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2일 월요일

영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1995) 리뷰


*스포일러 포함

그는 강하다
화려한 성과와 경력을 자랑한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부하로 압도한다.
"Shut the fuck up!" 외칠 때 그의 권력은 절정에 이른다.
노련한 핵잠수함 함장인 프랭크 램지 대령의 말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그의 치명적인 취약성이 드러난다.
꼭꼭 숨겨온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폭발한다.
그 결과 판단력과 절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잠수함 같은 자기 세계에 갇혀, 아집에 휩싸여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조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다.

반면 부함장 론 헌터 소령은 정반대 인물이다.
엘리트지만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지 않았다.
부하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고 존중했다.
위기 상황에 몸을 사리지 않고 직접 해결했다.
그 덕분에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재앙에서 구했다.

이렇듯 함장은 미국의 위대함은 감동적으로 외치는 탁월한 웅변가지만 정작 그 핵심인 민주주의를 배격했다.
반면 부함장은 비록 경험은 부족하지만, 더 넓은 시야로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고 실천으로 옮겼다.
이처럼 영화는 두 주인공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두 사람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청문회가 끝나고 프랭크 램지는 론 헌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옳았고 나는 틀렸네"(You were right, and I was wrong.)

이로서 그는 훌륭한 군인으로서 명예를 회복했고, 영화는 단순한 전쟁 액션 영화를 넘어 지도력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안겨주는 걸작이 되었다.
독선을 내려놓고 자기 오류를 겸손히 인정할 때 비로소 위기를 이겨내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실천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를 참으로 지킬 수 있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실천해야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힘과 권위를 내려놓는 용기와 섬김이다.
가장 가까이 날마다 마주하는 이들을 참으로 존중하고 돌보아야 한다.
목회자의 진가는 그의 감동적인 언변이 아니라 일상에서 무던히 실천하는 목회적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이 알려주는 복음의 신비 속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새 40대 목회자가 되어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기득권을 손에 쥔 나 자신을 여러모로 돌아보게 한 영화다.

중후반부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더욱 씁쓸하게 다가오기에, 오히려 깊은 울림을 안겨준 램지 대령의 초반 명대사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자네(부함장 론 헌터 소령)에게 몇 가지 충고를 좀 하고 싶군.
자네도 언젠가 함장이 되고 싶다면 가장 하면 안 되는 일은 자신만 생각한다거나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일세.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놈은 싫어. 아첨꾼은 절대 싫고.
언제나 자네 임무와 대원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네."

Allow me to give you a tiny bit of advice.
If you want your own boat someday.
the very worst thing you can do is worry about yourself or try to impress me.
I can't stand save-asses, and I won't abide kiss-asses.
You keep your priorities straight:
Your mission and your men.

2024년 2월 10일 토요일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中(엘리, 2016) 후기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될 생각. 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 이 생각은 네가 나의 복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또다시 일깨워줄 거야. 너는 매일처럼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존재는 결코 아니야."

"우리 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네가 처음 걷기 연습을 하면서부터야. 너는 쉬지 않고 어딘가로 달려나가겠지. 네가 문지방에 부딪치거나 무릎이 까질 때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돼. 마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는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느낌이지. 내 몸의 연장이니까 지각신경이 느끼는 아픔은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되지만, 운동신경은 전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꼴이야."

"유아Infant라는 단어는 ‘말할 줄 모르는’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너는 ‘난 괴로워’라는 말만은 완벽하게 할 줄 알고, 쉬지도 않고 주저 없이 그렇게 말해. 그 주장에 대한 너의 헌신적인 태도에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어. 일단 울기 시작하면 너는 분노의 화신이 되고, 온몸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지. 재미있는 건 네가 조용하게 있을 때는 몸에서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야. 만약 누군가가 그런 상태의 너를 보고 초상화를 그린다면, 나는 그 그림에 후광을 포함시키라고 주장하겠지. 그렇지만 불쾌함을 느낄 때 너는 큰 소리를 발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클랙슨이 되어버려. 그런 너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화재경보기로 족할 거야. 

