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일 목요일

목회 철학

 



1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2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 시 131편, 새번역

마침내, 내 목회 철학을 가장 잘 담은 성구를 찾았다.
크고 놀라운 일에 몰두하며 동분서주하는, 오만한 어른이 될까 봐 너무나 무섭다.
그 대신, '젖뗀 아이 같은 고요함과 평온'을 평생 지켜가고 싶다.
목사로서 가장 간절한 바람이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정은찬 "바울, 마케도니아에 가다"(IVP, 2023) 서평

 


저자는 저의 대학 동기입니다.
2002년 장신대 신학과에 함께 입학했습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모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주관성'으로 오히려 더 기분 좋게 책을 읽고 서평을 남깁니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연구한 친구의 훌륭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의 역할은 문자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입니다.
본문 너머의 생생한 이야기와 마주하게 합니다.

이를 위해 학자들을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저자는 신약성경 시대 사회사를 바탕으로 바울과 그의 편지를 입체적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의 '일기 형식'이라는 신선한 시도로 독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탄탄한 연구를 바탕으로한 합리적인 상상력과 정갈한 문장력이 여기서 눈부시게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선교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치열한 상황과 감정을 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는 중요한 순간을 시작으로, 첫 번째 바울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의 맥락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그런 까닭에 각 일기 마지막에 인용한 성경 구절을 대할 때 그전과 다른 깊은 감흥을 느낍니다.

이뿐만 아니라 각 장을 마무리하며 중요한 신학 주제를 설명하며 책의 균형을 갖추고 깊이감을 더했습니다.
저자의 진솔한 자기 고백과 반성도 인상적입니다.
그 결과 얇고 쉽지만 신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친절한 안내를 제시합니다.

오랜 친구의 첫 번째 신학 저서를 무척 즐겁고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학자로서 앞으로 이루어 갈 업적들을 더욱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썼다. 논문을 쓴 것이 아니다. 실제 존재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바울의 목회와 선교는 그의 편지를 지지하는 큰 기둥이다. 편지에는 사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다. 바울의 편지들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 서신에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과 교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실제 삶, 문제, 고민, 갈등 앞에서 편지를 써 내려갔다." 10쪽.

"그런 저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실패자의 삶으로 보이겠지요. 또 누군가에게는 평화를 깨는 사람,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건 후로 저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습니다. (중략) 앞으로 여러분에게도 벌어질지 모르고요.
꽤 오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을 깨고 세군도가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러자 아쎄니온도 따라 고백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다함께 손을 잡고,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하고 고백했다. 149쪽.


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창세기 17장 1~8절 “전능하신 하나님”

2023년 10월 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7장 1~8절 “전능하신 하나님”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1)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무력합니다. 섬뜩한 포탄 소리에 놀라 울고 있는 우크라이나 어린이에게,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리비아 수재민에게, 오랜 기근으로 굶주린 배를 힘없이 어루만지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력합니다.

