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6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복음 12장 20~26절 “죽지 않는 죽음”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분주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모인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금 늦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독한 폭염의 끝자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많이 지치고 힘드시죠? 그런 까닭에 어쩌면 잠시 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봄이 있었습니다. 계절의 흐름 속에 봄이 떠나 여름이 찾아왔고, 머지않아 여름을 떠나보고 가을을 맞이할 겁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묘사한 시 한편을 소개 하고 싶습니다.
봄날 입하
- 이문재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여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다.
초록이 초록에게 져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실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네 번째 연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에게 여름이 찾아온 것은 봄의 죽음 덕분입니다. 봄이 죽은 척하지 않고, 죽은 흉내를 내지 않고, 실랄하고 적나라하게 죽어서 죽었습니다. 그 결과 여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한 여름의 작열하는 햇살은 비록 잠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과실을 영글게 하여 가을 수확을 이루는 생명의 기적을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참된 죽음과 생명이 가지는 역설적인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2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그 분 주위를 둘러싼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당히 서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로마 제국과 부패한 제사장 권력에 의해 끔찍한 수탈과 억압을 당하며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열심히 살아남으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라는 조금은 차갑고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도의 필수 덕목으로서 “자기 죽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회의와 허무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구마저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현실을 도피하는 자폐적인 경건 훈련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죽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첫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덜 사랑하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자기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은 ‘밀알 비유’의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명백히 대조되는 두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생명”과 “영생”입니다. 이 때 ‘생명’으로 옮긴 헬라어는 <프쉬케>(ψυχη)이고, ‘영생’은 <조에>(ζωη)입니다. 이 두 단어가 가지는 보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헬라어 <프쉬케>는 이 땅에서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명을 뜻합니다. 반면에 <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곳에서 영원히 소유하는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프쉬케>와는 대조되는 하나님만의, 하나님 고유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를 토대로 25절 후반부를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한한 생명’<프쉬케>을 미워하는 자는 ‘부활의 참 생명’<조에>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미워하는’으로 번역한 원문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덜 사랑한다.’입니다. 즉,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과 일상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의 유한한 생명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덜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 대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호흡하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학생이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녀가 보다 더 공부에 매진하도록 여러모로 관심을 쏟는 것은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입시와 학벌이 결국 덜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깨닫지 못한 채, 정작 참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신앙교육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모습은 우리 마음을 무척 안타깝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불편을 피하기 위해 성실하게 일해 가능한 많은 돈을 벌어 재산을 모아두는 것 역시 유의미한 일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는 대신 돈의 정신에 지배당한 채, 황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헛된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지금껏 쌓아온 삶의 모든 성취를 결국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야 마는, 역사 속 몇몇 어른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쓰라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마땅히 덜 사랑해야 할 “이 땅 위의 생명”을 진정 사랑해야 할 “부활 생명”보다 더욱 사랑한 끝에 얻은 안타까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의 여러 욕망 자체는 충분히 긍정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 자녀들이 억지로 표백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더욱더 주님의 진정한 생명을 바라보며 욕망의 호흡을 덜어내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공에 흐트러지는 허무한 한숨이 아닌 만유를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옮기는 참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굳건히 다짐해야 합니다.
둘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는 자신들의 다신교와는 전혀 반대되는, 구약의 유일신 사상에 매료되어 개종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그중 일부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몇몇 제자를 통해 노력하였습니다. 주님 곁에는 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 분을 가까이 뵙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직접 찾아뵈려 하지 않고 제자들의 도움을 빌리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였을까요?