네 인생의 이 단계에서 네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내가 너에게 젖을 먹이기 전까지 네 안에는 과거의 만족감에 관한 기억도, 미래의 충족에 대한 기대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다 젖을 빨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역전되겠지. 너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게 돼. 네가 지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야. 너는 현재 시제 속에서만 살아. 여러 의미에서 실로 부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헵타포드들과의 공동 작업은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어. 나는 너의 아버지를 만났고, ‘헵타포드 B’를 배웠어. 이 두 가지 사건은 내가 지금 너의 존재를 아는 것을 가능하게 해. 달빛에 물든 이 파티오에서 말이야. 훗날, 세월이 흐른 뒤에는 네 아버지도 떠나가고, 너도 떠나가게 될 거야. 이 순간으로부터 내게 남겨질 것은 오직 헵타포드의 언어밖에는 없어. 그래서 나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야.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이런 의문들이 내 머리에 떠오를 때, 네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물어.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는 미소 짓고 “응”이라고 대답하지. 나는 내 허리를 두른 그의 팔을 떼어내고,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


사랑하는 영화 "어라이벌"('컨택트'라는 괴이한 개봉명을 부르기 싫다.)을 몇달 전에 무척 감명깊게 다시 보았다.
곧바로 이 영화의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를 포함한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리디북스에서 전자책으로 샀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문득 리디북스 '내서재'를 살펴보다 기억이 났다.

설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원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려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싶었다.
정확히는 문학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분주한 일상을 지나는 마음 속에 촉촉한 문장이 스미길 바랐다.

집에 도착해서 이 난해한 중편소설을 다 읽으며 내 선택에 만족했다.
'테드 창'에 왜 열광하는지 충분히 공감했다.
깊은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냈다.
'네 인생의 이야기' 경우 영화와 다른 결의 감동을 안겨줬다.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읽고 싶다.
테드 창 고유의 예술 세계가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온다.
나의 목회와 설교 또한 그러하길 소망한다.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나는 내가 아니다(Yo no soy yo)


-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on Jimenez)
(옮긴이: 김주환)

나는 내가 알지 못해도 늘 내 옆에 있는,
때로 내가 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다.
내가 이야기할 때면, 평온하게, 침묵을 지키고,
내가 미워할 때면, 사랑스럽게, 용서하며,
내가 가본 적도 없는 것을 걷고 있고,
내가 죽을 때에도 여전히 내 곁에 서 있을,
그가 바로 나다.


https://www.youtube.com/live/GqifltZgGQY?si=isDsq_YdrBkmuNaU&t=4546

2024년 1월 21일 일요일

영화 "트레이닝 데이"(Training Day, 2001) 리뷰




*스포일러 포함

이 영화의 매력은 '모호함'이다. 중후반까지 악역 '알론조'(덴젤 워싱턴)의 정체성을 불명확하게 다룬다. 그가 분명 선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의 명분과 합리성은 지닌 것처럼 보여준다. 그 바탕에 알론조의 탁월한 언변이 있다. 이를 이용해 팀원들을 휘어잡고 경찰 조직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영화 초반, 제이크(에단 호크)가 알론조와 함께 일하게 되어 무척 기뻐하며 설렌 이유다. 제이크만이 아닐 거다. 영화상 설정이지만 그 또래, 막 경력을 시작한 경찰 대부분 그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론조의 추악한 밑바닥이 금세 드러난다. 역설적으로 그 중심에 달변이 있다. 매끈한 말솜씨로 신입 경찰을 노련하게 겁박하고 회유한다. 심지어 살인과 갈취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그러나 영화 전개가 절정을 향해 갈수록 그가 호의 인척 말한 모두가 거짓이라는 걸 씁쓸하게 알게 된다. 그에게 제이크는 자기 야망을 위한 이용 대상에 불과했다. 결국 알론조는 자기 본심과 정반대 얘기를 매우 설득력 있게 하는 데 능숙한 인간이다. 그의 궤변이 매끄러우면 매끄러울수록 실상 그가 얼마나 천박한 인격을 지녔는지를 알려준다.

지금 나는 알론조와 제이크 사이 어딘가에 있다. 알론조와 같은 부와 권력은 없다. (초반) 제이크처럼 순박하진 않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 한쪽에 꿈과 야망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두 인물을 오가며 숱하게 방황하고 좌절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내 주위 제이크를 향해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다. 더 이상 알론조에게 속고 휘둘리지 말고 부디 자기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영화는 그 자체 미덕과 별개로 각별하다. 내게 "트레이닝 데이"가 그렇다. 계속 감탄 나오는 덴젤 워싱턴의 연기는 그가 왜 할리우드 최고 배우인지를 증명한다. 에단 호크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감각적인 화면과 음악도 인상적이다. 탁월한 스릴러 영화로서 손색없다. 적극 추천한다.

