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1일 월요일

영화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 2024) 후기




대학 시절 씨네큐브에서 "그녀에게"(Hable Con Ella, 2003)를 감상한 건 지금까지 가장 강렬했던 영화 경험 중 하나다. 화려한 색감과 충격적 주제 의식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이후 이 작품을 연출한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이름이 내 마음 한구석에 별처럼 박혔다.

그의 최신작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그 별이 다시 반짝였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어두운 소재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시간이 흘러 역설적으로 '죽음'을 다루기에, 더 정확히는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기에 유튜브로 결재하고 시청했다.

영화는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미술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가치를 지닌다. 장면 장면마다 정교한 '영상 예술'이 펼쳐진다. 그 자체로 마음을 정돈하게 한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마음 밭에 감독은 '존엄사'라는 둔탁한 주제를 툭 던진다. 암 말기 환자인 마사(틸다 스윈튼)는 우연히 만난 친구 잉그리드(줄리언 무어)에게 존엄사를 결단하는 휴가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에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나온다. '동행'이다. 외롭고 고통받는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의 아름다움이다. 저마다의 비극을 이겨내게 하는 공감의 가치와 위대함이다. 

두 주연 배우가 펼치는, 절정의 기량을 뿜어내는 연기로 더욱 묵직한 공명을 안겨 준다.

감독을 통해 경험한 또다른 강렬한 영화 체험이다. 한국 혹은 헐리우드의 익숙한 상업영화 문법을 넘어선, 영화 예술의 드넓은 아름다움을 먹먹한 숨결로 마주 했다.

내년 초 눈 내리는 어느 날, 따뜻한 차를 손에 들고 커다란 화면으로 한 호흡에 차근히 감상하고 싶다. 참으로 귀 기울이고 울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5년 8월 9일 토요일

시편 23편 “나의 목자이신 주님”

2025년 8월 8일, 승리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시편 23편 “나의 목자이신 주님”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찬송입니다. 시편에 담긴 찬송 150개 중에서도 단연 가장 널리, 많이 불린 찬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첫 구절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 주었습니다. 방황을 딛고 다시 일어날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서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편 23편 안에는 곱씹어 묵상하면 할수록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맑은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의 저자 다윗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목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치열한 일생을 통해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고백에 담긴 뜨거운 생명력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목동으로 지냈던 그의 유년 시절과 관련한 성경 속 두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과 이새의 대화입니다. 어느 날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해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새로서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가 자기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손에 기름까지 들고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직감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새는 흥분한 목소리로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일곱 아들의 표정에도 기대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 모두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혹시 다른 아들이 있는지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난감해하며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실은 부르지 않은 막내가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삼상 16:11).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날 이새의 집에서 벌어진 상황과 연결시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다윗의 형들은 아버지의 호출에 즉각 응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애초에 부를 마음이 없었습니다. 혹시 생각이 바뀌어 부른다고 할지라도, 집으로 바로 달려올 수 없는 먼 곳에서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명확히 알게 됩니다. 다윗에게 ‘목동’은 소년 시절 맡았던 단순한 소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족에게 철저히 소외당하는 처지를 상징적으로 확연히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다윗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전할 매우 많은 양의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위험한 전쟁터로 향합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 장군을 보고 분개합니다. 자기가 저 괴물같은 골리앗과 맞서 싸우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울 왕은 그런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이때, 임금을 설득하는 다윗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 함께 읽겠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5).

이러한 다윗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양을 지켰던 곳, 목자로서 양 떼를 돌보았던 유다 광야는 한가로운 전원 목장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사자나 곰 같은 맹수가 출몰해 양은 물론이고 다윗의 목숨까지 위협했습니다. 