먼 나라의 거대한 재앙만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 오래 기도했지만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은 응답으로 절망해 본 적 있으실 겁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무리 간청해도 병이 낫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애초에 믿고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차라리 더 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를 믿고 섬기기에, 신앙과 현실 사이 무한한 거리와 무게가 나를 짓누릅니다. 주님을 향한 깊은 실망과 배신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바로 앞 절인 창세기 16장 1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세기 16장은 하갈이 고난 끝에 이스마엘을 낳은 사실을 알려주며 끝을 맺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절인 본문 1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단 한 절 만에 무려 13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86세였던 아브라함은 어느새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나이는 75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굉장히 보기 드문, 상당히 나이 많은 노인입니다. 그가 겪은 치명적인 비극이 있습니다. 바로 자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가정이 난임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도 대를 이을 자손을 낳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대 서아시아에서 아들의 의미는 그 이상 훨씬 더 막중합니다. 이미 지난 주 금요일 새벽에 설명 드렸지만 한 번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세계에서 자녀는 단순한 혈육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가치가 곧 신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들과 손자와 많은 후손이 생긴다는 것은 조상의 생명이 영원히 이땅에 이어질 만하다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아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위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명확한 저주로 이해했습니다. 그의 숨결이 더 이상 세상에 이어질 가치가 없다는 징벌로 여겼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랜 옛날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보낸 75년의 세월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이 차올랐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 우르의 우상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에게 가슴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장 원초적으로 기대한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들 하나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거대한 능력에 비하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24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 승리와 영광의 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마음 속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에 대해서는 주님은 분명 무력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낸 75년과 다른 결의 처연한 슬픔이 하나님을 알고 지낸 24년 동안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차올랐습니다. 그것이 99세 노인 아브라함의 상황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주님께 상당히 도발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로 비웃음입니다. 창세기 이야기 흐름에 따르면 13년만에 불쑥 나타난 하나님은 그에게 지난날 맺은 언약을 다시 꺼내 십니다. 그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거라고 약속합니다. 그의 수많은 자손이 가나안 땅을 물려받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창세기 17장 1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본능적으로 엎드려 예의를 갖추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주님의 말씀에 더 이상 감격하진 않습니다. 싸늘한 쓴웃음을 짓습니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섬뜩한 냉기가 입 밖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사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런 아브라함을 향해 믿음없다고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떤 누구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조상 아브라함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 또한 믿음을 두고 갈등하고 번민했습니다. 불신에 사로잡혔고 심지어 주님을 향해 냉소를 지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늘날 저마다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무력함을 느끼고 절망을 느끼는 모든 사람을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온기가 다시 돌기 위해, 차디찬 쓴웃음을 지우고 따사로운 미소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언약을 더욱더 차근차근 곱씹어야 합니다. 낯설고 새롭게 마주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많은 자손과 땅에 대한 언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몇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 변화입니다. 본문 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지금까지 그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비슷한 발음이지만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닙니다. 언약하신 내용을 이름에 그대로 새겨 넣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피조물을 향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의 이름을 짓게하시며 창조 사역에 참여 시키겼습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이름에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값싼 위로를 주려고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위태로운 희망에 취하게 하려고 새로운 이름을 건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사라를 통해 그의 아들을 낳아 많은 백성의 아버지로 만들겠다는 창조의지를 단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걸 위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그의 이름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며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1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은, 주님이 당신에 대해 ‘전능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게 아닙니다. 원문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이름 ‘엘’을 발전시켜 변형한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전능하심’이라는 당신의 내면 깊은 속성을 담은 자기 이름을 먼저 아브람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의 이름을 바꾸시며 그를 향한 놀라운 창조 계획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까지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을 가장 생생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는 때에 그가 원하는 방법대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수많은 좌절과 실망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가정 안에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여정 거친 끝에 마침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으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버겁고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모든 세월을 통해 당신의 전능하심이 참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제멋대로 욕심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권력이 아닙니다. 많은 제물로 배를 불린 뒤 마법같은 선물을 던져주는 우상의 권능도 아닙니다. 철저히 무력하고 미련해 보이기에 오히려 이 세상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전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것을 생생히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이렇게 울부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호소하셨습니다. 온 우주를 압도하는 암흑입니다. 이루말할 수 없이 처절한 무력함의 절정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십자가의 절망이 부활을 꽃피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부활의 생명과 능력은 더욱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당신의 이름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이 우리 각자를 향해 새롭게 바꿔 부르시는 이름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삶의 그 어떤 허무함과 시련과 고난을 넘어설 수 있는 참된 능력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무력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볼 때 그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능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서툴고 부족할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시는 권능의 손길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와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동행하시고 새 힘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삶의 여러 고난에 지치고 무너질 때 주님은 무력해 보입니다. 오랜 침묵에 마음을 잃고 주저 않기도 합니다. 저희의 아픔에 영영 무관심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어리석은 기대를 넘어섬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위대한 창조의지를 발견합니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마음에 새기고 전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무력하시기에 진정 전능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2023년 10월 4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우리 교회, 교회학교 학생 한 명이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잠시 이성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못을 주어서 예배당 벽에 이렇게 낙서 했습니다.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

그리고 이 천년이 흘러 서기 4023년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 예배당이 무너지지 않고 형체를 잘 지킨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시대에서 2천년 전인 21세기 대한민국 기독교인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건물 벽 한쪽에 새겨진, 당시 기준으로는 고대 한국어로 쓴 짧은 문장을 발견합니다. 무엇이죠?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좀 더 상상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그 때 남미 대륙에 사는 한 청년이 이 발굴에 대한 번역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아, 이 천년 전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한국이라는 나라는 ‘배고파 죽겠다.’라고 괴로워하며 글자를 새길 정도로 무척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였구나!’

