 누구에게도 말못한 설움과 슬픔을 주님께서 들여다보고 함께 아파하심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 하나님이 당장 고통에서 우리를 꺼내 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힘겨운 현실로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모든 발걸음에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심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과 더불어 더욱 승리하는 오늘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살피시는 하나님.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달아난 하갈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저희의 모든 아픔을 들으시고 힘겨운 눈물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을 사모합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려한 신기루에서 벗어나 은혜가 피어오르는 광야를 향해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함께 지시고 부활하시어 하늘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9월 16일 토요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민음사) 간단 서평

소설이 읽고 싶었다.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사임하고 임지를 옮길 때가 좋은 기회였다.

일부러 중편을 골랐다.
하지만 여전히 여유는 없었다.
이사 준비로 바빴다.
중간 정도 읽고 부임했다.
부임 후에도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다.

이 책 자체가 읽기 난해하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이름의 많은 인물들이 어지럽게 등장했다.
사건을 단락으로 나누지 않고 한 호흡으로 잇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시 책을 펼치고 끝내 다 읽게 하는 굳건한 힘을 느꼈다.
척박한 환경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사람다움을 꿋꿋하게 지키는 것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그중에서도 잠깐 등장하는 어느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아래).
나 역시 그처럼 품격을 지닌 '꼿꼿함'을 지키고 싶다.
치열한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려 분투하는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위대한 소설이다.

덧.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간략한 인물 소개를 확인하고 읽기를 권한다.

"슈호프는 오늘 처음으로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용소 내의 죄수들이 모두 새우등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반면에, 이 노인은 유독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니, 의자에 뭘 기대고 앉은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다. 

머리카락은 이미 모두 빠져서 이발할 필요도 없어진 지 오래다. 수용소에서 하도 잘 먹은 탓에 머리가 모두 빠진 모양이다. 그는 식당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듯, 슈호프 머리 너머 어느 곳인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끝이 다 닳은 나무 수저로 건더기도 없는 국물을 단정한 모습으로 먹는다. 다른 죄수들처럼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이는 아래위로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딱딱한 빵을 먹고 있다.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딘가 당당한 빛이 있다.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무스름하다. 쩍쩍 갈라진 거무스름한 손은 그가 걸어온 수십 년의 감옥살이를 통해, 한 번도 가벼운 노동이나 사무직 같은 것을 얻어 일한 적이 없이, 생고생만 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타협도 하려 들지 않는다. 300그램의 빵만 하더라도, 다른 죄수들처럼 더러운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지 않고, 깨끗한 천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내려놓는다."

2023년 8월 27일 일요일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2023년 8월 23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겁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이새가 그랬습니다. 게다가 전쟁 중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염려에 빠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복무 중인 아들들을 먹이고, 그들 지휘관을 대접할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는 그가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서쪽으로 약 23km 정도에 위치합니다. 우리 교회를 기준으로 하면, 직선거리로 광화문까지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기에는 꽤 멉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사이에는 메마르고 거친 산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강도를 비롯한 여러 위험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이새가 도무지 직접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자기 대신 누구를 보낼까요? 종을 보내거나 아니면 건장한 아들에게 심부름 시키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막내 다윗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은 몇 살이었을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2~14절에 보면, 그에게는 형 일곱이 있었고 그 중 3명이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따라서 넷째 형부터는 입영 대상 기준이 아닙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당시 다윗은 갓 어린아이티를 벗은 10대 초중반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이새는 이미 다 큰 아들들은 지극정성으로 배려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리고 힘없는 막내에게는 정반대로 막 대합니다. 그의 여린 어깨 위에 육중한 짐을 들려 힘겹고도 고된 여정을 혼자 보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전쟁터에서 매우 비참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감히 하나님의 군대를 날마다 모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에서 누구 하나 당당히 맞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그 모습에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골리앗과 대결을 자원합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잔악무도한 사울 왕이더라도 뽀얀 살결의 소년이 저 괴물 같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걸 차마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이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 들려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 시절, 어린 다윗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양 떼를 이끌고 다녔던 유다 광야는 푸른 풀이 아름답게 우거진 한가로운 목장이 아닙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는 험악한 사자나 곰이 빈번하게 출몰하였습니다. 맹수들이 양뿐만 아니라 다윗의 목숨까지도 해치러 달려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광야입니다. 