이때 다윗의 나이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3절을 보면, 다윗의 일곱 형 중에서 세 명이 입대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넷째 형부터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이입니다. 민수기 1장에 따르면 19살 이하입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본다면, 이때 다윗은 대략 십 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분명 어린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사울의 군복과 투구가 몸에 맞지 않은 미성년입니다. 맹수의 위협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광야로 양을 몰고 나가기에는 아직 어립니다. 어린 양이 목자의 보살핌을 받듯 여전히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런 막내 아들더러 돈 벌어 오라며 위험한 일터로 혼자 내보낼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부모의 관심에서 밀려난 채, 양 떼 사이에서 외로움에 사무쳐 두려움과 추위에 몸을 떨며 밤을 지새야 했습니다.

물론, 이 상황을 오늘날 청소년 인권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성장기를 묘사하는 성경의 태도는 일관됩니다. 부모에게 당한 철저한 배제와 소외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고백을 남겼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목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울에게 설명한 그의 일상을 다시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수시로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떼를 덮쳤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상황입니다. 본능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누구나 도망가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어린 청소년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양을 구하기 위해 맹렬히 맹수와 맞서 싸웠습니다. 이러한 날들을 보내면서 그는 참된 목자의 정체성을 내면 깊이 새겼습니다. 양 떼를 단지 재산으로 보거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성다해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양이 얼마나 약하고 우둔한지, 그런 양에게 목자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를 온 몸으로 깨달아 알았습니다. 선한 목자의 태도를 견고히 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험난한 시절을 거쳐 아름답게 성장한 다윗의 놀라운 신앙을 주목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그가 사울의 전속 악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탁월한 수금 연주자를 가까이 두고, 그가 들려주는 찬양을 통해 치유 받을 것을 권했습니다. 사울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온 나라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았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소년 다윗은 항상 손에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예배자입니다. 그런데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유다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저 멀리 어디선가 들리는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수한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움켜 쥐며 잠잠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황량한 광야 한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마치, 길 잃은 어린 양에게 목자가 지팡이를 내밀 듯, 다윗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사무엘상 16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앞서 언급했던,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보셨다는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현재 폭정을 일삼는 사울이 아닙니다. 지금 기름 부어 훗날 새롭게 즉위할 다른 왕, 곧 다윗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왕을 ‘보았다’가 아니라 ‘볼 것이다’라는 미래 의미를 담은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경우 흔히 해당 동사를 히브리어 문법상 미완료형으로 적습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구약 원문은 이 단어를 보통, 과거 혹은 현재를 의미하는 완료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미래 사건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완료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켜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드러내는 구약성경의 엄중한 표현법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인간의 시간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주님의 눈길이 담겨 있습니다. 따뜻하게 양 떼를 보듬는 목자의 손길이 드러납니다. 앞서 보았듯 지금 다윗의 모습은 왕과 전혀 거리가 먼, 초라한 목동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다윗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이미 그는 한 왕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왕’이라는 특정 직분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지 주변 다른 나라 군주들처럼, 권력자로 세우려고 그에게 기름 붓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목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일깨우라고 그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 아닌 목자입니다. 자기 역시 양 떼의 일부임을 명심하며, 참 목자의 음성을 먼저 듣고 앞서 나아가 나머지 양들을 이끄는 존재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백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곧바로 왕좌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왕위로부터 한참 동안 먼 길을 돌았습니다. 10년 가까이 힘겨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하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던 시간입니다. 목동으로 보냈던 소년기 못지않게 어두운 나날이었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다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모든 시련을 통해 다윗은 목자이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지도자로 자라갔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 후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를 실현하며 메시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잘못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일과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군대로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린 사건입니다.