여러분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해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023년 대한민국과 4023년 남미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해서 죽겠다.’라는 우리말 강조 표현에는 이 땅의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전쟁등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옛 문장에 담긴 이러한 배경을 모른 채 글자만 쳐다본다면 분명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흔히 생기는 오류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자’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람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화 수단입니다. 하지만 맥락에서 벗어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소한 말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곤 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 해석에도 분명히 유념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와 남미 사이, 이 천년의 문화와 역사 차이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오해와 왜곡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삼국 시대가 막 시작할 때입니다.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주몽이 활을 쏘며 고구려를 세울 때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심지어 구약 성경은 그보다 훨씬 전에, 너무나 먼 옛날에 기록, 편집했습니다. 게다가 서아시아와 유럽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적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은 그것을 ‘번역’한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한순간에 쿵! 하고 이 세상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른 전통과 상황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반드시 원전으로만 봐야 하고, 번역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책을 사랑하고 여기에 담긴 말씀을 날마다 꾸준히 읽으며 바르게 묵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 성경이 ‘언어로서 한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사람이듯, 성경 역시 신비로운 모순과 조화 속에 생명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에 대한, 이런 기초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들은 말씀 전체가 보여주는 원대한 그림과 풍경에는 관심 없습니다. 대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며 무리한 자기 신념을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주님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참 멀어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서 성경을 들이밀며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성경을 왜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4~36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15절부터 시작하는 ‘논쟁 단락’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권위를 변론하셨습니다. 22장 15~22절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논란을 들려줍니다. 본문 바로 앞인 23~33절은 부활을 오해한 사두개인들을 논박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두개인과 평소 대립하던 사이입니다. 현재 온 민족이 처한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런 까닭에 두 집단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두개인의 논리가 무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은 몹시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예수라는 사나이는 몹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과는 정반대로 이해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완벽히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세세한 율법 조항들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그들 눈에 더럽기 그지 않는 창기와 세리들과 서슴없이 어울렸습니다. 당시 신앙 전통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죄를 거침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 중에 ‘한 율법사’가 대표선수로 나섰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서 어느 말씀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발하고 날카로운 질문이 아닙니다.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토론하던 주제입니다. 따라서 본문 속 율법사의 의도는 정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다는, 답을 듣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예수의 수준과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망신 주려는 게 그의 의도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활한 계략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자무식 나사렛 촌놈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속임수와 능숙한 언변으로 무지몽매한 백성을 속였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말씀에 대해 깊은 토론을 시작하면 그 사기꾼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거라고 율법사는 기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이 때 자칫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군중을 열광시킨 주님의 가르침이 한순간에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5절을 언급하시며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눈 여겨볼 점은, 그 사이에 있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입니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은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 층 낮은 차원이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이웃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으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와 자기만족에 취한 그릇된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모두를 끝맺는, 4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의 “강령”(綱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령”이라는 다소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한 헬라어는 <크레만타이>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곧바로 옮기면 “걸려있다.” 혹은 “의존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화면으로 보시는 빌딩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입니다. 지상 163층에 828m로, 현재 기준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합니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한 번쯤을 보셨을 겁니다. 어쩌면 직접 가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이러한 마천루를 올려다보면 현대 건축기술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저렇게 높은 건물이 강한 바람과 지진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코어월”(core wall) 덕분입니다. 우리말로 거칠게 옮기면 ‘핵심 벽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다음 사진 보시겠습니다. 


실제 부르즈 할리파의 코어월입니다. 가장 핵심에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빌딩 전체의 무게 균형을 설계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다 할지라도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어떤 건물도 제대로 세울 수 없습니다. 척추와 같은 핵심 벽체를 땅에 깊이 박아 튼튼하게 올릴 때, 쓰러지지 않고 본래 모습을 갖추고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 전체의 모든 구절이 기대어 걸려있는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이라는 위대한 건물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핵심 축이 바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중요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사실을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은 이른바 <쉐마>이라고 불리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주자’라고 부르는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구에 붙여 두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는 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레위기 19장 18절, 한 구절만이 아니라 19장 전체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이웃 사랑은 십계명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 역시 ‘이웃 사랑’이 최고의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낯선 교훈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럴듯한 거짓이 복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셨습니다.