한편으로 작품 자체의 의도와 별개로 다양한 상징으로 내게 다가왔다. 제이크의 각성과 성장이 뭉클하게 마음을 울린다. 동시에 여전히 기세등등한 현실 속 여러 알론조를 발견한다. 세련되게 포장한 그들 탐욕이 때로 참을 수 없이 거북할 때 다시금 이 영화를 찾아 한 호흡에 감상할 것 같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더 이상 알론조에게 기대지 않는다. 나는 내 길을 간다.

2023년 12월 29일 금요일

창세기 35장 1~7절 "벧엘의 하나님"

2023년 12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35장 1~7절 "벧엘의 하나님"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그리고, 그리하여, 그럼에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글 성경은 생략했지만 구약 원문에는 1절 앞에 접속사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말 접속사는 ‘그리고’나 ‘그러나’처럼 순접 혹은 역접 의미가 명확합니다. 반면 한 글자로 된 히브리어 접속사는 뜻이 명쾌하지 않습니다.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삶의 모호함과 모순을 드러냅니다. 다만 앞 단락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본문이 직전 사건과 역동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막내딸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 하몰에게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오빠들이 사악한 꾀를 내어 세겜 남자들을 몰살시켰습니다. 

거대한 공포가 야곱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마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먼저 살던 사람들과 원만히 잘 지내야 합니다. 거창한 명분을 떠나 가족 전체의 생존이 걸린 일입니다. 그런데 철없는 아들들이 혈기를 못 이겨 끔찍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복수는 시간 문제입니다. 세겜 성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평소 가깝게 지낸 다른 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 그 즉시 모든 게 끝장입니다. 게다가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족장이자 아버지로서 자기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뼈아픈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곱을 짓누른 한없는 절망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불행 가운데 지쳐 쓰러진 야곱에게, 마치 문장과 문장을 잇는 접속사가 그러하듯 가장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 또한 덧붙입니다. 벧엘은 지난날 그가 주님께 예배한 곳입니다. 본문 7절은 이러한 1절과 정확하게 대칭을 이룹니다. 야곱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곳 이름을 ‘엘 벧엘’, 즉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을 명령한 게 아닙니다. 벧엘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눈부신 은혜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벧엘과 함께 언급한 시간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과 7절 모두, 야곱이 하나님을 예배한 그 시절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바로 ‘형의 낯을 피해 도망하던 때’입니다. 그가 과거에 경험했던 가장 어둡고 비참했던 시간입니다. 관련해서 창세기 28장 10절 이하 내용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때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모의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쌍둥이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에서는 분노하며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냥으로 단련한, 풍채 좋은 근육질 몸은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서 손에 잡힌다면, 그의 사냥감이 된 토끼나 노루처럼 야곱이 피를 흘릴 게 분명했습니다. 리브가는 이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야곱을 오빠 라반의 집으로 피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유복한 족장 아들에서,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밤을 맞이합니다.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자체가 암울한 자기 인생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 멀리 어디선가 정체 모를 섬뜩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언제 맹수가 덮칠 지 모릅니다. 어디서 강도떼가 튀어 나올지도 모릅니다. 설령,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에 무사히 도착한다 할지라도, 어머니 바람처럼 그곳에서 안전할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곱이 베고 누운 돌덩어리의 딱딱하고 싸늘한 촉감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앞날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온갖 염려가 그의 내면에 엄습합니다. 어쩌면 그의 눈가에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돌베개를 축축이 적셨을지 모릅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수없이 돌이켜 보며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번민과 절망 속에 지쳐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때, 꿈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조금 길지만 창세기 28장 12~15절을 화면 보시면서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꿈에 본즉(보라!, 히 ‘베힌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보라!, 히 ‘베힌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보라!, 히 ‘베힌네’)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보라!, 히 ‘베힌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꿈에서 야곱은 하늘에 닿은 계단을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 개역개정성경은 ‘사닥다리’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서아시아에서 발굴한 고대 유적처럼 층계나 경사면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거기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꼭대기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공포에 사로잡혀 불안해하는, 영혼 가장 깊은 아픔을 어루만지고 위로하십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언약하신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은혜를 선언하십니다. 바로 언제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하겠다는 ‘임재’입니다. 그런데 앞서 화면으로 보신대로 여기서 “보라!”라는 뜻의 히브리어 감탄사 <베힌네>가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느낀 경이로움을 강조 하는 표현합니다. 게다가 28장 11절에서 야곱이 ‘한 곳에 이르렀다.’라는 문장의 원문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 곳에 도착했음을 암시합니다. 
 