이 두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왕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휘둘렀던 통치행위입니다. 왕이 자기 눈에 들어온 여인을 마음대로 곁에 두는 사례는 역사책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심지어 왕가의 혈통을 늘리는 정당한 행동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백성 중 누구도 감히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벌인 짓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이 자국의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임금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병사의 숫자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이 일을 엄중히 금하신 까닭은 분명합니다. 어느 순간 현실을 핑계로 하나님보다 창과 칼과 병거를 더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의 이 두 가지 죄악 즉, 밧세바를 아내로 삼은 것과 인구 조사를 한 것에 격노하신 핵심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어느새 권력에 취해 자기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잊고 백성을 충실히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극명하게 갈립니다. 사울은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를 끝내 외면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기필코 왕권을 잃지 않으려다 파국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그분 앞에서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주어진 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다윗의 말년을 기록합니다. 그는 몹시 늙어 이불을 덮어도 냉기를 느낄 정도로 기력이 쇠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가장 예쁜 처녀인 아비삭을 찾았습니다.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도록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노회한 정치인들의 교묘한 술책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건 아니어서, 노쇠한 임금이 죄의식을 갖지 않으면서도 좋아할 법한 묘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당사자인 아비삭의 처지는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예쁘다’라는 기준은 보편적이면서도 주관적입니다. 불의한 정치가 작용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따라서 밤마다 늙은 임금의 품에 안기는, 어린 처녀로서는 너무나 무섭고 수치스러운 역할을 고관대작의 여식에게 맡길 리가 없습니다. 아비삭은 이스라엘 변방지역인 수넴 출신으로서, 권력에 저항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마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왕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복잡한 정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편의를 위해 현실에 눈 감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고 위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열왕기상 1장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은 신하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하고 양 떼를 섬기는 소명을 한결같이 성찰한 결과입니다. 성경이 이 사건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기록해 들려준 이유입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기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세속 군주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하나님 앞에 기름 부음 받은 목자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비삭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아끼고 돌봐야 할 길 잃은 어린 양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다윗은 그런 고결한 신앙과 인격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가 시편 23편을 통해 찬양했듯 주님을 ‘나의 목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고백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굳게 붙잡았습니다.


시편 23편을 시작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훼 로이> 혹은 <아도나이 로이>입니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운문체의 특성을 따라, 다양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나를 양 돌보듯 돌보시는 분’이라는 서술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훼, 내 목자시여”라는 부르짖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 목자는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야훼시라”라는 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찬송에서 우리는 다윗이 지닌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새삼 발견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어린 양이라는 진리를 거듭 명심했습니다. 인생 길에 찾아오는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벗어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품었습니다. 자신의 삶 가운데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했습니다.

다윗은 이 찬송을 언제 지었을까요? 양 떼를 지키며 수금을 연주하던 소년 시절이었을지 모릅니다. 혹은 치열한 권력 투쟁을 이어가던 중년 시기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보며 회한에 잠긴 노년 때일지도 모릅니다. 모두 추측의 영역입니다. 다만 성경이 기록한 다윗의 생애를 통해 선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의 찬양과 고백 그대로, 그가 진심을 담아 부른 하나님의 이름처럼, 주님이 다윗의 신실한 목자가 되어 그의 삶 전체를 이끌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연히 다윗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모든 이를 향한 동일한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주님을 예배하며 오랫동안 이 노래를 함께 부른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목자이신 주님의 온전한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길 잃은 양 떼를 진실로 구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가며 당신이 참된 목자임을 생생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복음서의 두 장면이 있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6장 3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는 백성을 양 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 눈길은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소년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어린 시선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갈릴리 빈민들은 “목자 없는 양” 같았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종교 지도자들조차 기득권에 안주할 뿐 그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난과 억압으로 고통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체휼하는 공감입니다. 주님은 양 떼의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구약성경에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이 이미 다윗과 온 이스라엘의 신실한 목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의 지극한 사랑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그분이 주시는 진정한 희망과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이 반드시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돌아보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마음에 담고 시편 23편을 다시금 차근히 읽어보길 바랍니다. 천천히 소리 내 읊조리며 곱씹어보길 바랍니다. 이 위대한 찬송을 통해 갈수록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갈 희망을 깨닫습니다. 막막한 인생 여정에서 반가운 이정표를 발견하고 안심하며 걸어갈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복음을 깨닫고 누릴, 청초한 푸른 풀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새한글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혼잣말)
1 여호와가 나의 목자,
내게 모자람 없네.
2 푸른 풀밭에 나를 눕히시네.
물가 푹 쉴 곳으로 나를 데려가시네.
3 내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네.
나를 이끄시네, 의로운 길로,
여호와의 이름 위해서라네.