사자성어 중에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淡白(담백)하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과 물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하실 겁니다. 단순히 요리에 대한 교훈을 넘어 인생의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자극적이고 화려한 무언가에 쉽게 현혹됩니다. 하지만 가장 뻔하고 평범하게 들리는 진리, ‘사랑’에 참 진리가 담겨 있다는 진실을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 확인합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으로 멸망 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열정적인 신앙을 불태웠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입니다. 거창하고 비장한 신앙 생활을 강요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오늘날 신학자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5%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입니다. 실로, 막강한 권위였습니다. 문제는 율법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각종 정결 규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특별히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절대다수의 백성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말씀으로 위로 하기는커녕 함부로 비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경건함을 더욱 내세우고 으스대기 일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성경 글자에는 철저히 집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인 “사랑”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억눌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며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죄악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거룩한 소명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어 댔지만 실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창하게 외쳤지만 정작 본인들이 주위 사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 그 분의 인격과 삶이 곧, 말씀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핵심에 대해 단지 입술로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본질인 “사랑”을 이 땅에서 직접 살아내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영원한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찬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이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연약한 이성과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자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자기 뜻과 욕심을 고집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 몇 개를 억지로 들이밀며, 그 권위를 훔쳐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마음 중심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십자가 사랑을 품고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사랑으로’라는 조건과 합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탐욕으로 포장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했듯이 거짓을 몰아내고 어둠을 이겨내며 절망에 맞서는, 진리와 빛과 희망의 사랑을 성경을 읽으며 내 삶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긍정하게 합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좌절과 한계를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탐욕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려는 바리새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분명히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안에 인간의 실수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거나 모든 내용이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놀랍고도 깊은 뜻 가운데 굳이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죽은 문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으로 변하게 합니다.


성경은 마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은 분명 창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얼룩과 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그러한 흠결을 보고 창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 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문 유리 혹은 창틀에만 눈길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문이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포근한 풍경과 햇살을 전해주는 것이 창문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문의 흠집으로 그 전체 가치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혹은 유리의 값어치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도 않습니다.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록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4023년에 발견한, 이천년 전 먼 나라의 예배당 발굴기록을 읽는 사람은 벽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낙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짧은 문장을 두고, 독단적인 이해와 고집으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건물 전체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이 오랜 시간 품어온 따스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문자 혹은 부분적인 내용에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길 기대하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새롭게 확인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올바르게 섬기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언어를 사용하시어 성경을 기록하시고 우리 손에 전해주신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경험하며 그 뜻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탐욕을 멈추고, 진리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는 거룩한 습관을 지키며, 그 안에 담긴 놀랍고 풍성한 세계를 맛보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6장 6~16절 “살피시는 하나님”

2023년 9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6장 6~16절 “살피시는 하나님”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한 여인이 도망칩니다. 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내 달릴 수는 없습니다. 몸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홀몸이 아닙니다. 생명이 몸 안에 자라 배가 불러옵니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앙다물고 황급히 걸음을 옮겨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임신부 도망자’, 이렇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처지는 한 인간이 경험하는 극한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쩌다 이러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본문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브라함의 책임 회피입니다.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한 아내 사래, 그리고 임신한 여종 하갈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방치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내가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가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로 옮긴 히브리어는 <아나>입니다.