정리하자면 야곱은 가장 위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마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는 감격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거대한 문화와 체계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야훼 신앙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이제 겨우 3대에 이른 가족 종교입니다.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특별한 출생 과정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생히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마침내 만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곱은 창세기 28장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그리고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화면에 밑줄로 표시한 마지막 문장,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를 원문에서 곧바로 옮기면 “그리고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입니다. 1인칭을 연달아 두 번 반복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를 통해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의 임재를 몰랐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치명적인 무지함을 처절히 인정합니다. 그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누구보다 바로 나 자신을 넘어서야 합니다.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내 슬픔과 고통에 집착하는 걸 그만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온 인격과 존재가 진실로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립니다.

그 결과 야곱은 하나님과 함께 나그네 길을 계속 걸어갈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돌베개를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부으며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원래 ‘루스’로 불리던 그 땅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 ‘벧엘’로 바꾸고 진심 어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후 2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삶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아들들이 세겜에서 범죄를 저질러, 이제 온 가족이 어떤 끔찍한 고초를 겪을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또다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거기서, 그 옛날 형을 피해 도망칠 때 나타나셨던 당신께 예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순간 야곱은 아마도 과거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날 밤의 냉기와 허기와 피로가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극심한 절망과 두려움이 다시금 가슴 깊이 사무쳤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압도하는 주님의 찬란하고 따스한 생명에 휩싸였습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생명과 능력이 있음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가족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

여기서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눈물겨운 신앙 고백을 남깁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가 고생할 때에 간구를 들어주시고, 가는 길 어디에서나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셨다는 간증입니다. 같은 은혜가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충격적인 사실을 본문에서 확인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4절을 보면 그의 가족들이 어마어마 양의 이방 신상과 장식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샌가 그들의 내면 속에 하나님이 사라진 증거입니다. 

그 대신 우상이 유혹하는 탐욕과 헛된 풍요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 했습니다. 더욱 정확히는 ‘나’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 이상 주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 감정과 어리석은 욕망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아들들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죄악을 저지르고, 공동체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난날 함께 하신 언약을 되새겨 주신 그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위험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은 세겜을 떠나며 몹시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많은 무리가 멀리 이동할 때는 언제나 외부 공격에 약하기 마련입니다. 야곱 가족이 외적의 칼과 창을 무서워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주변 성읍 사람들이 야곱 가족에게 크게 겁을 내었습니다. 공포의 전환이자 두려움의 반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결과입니다. 지난날 벧엘에서 도망자 야곱을 구하신 주님이 여전히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시련에서 구하시고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완성하시고, 온 세상에 전하시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온 우주를 뒤덮는 공포의 절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또 다른 루스에서 밤을 보내며 싸늘한 돌베게를 베고 누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 모양의 세겜을 지나며 두려움에 벌벌 떨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깊고 깊은 죽음과 절망 속으로 주님께서 따스하게 임재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모든 절망을 뒤엎는 위대한 생명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고생할 때에 간구를 들어주는 주님. 가는 길 어디에서나 항상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시는 주님만을 높여 예배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헛된 자아와 욕망을 날마다 더욱 내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세겜을 떠나 벧엘을 향해 날마다 묵묵히 발걸음 내딛길 소망합니다.

물론 그 길에 여전히 많은 아픔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분명 설움에 사무쳐 눈물 흘릴 날이 찾아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고, 그래서 벧엘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
벧엘의 하나님
깊은 밤 돌베개를 베고 스산하게 잠들던 도망자 야곱에게, 온 가족에게 닥친 위기 가운데 두려워 떨던 야곱에게, 따스한 임재로 다가오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또한 저희의 모든 실패와 좌절 가운데에도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어리석은 아집과 교만을 물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허한 우상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온 마음을 열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