(기도)
4 캄캄한 골짜기를 가야 해도
나 잘못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니까요.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내게 힘 됩니다.
5 주님이 내 앞에 밥상을 차려 주십니다, 내 적들 맞은편에.
주님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어 주십니다.
내 잔이 넘쳐 납니다.

(혼잣말)
6 정말이야, 좋은 것과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따라다닐 거야, 나 사는 모든 날에!
나 여호와의 집에 머물고 싶어, 언제까지나!


기도 
저희 참 목자이신 주 하나님.
주께서 자녀들의 삶을 날마다 신실하게 이끄심을 고백합니다. 그 믿음을 담아 찬양 드렸던 다윗의 일생을 돌이켜봅니다. 부모에게조차 돌봄 받지 못했던 그의 외로운 소년 시절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목동으로 양 떼를 돌보며 신실하게 주님을 바라보았던 그의 놀라운 신앙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는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이 흩어진 양들의 목자로 이 땅에 오셨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선한 목자의 사랑을 부어주신 은혜를 높이 찬양합니다. 그 위대한 진리를 마음 깊이 깨닫길 원합니다.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항상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보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8월 6일 수요일

요한복음 12장 20~26절 “죽지 않는 죽음”

2025년 8월 6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복음 12장 20~26절 “죽지 않는 죽음”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분주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모인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금 늦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독한 폭염의 끝자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많이 지치고 힘드시죠? 그런 까닭에 어쩌면 잠시 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봄이 있었습니다. 계절의 흐름 속에 봄이 떠나 여름이 찾아왔고, 머지않아 여름을 떠나보고 가을을 맞이할 겁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묘사한 시 한편을 소개 하고 싶습니다.

봄날 입하

- 이문재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여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초록이 초록에게 져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실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네 번째 연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에게 여름이 찾아온 것은 봄의 죽음 덕분입니다. 봄이 죽은 척하지 않고, 죽은 흉내를 내지 않고, 실랄하고 적나라하게 죽어서 죽었습니다. 그 결과 여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한 여름의 작열하는 햇살은 비록 잠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과실을 영글게 하여 가을 수확을 이루는 생명의 기적을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참된 죽음과 생명이 가지는 역설적인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2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그 분 주위를 둘러싼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당히 서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로마 제국과 부패한 제사장 권력에 의해 끔찍한 수탈과 억압을 당하며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열심히 살아남으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라는 조금은 차갑고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도의 필수 덕목으로서 “자기 죽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회의와 허무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구마저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현실을 도피하는 자폐적인 경건 훈련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죽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첫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덜 사랑하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자기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은 ‘밀알 비유’의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명백히 대조되는 두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생명”과 “영생”입니다. 이 때 ‘생명’으로 옮긴 헬라어는 <프쉬케>(ψυχη)이고,  ‘영생’은 <조에>(ζωη)입니다. 이 두 단어가 가지는 보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헬라어 <프쉬케>는 이 땅에서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명을 뜻합니다. 반면에 <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곳에서 영원히 소유하는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프쉬케>와는 대조되는 하나님만의, 하나님 고유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를 토대로 25절 후반부를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한한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부활의 참 생명’<조에>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미워하는’으로 번역한 원문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덜 사랑한다.’입니다. 즉,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과 일상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의 유한한 생명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덜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 대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호흡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학생이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녀가 보다 더 공부에 매진하도록 여러모로 관심을 쏟는 것은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입시와 학벌이 결국 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깨닫지 못한 채, 정작 참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신앙교육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모습은 우리 마음을 무척 안타깝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불편을 피하기 위해 성실하게 일해 가능한 많은 돈을 벌어 재산을 모아두는 것 역시 유의미한 일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는 대신 돈의 정신에 지배당한 채, 황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헛된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지금껏 쌓아온 삶의 모든 성취를 결국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야 마는, 역사 속 몇몇 어른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쓰라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마땅히 덜 사랑해야 할 “이 땅 위의 생명”을 진정 사랑해야 할 “부활 생명”보다 더욱 사랑한 끝에 얻은 안타까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의 여러 욕망 자체는 충분히 긍정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 자녀들이 억지로 표백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더욱더 주님의 진정한 생명을 바라보며 욕망의 호흡을 덜어내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공에 흐트러지는 허무한 한숨이 아닌 만유를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옮기는 참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굳건히 다짐해야 합니다.