앞서 겪었던 뼈아픈 상처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매우 적었던,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으로서 온갖 손해와 어려움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며 차가운 모욕을 겪어왔습니다. 특히나, 멀리서 힘들게 찾아온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흔히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는 바깥마당에서 매번 출입 금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수치와 굴욕은 더욱 날카롭게 그들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 역시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해 굵은 경계선을 가지고 계실 거라 지레짐작하고 염려했습니다. 궁리 끝에 주님의 제자 중 그리스 문화와 언어에 가장 친숙한,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뵙고자 하는 그들의 부탁을 접하며 뜻밖에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 이야기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예수님은 당신 영광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수 차례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인들의 방문으로 마침내 주님의 참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9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주님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영광에 관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 줍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 주님의 영광은 결코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거나 혹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사모하고 그 영광을 온 세상에 비추려면, 우리 주위에 여러 기괴한 모양의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주변의 수많은 장벽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10년 전, “미생”이란 제목의 만화와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많은 화제와 인기를 불러 모았습니다.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때부터 프로바둑기사가 되려고 준비하며 남들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졸검정고시 출신에 아무런 경력도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장그래가 우여곡절 끝에 어느 대기업 무역회사 계약직 신입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맡은 업무를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곳곳에는 그가 단지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 동료 사원들에게 온갖 무시와 천대를 당하는 가슴 아픈 내용들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까닭은 우리 사회 안에 이런 ‘미생’들을 향한 차별이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학벌 외에도, 외모와 집안 배경, 재산과 직업 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며 편을 가르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배제와 혐오의 문화를 헤치고 나아가, 세상과 전혀 다른 따뜻한 시선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건네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유치한 조건과 얄팍한 모양새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향해 눈길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지으시고 우리 곁에 두신, 소중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철저히 거짓이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심각하게 갈라놓았던 모든 담과 벽을 무너뜨린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임을 믿는다면, 또한 주님의 찬란한 영광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포용하고 품는 것임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인 공교회라는 진리를 사도신경으로 가슴 깊이 고백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의 온갖 폭력과 억압의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임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큰 울림을 안겨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설교를 매듭지으려 합니다. 바로 선교사 “존 헤론”(John W. Heron)입니다. 그는 1883년 2월 미국 테네시대학 의학부를 역대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당연하게도 교수직을 비롯한 여러 안락하고 보장된 삶이 놓여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뜻밖에 다른 진로를 선택합니다. 그것은 그가 의대에 진학하며 품었던 꿈 그대로 의료선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헤론이 선교지로 택한 곳은 그 시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 땅 조선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그는 아버지의 반대와 약혼녀의 만류를 비롯한 많은 문제를 헤쳐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선교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도착은 알렌과 언더우드보다 늦었지만, 공식적인 제1호 조선 선교사로 가장 먼저 임명받았습니다. 그리고 1885년 6월 21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2년 뒤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인 “제중원”의 제2대 원장 겸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임명되었습니다.
불손한 생각이지만 여러분이 만약 이때 헤론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저라면 이제 한숨을 돌리고 마음 편히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여유롭게 살 것 같습니다. 그간 고생은 충분히 할 만큼 다 했습니다. 그 시대 서양인 눈으로 보기에 미개하기 이를 데 없는 멀고 먼 동양의 작은 나라에 찾아왔습니다. 거기서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많은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앞으로 평생 존경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제부터 선교사로서 명예를 누리면서도 왕의 주치의라는 높은 지위를 이용해 편안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헤론은 그러지 않고 변함없이 크나큰 희생을 감수 하였습니다. 그는 부족한 약품과 일손에도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을 차별 없이 진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새벽부터 밀려오는 260명이 넘는 환자들을 하루 종일 정성스레 치료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왕진 가방을 들고 농어촌을 다니며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이렇듯 선교사 존 헤론은 많은 부와 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해 그 모두를 주저 없이 포기하였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을 일관되게 살아갔습니다. 마치, 땅속에 묻힌 한 알의 밀알처럼,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덜 사랑하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자기 죽음의 희생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은 남한산성에 별장을 지어놓고 장마철마다 더위와 전염병을 피해 함께 머무르며 휴식했습니다. 헤론이 조선에 도착한 후 5년이 지난 1890년 여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성안에 돌림병이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때 그가 조선 백성의 신음과 절규에 잠깐 눈과 귀를 닫고 쉼을 누린다고 해서 그를 꾸짖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헤론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먼 길을 오갔습니다. 그러다 그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과로한 끝에 그만 이질에 옮았습니다. 그리고 3주간을 심하게 앓다가 불과 만 34살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 중 최초의 순직(殉職)이었습니다.
그러자 고종 황제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헤론을 위해 성안에 묘지 조성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입니다. 그렇게 그는 죽었습니다. 자신에게 충분히 보장되었음에도 기꺼이 포기했던 성공한 의사로서의 돈과 명예와 함께 그리고 자신을 향한 수많은 이들의 아쉬움과 조롱 속에 그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희망 안에서 헤론의 위대한 헌신은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한국교회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어김없이 되살아나 오늘날까지 계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승리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가 바로 그 놀라운 귀한 결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밀알 비유”는 단지 그들을 향한 하나의 명령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이후 골고다 언덕 위에서 당신께서 몸소 행하실 희생에 대한 엄중한 예언이자 사명의 확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허락하시려, 기꺼이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을 치열하게 끌어안으셨습니다. 철저히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 죽지만,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죽어서 죽는 기적, 그리하여 그토록 실랄하고 적나라하게 죽어서 눈부시게 다시 사는, 생명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따라 참으로 살기 위해 죽는, 더 나아가 살리기 위해 죽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삶을 한 알의 썩어져 가는 밀알로 드리기 원합니다. 저열한 욕망보다 부활 생명을 더욱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차별 없이 품고 섬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결실을 풍성히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내적이고 개인적 죽음과 외적이고 사회적 죽음이 교차하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참으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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