이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라면 아무리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렵다 한들, 어린 아들에게 돈 벌어오라며 음산한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내보낼 수 있으십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오늘날 인권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유년 시절을 묘사하는 성경의 태도는 일관됩니다. 바로 부모로부터 당한 철저한 배제와 소외입니다. 그는 자라가며 마땅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무엘이 집에 찾아왔음에도 형들과는 달리 초대받지 못한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다윗은 아름다운 신앙을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 깊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신하들은 탁월한 수금 연주자 한 명을 곁에 두어서 그 음악 소리를 통해 고통을 이겨내시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의견을 받아들인 사울의 허락 아래 찾은 적임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수금 연주자로 인정받았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그의 수금 실력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려줄까요? 당연히 그 악기를 날마다 부단히 연습했음을 의미합니다.

음악가들이 흔히 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 안 하면 스승이 알고, 삼일 연습 안 하면 관객이 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왕 앞에 수금을 들고 설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그 악기를 항상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의 신하들이 단순히 능숙한 연주자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악령이 떠나갈 정도로 성령 충만한, 영의 찬양을 들려줄 사람을 구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어릴 때부터 날마다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예배자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다윗을 가리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본래 순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손에 쥔 후 차츰 하나님과 멀어지고 심지어는 대적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대신에 다른 왕을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누군가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왕은 현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울이 아니라 나중에 새로 즉위할 다른 왕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보았다.”가 아니라 “볼 것이다.”라는, 미래 의미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경우 히브리어 문법상 보통 ‘미완료 동사’로 적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반대로 과거 혹은 현재 사건을 뜻하는 ‘완료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미래 사건을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완료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켜 ‘예언적 완료형’(perfectum propheticum)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드러내는 구약 성경 특유의 표현법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신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분명히 다윗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는 왕이 되기는커녕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그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유다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저 멀리 들리는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수한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움켜 쥐며 잠잠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황량한 광야 한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이 선언은 하나님의 위대한 감탄이자 의지입니다. 사람들 눈에 다윗은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초라한 아이였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눈에는 이미 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날, 마치 어린 다윗과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진 않으셨습니까? 그 시절, 힘겹게 거닐었던 여러분의 유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혹시 그 아픔이 여전히 내면 깊숙한 어두운 곳을 찌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건 간에, 다른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멸시를 당하든 간에 상관없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일구어 나갈 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한 위대한 뜻과 계획을 예언적 완료형으로 선언하십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항상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본문은 다윗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눈길을 묘사합니다. 이 안에 담긴 위대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묵상의 걸음을 더욱더 멀리 내디뎌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순간의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정’이라는 진리입니다.

다윗을 향한 주님의 찬란한 계획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위대한 예언자이며 제사장이자 사사인 사무엘이 직접 그의 머리 위에 기름 부었습니다. 심지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감격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많은 백성의 환호와 지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를 왕으로 눈여겨보시고 부르신 하나님 말씀이 금세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가 지금 당장 권력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순탄하게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참 동안 먼 길을 돌아, 무려 약 10년간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임금이 되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혹독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를 실현하며 메시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것과 온 이스라엘 가운데 군사로 모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린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시대 권력자의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라는 사실입니다. 왕이 눈에 띄는 여인을 마음대로 곁에 두는 사례는 역사책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인이 유린당하는 끔찍한 성범죄가 일어났습니다. 밧세바가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또한 나라의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군 통수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엄중히 금지하신 까닭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현실을 핑계로 하나님보다 창과 칼과 병거를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두 가지 죄에 분노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도망자 시절은 물론이고 왕관을 머리 위에 얹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왕으로서 ‘과정’에 있음을 잊어버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샌가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왕으로 ‘완성’ 되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 결과, 주변 다른 나라 왕들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극명하게 나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반복하신 경고를 끝까지 거부한 채 자신이 이미 왕이 다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어떻게든 왕권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탐욕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이 아직 왕이 아닌, ‘왕이 되어가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아무런 자격 없던, 초라한 목동을 이 자리로 부르시고 이끄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과 다시 마주했습니다. 그리하여 순박한 소년의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그러한 다윗의 말년을 기록합니다. 1~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몹시 늙어서 이불을 덮어도 냉기를 느낄 정도로 기력이 많이 쇠하였습니다. 신하들은 고민에 빠져 여러 차례 논의 끝에 묘수를 찾았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예쁜 처녀, 아비삭을 구해다가 다윗이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왕으로서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밧세바와 달리 유부녀도 아니었습니다. 율법 기준에도 비난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결코 아비삭과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다윗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가 아직 왕이 아니라 평생 주님 앞에서 왕이 되어가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내면 깊이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비참하게 희생당한 우리야와 능욕을 겪은 밧세바의 고통을 마음에서 지우지 않았습니다.