둘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는 자신들의 다신교와는 전혀 반대되는, 구약의 유일신 사상에 매료되어 개종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그중 일부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몇몇 제자를 통해 노력하였습니다. 주님 곁에는 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 분을 가까이 뵙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직접 찾아뵈려 하지 않고 제자들의 도움을 빌리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였을까요?

앞서 겪었던 뼈아픈 상처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매우 적었던,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으로서 온갖 손해와 어려움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며 차가운 모욕을 겪어왔습니다. 특히나, 멀리서 힘들게 찾아온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흔히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는 바깥마당에서 매번 출입 금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수치와 굴욕은 더욱 날카롭게 그들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 역시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해 굵은 경계선을 가지고 계실 거라 지레짐작하고 염려했습니다. 궁리 끝에 주님의 제자 중 그리스 문화와 언어에 가장 친숙한,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뵙고자 하는 그들의 부탁을 접하며 뜻밖에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 이야기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예수님은 당신 영광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수 차례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인들의 방문으로 마침내 주님의 참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9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주님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영광에 관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 줍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 주님의 영광은 결코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거나 혹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사모하고 그 영광을 온 세상에 비추려면, 우리 주위에 여러 기괴한 모양의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주변의 수많은 장벽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10년 전, “미생”이란 제목의 만화와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많은 화제와 인기를 불러 모았습니다.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때부터 프로바둑기사가 되려고 준비하며 남들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졸검정고시 출신에 아무런 경력도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장그래가 우여곡절 끝에 어느 대기업 무역회사 계약직 신입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맡은 업무를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곳곳에는 그가 단지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 동료 사원들에게 온갖 무시와 천대를 당하는 가슴 아픈 내용들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까닭은 우리 사회 안에 이런 ‘미생’들을 향한 차별이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학벌 외에도, 외모와 집안 배경, 재산과 직업 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며 편을 가르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배제와 혐오의 문화를 헤치고 나아가, 세상과 전혀 다른 따뜻한 시선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건네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유치한 조건과 얄팍한 모양새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향해 눈길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지으시고 우리 곁에 두신, 소중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철저히 거짓이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심각하게 갈라놓았던 모든 담과 벽을 무너뜨린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임을 믿는다면, 또한 주님의 찬란한 영광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포용하고 품는 것임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인 공교회라는 진리를 사도신경으로 가슴 깊이 고백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의 온갖 폭력과 억압의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임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큰 울림을 안겨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설교를 매듭지으려 합니다. 바로 선교사 “존 헤론”(John W. Heron)입니다. 그는 1883년 2월 미국 테네시대학 의학부를 역대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당연하게도 교수직을 비롯한 여러 안락하고 보장된 삶이 놓여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뜻밖에 다른 진로를 선택합니다. 그것은 그가 의대에 진학하며 품었던 꿈 그대로 의료선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헤론이 선교지로 택한 곳은 그 시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 땅 조선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그는 아버지의 반대와 약혼녀의 만류를 비롯한 많은 문제를 헤쳐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선교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도착은 알렌과 언더우드보다 늦었지만, 공식적인 제1호 조선 선교사로 가장 먼저 임명받았습니다. 그리고 1885년 6월 21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2년 뒤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인 “제중원”의 제2대 원장 겸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임명되었습니다.