이 단어가 출애굽기에도 매우 중요한 순간에 등장합니다. 바로 이집트 사람들이 히브리 노예들에게 고된 중노동을 강요하며 괴롭힐 때입니다. 이를 통해 하갈이 겪었던 고통의 무게와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절망입니다. 그녀는 마침내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다 하갈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을 지납니다. 물이 부족한 서아시아 지역에서 여행자들은 자연스럽게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하갈에게도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뜻밖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입니다. 달리 말하면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샘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지켜보는 눈’이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당히 오묘하고 역설적인 상황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쳐 숨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디에도 주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당황스럽고 두렵지만,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위로를 안겨주는 진리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며 누구나 저마다의 사래를 만납니다.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힘 있는 자에게 학대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나와 전혀 무관한 존재 같습니다. 나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우주 어딘가에 숨어 계신 것만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각기 살고자 도망쳐 달아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꾸짖고 다그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살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8~9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몰라서 물어보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아시지만, 질문과 대답을 통해 당사자에게 명확히 확인시키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하갈이 경험하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하갈이 원해서 아브라함의 아기를 가진 게 아닙니다. 힘없는 여종의 뜻과 무관하게, 나이 든 주인 어르신과 마님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우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그 전에는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사라가 어느 순간 우스워 보였습니다. 자기와는 전혀 다른, 여주인의 늙은 몸이 만만해 보였습니다. 겁 없이 사래를 깔보았습니다. 그 댓가는 혹독했습니다. 겁에 질린 채, 아기를 밴 몸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고대 사회에서는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는, 죽음과 절망입니다.

천사는 하갈과 대화를 나누며 이 사실을 그녀에게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셔야 할까요? 그녀를 힘들게 했던 상황에서 한순간에 벗어나 안락한 길을 열어줄 것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자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전합니다. 9절 후반부를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하나님은 하갈의 탈출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시간 그녀를 괴롭게 했던 사람과 장소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 합니다. 굉장히 잔인합니다. 하갈이 겪었던 학대에 눈을 감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무심하고 냉정한 명령처럼 들립니다.

게다가 지금 하갈과 천사가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술 광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이집트 고대 문서에 따르면 이 동네에 시내 반도와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국경 수비대 담장이 있었습니다. 즉, 술 광야는 그 지역 자체가 거대한 국경선입니다. 이곳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집트 영토입니다. 아마도 그녀의 목적지였을 고향입니다. 친숙하고 풍요로운 제국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북쪽으로 돌아가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갈은 지금 그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이 말씀이 하갈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너무나 듣기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또다른 학대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그녀의 손 아래에서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서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는 극적인 해방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또다시 고통스런 현실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핏 이 장면만 보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냉정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10~11절 제가 읽겠습니다.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분명 고통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갈은 나중에 다시 한번 더 쫓겨났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아들 이스마엘도 함께 버려집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고난을 뚫고 다가오는 찬란한 은혜와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통에 응답하시며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녀 뱃 속에 있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도 크게 번성 할 거라는 약속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자녀가 주는 상징성은 지금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단지 사랑스런 가족, 혹은 대를 잇는 자손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녀는 곧 신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자녀가 태어났고 그들 또한 많은 자손을 낳아 퍼뜨린다는 것은 조상의 인격과 생명이 이 땅에 마땅히 이어질 만하다는 걸, 그들이 믿는 신이 확증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그 누군가의 존재 가치가 없다는 저주로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경 인물들이 자녀가 없음을 두고 매우 심각하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갈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한다는 것은 보통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다. 비록 당장은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대를 경험한 별 볼 일 없는 여종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습니다. 그녀 또한 아브라함 못지 않게 의미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갈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말을 거는 여성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이 여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진귀한 장면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왕족이나 귀족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육도 아닙니다. 이방인 여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이 알려주는 복음의 위대함을 알려줍니다.

흔히 구약 성경을 유대인만의 복음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1세기 교회,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품은 원대합니다. 협소하고 어리석은 기준으로 함부로 사람들을 나누고 판단하고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넉넉히 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갈은 위대한 고백을 남깁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과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까닭에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고대 서아시아 사회에서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십계명 3계명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갈은 용기있게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지금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그녀가 부른 주님의 이름이 너무나 적절하기에 성경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그 누구에게도 말못한 설움과 슬픔을 주님께서 들여다보고 함께 아파하심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 하나님이 당장 고통에서 우리를 꺼내 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힘겨운 현실로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모든 발걸음에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심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과 더불어 더욱 승리하는 오늘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살피시는 하나님.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달아난 하갈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저희의 모든 아픔을 들으시고 힘겨운 눈물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을 사모합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려한 신기루에서 벗어나 은혜가 피어오르는 광야를 향해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함께 지시고 부활하시어 하늘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