늙은 왕의 품에 어린 소녀를 안기려는 계획은 중년 남성 정치가들 입장에서는 탁월한 판단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 따라 진행할 과정과 결과는 여전히 참담합니다. ‘미모’는 철저히 주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예쁜 처녀’라는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고관대작의 여식으로 결정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비삭은 지방 권력자에게 저항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윗은 이기적인 편의에 취해 그런 내밀한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버거운 공포와 수치심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허물이 아니더라도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아비삭의 몸에 욕망 어린 손길을 뻗는 대신, 자신이 오래전 앞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을 그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기 삶을 마무리 했습니다. 초라한 소년 목동을 왕으로 세우신 놀라운 사랑의 시선에 일평생 응답하며 살아갔습니다.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부득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설교 초안은 제가 대학 시절에 했던 묵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때 저는 목회자가 되길 꿈꾸며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무척 많은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수 없이 절망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저를 향해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몹시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츰 목사로 불리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은 말씀과 지금까지 저를 신실하게 이끄신 주님의 손길을 통해 절절히 고백합니다. 저는 일평생 그저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이지 결코 그 어떤 순간도 ‘목사로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제 목사가 다 되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어지며 변질된다는 진실 또한 엄중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 일평생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3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그러므로 너무 교만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지나치게 스스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신실하신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모든 여정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눈길을 신뢰하며 주어진 일상을 다윗처럼 날마다 희망차게 일구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따스한 사랑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기도
자녀들의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 옛날, 거친 광야에서 외로이 눈물을 삼키는 어린 다윗을 향해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저마다 지니는 힘겨움과 아픔 또한 누구보다 잘 아시고 위로하시며 새로운 삶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의 부르심은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이르는 과정임을 고백합니다. 은총의 긴장과 균형을 지켜가며 좌절과 교만을 넘어 참된 구원의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다윗과 같이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욱더 섬김과 나눔을 이어가게 하옵소서.
참 생명의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어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8월 18일 금요일

포항-일산 이사를 마치고.



나에겐 고향이 없다.
굳이 따지면 '대전'이다.
성장기 대부분을 거기서 보냈다.
하지만 좋은 기억이 거의 없다.
짙은 소묘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첫 번째 그림부터 그랬다.
좁은 용달 트럭의 진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모님은 경남 섬마을에서 나고 자라 부산에서 사셨다.
낯선 대전에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이사하셨다.
단칸방의 어두운 공기가 다섯 살 아이 마음에 목탄화처럼 새겨졌다.
지워내고 덧칠하는 데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이사를 마쳤다.
어제(17일) 오전 포항에서 이삿짐을 포장하고 일산으로 향했다.
아쉬움에 일부러 장사 해변을 들린 뒤 꽤 먼 거리를 달렸다.
6살 아들 기억에 오래오래 생생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 나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사하게 된 이유와 준비하는 과정 모두가 그저 감사하다.
교회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쾌적한 사택으로 원활하게 잘 이사했다.
가는 길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세 가족이 싼타페를 타고 오붓하고 편하게 이동했다.

물론 알고 있다.
아들이 느끼는 건 전혀 다르다.
포항에서 차가 출발할 때, 가는 길 중간중간 인하는 "이사 가기 싫어!"라고 소리 질렀다.
어쨌든 그 아이에게는 이별과 새로운 환경이 슬프고 두려울 것이다.
어른의 눈높이로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곳에서 펼쳐질 삶이 인하에게는 화사한 빛깔의 수채화 같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내가 아들에게 푸른 물감 같은 아빠이길 소망한다.
부디 인하에게는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

2023년 8월 7일 월요일

포항제일교회 사임

 

대학 시절부터 '서울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위한 나름의 섬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심 따라, 안수받은 이후 줄곧 영남권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볼수록 제가 오만했다는 걸 깨닫습니다. 오히려 서울을 벗어났기에 누리는 게 훨씬 더 많았습니다. 너무나 좋은, 많은 성도님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 접했습니다. 소중한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특별히 포항에서는 개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지도력을 발휘하시는 박영호 담임목사님 곁에서 많은 것을 성찰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평소 안 쓰던 근육을 키우고, 둔했던 감각을 깨우며 목회자로서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어 무척 감사했습니다.
아쉽게도 지난 3년 7개월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포항제일교회를 떠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따라 일산 승리교회 교구 목사로 부임합니다. 다음 주일(13일)에 인사를 먼저 드리고 돌아와 17일에 이사할 예정입니다. 새롭게 열어갈 여정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