불손한 생각이지만 여러분이 만약 이때 헤론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저라면 이제 한숨을 돌리고 마음 편히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여유롭게 살 것 같습니다. 그간 고생은 충분히 할 만큼 다 했습니다. 그 시대 서양인 눈으로 보기에 미개하기 이를 데 없는 멀고 먼 동양의 작은 나라에 찾아왔습니다. 거기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많은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앞으로 평생 존경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제부터 선교사로서 명예를 누리면서도 왕의 주치의라는 높은 지위를 이용해 편안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헤론은 그러지 않고 변함없이 크나큰 희생을 감수 하였습니다. 그는 부족한 약품과 일손에도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을 차별 없이 진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새벽부터 밀려오는 260명이 넘는 환자들을 하루 종일 정성스레 치료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왕진 가방을 들고 농어촌을 다니며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이렇듯 선교사 존 헤론은 많은 부와 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해 그 모두를 주저 없이 포기하였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을 일관되게 살아갔습니다. 마치, 땅속에 묻힌 한 알의 밀알처럼,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덜 사랑하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자기 죽음의 희생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에 별장을 지어놓고 장마철마다 더위와 전염병을 피해 함께 머무르며 휴식했습니다. 헤론이 조선에 도착한 후 5년이 지난 1890년 여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성안에 돌림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때 그가 조선 백성의 신음과 절규에 잠깐 눈과 귀를 닫고 쉼을 누린다고 해서 그를 꾸짖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헤론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먼 길을 오갔습니다. 그러다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과로한 끝에 그만 이질에 옮았습니다. 그리고 3주간을 심하게 앓다가 불과 만 34살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 중 최초의 순직(殉職)이었습니다.

그러자 고종 황제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헤론을 위해 성안에 묘지 조성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입니다. 그렇게 그는 죽었습니다. 자신에게 충분히 보장되었음에도 기꺼이 포기했던 성공한 의사로서의 돈과 명예와 함께 그리고 자신을 향한 수많은 이들의 아쉬움과 조롱 속에 그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희망 안에서 헤론의 위대한 헌신은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한국교회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김없이 되살아나 오늘날까지 계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승리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가 바로 그 놀라운 귀한 결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밀알 비유”는 단지 그들을 향한 하나의 명령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이후 골고다 언덕 위에서 당신께서 몸소 행하실 희생에 대한 엄중한 예언이자 사명의 확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허락하시려, 기꺼이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을 치열하게 끌어안으셨습니다. 철저히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 죽지만,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어서 죽는 기적, 그리하여 그토록 실랄하고 적나라하게 죽어서 눈부시게 다시 사는, 생명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따라 참으로 살기 위해 죽는, 더 나아가 살리기 위해 죽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삶을 한 알의 썩어져 가는 밀알로 드리기 원합니다. 저열한 욕망보다 부활 생명을 더욱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차별 없이 품고 섬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결실을 풍성히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내적이고 개인적 죽음과 외적이고 사회적 죽음이 교차하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참으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5년 8월 3일 일요일

미와십자가교회 주일예배

 


휴가를 맞아 미와십자가교회에서 예배드렸다.
문득, 이곳이 내게 '마음의 고향'이란 걸 느꼈다.

여러 불편과 어려움에도 진정한 자긍심으로 모인 건강한 교회와 예배의 힘을 새삼 발견한다.
오동섭 목사님 그리고 이 공동체와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배운 바대로, 가장 나 다운 자연스러운 목회로 보답할 수 있길 소망한다.

2025년 8월 2일 토요일

낸시 포브스, 배질 마혼 "패러데이와 맥스웰"(반니, 2015) 독서 후기



그동안 여름휴가 때마다 긴 호흡으로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학책을 골랐다. 지극히 문과 취향인 내 독서 이력에서 유별난 순간이다.
그만큼 한 인물의 극적인 삶과 인격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바로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다.
우연히 어느 과학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현재 출간된 책 중 패러데이를 가장 진지하게 다룬 "패러데이와 맥스웰"을 전자책으로 사두고 휴가 기간을 통해 읽었다.

패러데이는 빈민가 출신으로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대신 13살 때부터 제본소에서 다양한 책을 탐독했다.
그중에서도 과학책을 열심히 읽으며 과학 분야에 일하길 꿈꾸다 마침내 소망을 이루었다.
이런 그의 성장 과정은 과학자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안겨주었다.
그는 수학을 못 했기에 기존 과학자의 문법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핍을 강점으로 승화시켰다.
많은 독서를 통한 풍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뿌리 깊은 직관을 따라 철저한 실험적 검증으로 자기 입장을 드러냈다.
그 결과 어려움을 딛고, 마침내 '전자기 유도'를 발견한다.

패러데이의 위대함은 단지 자수성가한 과학자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따뜻하고 소박한 성품이다.
그는 돈과 명예 때문에 과학 연구를 등한히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지켰다. 
심지어 왕립 학술원 회장직도 거절했다.
그 대신 등대 관련 작업을 비롯해 공익적인 역할에 충실했다.
그럼에도 그는 "외로운 연구자"였다. 가까운 동료도 없었고 제자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결정적인 두 건의 연구 결과 발표 때마다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고난도 겪었다.
게다가 그가 이뤄낸 성과가 당대에는 완전히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친절과 선의를 지키며, 오랜 바람대로 "평범한 인간 마이클 패러데이"로 남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는 유언대로 "엄격하게 사적이고 간결하게" 거행되었다.

위대한 서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의 후계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의 등장이다.
그는 패러데이와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최고의 수학 교육을 받고 우수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패러데이와 마찬가지로 "행동거지에 허세가 없었다.", "언제나 남을 위하는 배려심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편안함"을 불어넣었다.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전자기학 연구에 감복해 그의 이론을 수학으로 정리하여 발전시켰다.
그 결과를 정리한 <<전기와 자기에 관한 논고>>는 뉴턴의 <<수학 원리>> 다음으로 중요한 과학서다.
이러한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업적은 고스란히 아인슈타인에게로 이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과학사의 중요한 흐름 하나를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사실 내용 절반 가까이는 제대로 이해 못 했다.
과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과학 이론과 실험을 설명하는 내용들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휴가 기간 내내 멈추지 않고 페이지를 넘길 수 있도록 나를 사로잡았던 힘이 있었다.
바로 두 사람의 너무나 매력적이고 닮고 싶은 인격이다. 놀랍도록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성이다.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진솔한 신앙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올바르고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 과학자의 모범을 일찌감치 보여주었다.
또한 과학을 대하는 신앙인의 바른 태도를 알려준다.
즉, 진지하게 과학을 탐구하고 그 성과를 존중하면서도 진리 앞에 겸손한 자세다.
이 둘의 태도만 살펴봐도 오늘날 신앙과 과학 사이의 유치하고 소모적인 논쟁 상당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해 휴가 기간 읽은 건 나름의 모험이었다.
상당한 분량의 과학책을 완독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만족스러운 내면의 포만감을 느꼈다.
생각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고 과학에 좀 더 흥미를 느꼈다.
무엇보다 여러모로 진지하게 닮고 싶은 인물들을 만났다.

역사 속에 별처럼 빛나는 인품과 과학 성과가 마주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은 그들의 과업이 자연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인간 지성의 이상향이 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탐구심, 객관성, 지구력뿐만 아니라 속세의 명성이나 허영에 현혹되지 않는 윤리적 성품까지도 갖춘 진리 탐구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신에 깃든 관용과 겸손은 과학자로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그들이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였기에 오늘날보다 이런 이상향에 접근하기 쉬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 과학은 더 쉬웠고, 신사다움은 더욱 중요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성품은 빛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위대함은 과학적 발견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성에서도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과학에도 영웅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 영웅이리라."
(리디북스 아이패드 어플 가로보기, 글자크기 8, 문단 너비3 기준, 1181~1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