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9일 토요일

시편 23편 “나의 목자이신 주님”

2025년 8월 8일, 승리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시편 23편 “나의 목자이신 주님”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찬송입니다. 시편에 담긴 찬송 150개 중에서도 단연 가장 널리, 많이 불린 찬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첫 구절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 주었습니다. 방황을 딛고 다시 일어날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서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편 23편 안에는 곱씹어 묵상하면 할수록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맑은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의 저자 다윗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목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치열한 일생을 통해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고백에 담긴 뜨거운 생명력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목동으로 지냈던 그의 유년 시절과 관련한 성경 속 두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는 사무엘과 이새의 대화입니다. 어느 날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순종해 뿔에 기름을 채워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이새로서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가 자기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손에 기름까지 들고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직감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새는 흥분한 목소리로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일곱 아들의 표정에도 기대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 모두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혹시 다른 아들이 있는지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난감해하며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실은 부르지 않은 막내가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삼상 16:11).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날 이새의 집에서 벌어진 상황과 연결시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다윗의 형들은 아버지의 호출에 즉각 응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애초에 부를 마음이 없었습니다. 혹시 생각이 바뀌어 부른다고 할지라도, 집으로 바로 달려올 수 없는 먼 곳에서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명확히 알게 됩니다. 다윗에게 ‘목동’은 소년 시절 맡았던 단순한 소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족에게 철저히 소외당하는 처지를 상징적으로 확연히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다윗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전할 매우 많은 양의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위험한 전쟁터로 향합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 장군을 보고 분개합니다. 자기가 저 괴물같은 골리앗과 맞서 싸우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울 왕은 그런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이때, 임금을 설득하는 다윗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 함께 읽겠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5).

이러한 다윗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양을 지켰던 곳, 목자로서 양 떼를 돌보았던 유다 광야는 한가로운 전원 목장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사자나 곰 같은 맹수가 출몰해 양은 물론이고 다윗의 목숨까지 위협했습니다. 

이때 다윗의 나이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3절을 보면, 다윗의 일곱 형 중에서 세 명이 입대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넷째 형부터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이입니다. 민수기 1장에 따르면 19살 이하입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본다면, 이때 다윗은 대략 십 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분명 어린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사울의 군복과 투구가 몸에 맞지 않은 미성년입니다. 맹수의 위협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광야로 양을 몰고 나가기에는 아직 어립니다. 어린 양이 목자의 보살핌을 받듯 여전히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런 막내 아들더러 돈 벌어 오라며 위험한 일터로 혼자 내보낼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부모의 관심에서 밀려난 채, 양 떼 사이에서 외로움에 사무쳐 두려움과 추위에 몸을 떨며 밤을 지새야 했습니다.

물론, 이 상황을 오늘날 청소년 인권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성장기를 묘사하는 성경의 태도는 일관됩니다. 부모에게 당한 철저한 배제와 소외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고백을 남겼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목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울에게 설명한 그의 일상을 다시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수시로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떼를 덮쳤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상황입니다. 본능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누구나 도망가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어린 청소년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양을 구하기 위해 맹렬히 맹수와 맞서 싸웠습니다. 이러한 날들을 보내면서 그는 참된 목자의 정체성을 내면 깊이 새겼습니다. 양 떼를 단지 재산으로 보거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성다해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양이 얼마나 약하고 우둔한지, 그런 양에게 목자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를 온 몸으로 깨달아 알았습니다. 선한 목자의 태도를 견고히 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험난한 시절을 거쳐 아름답게 성장한 다윗의 놀라운 신앙을 주목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그가 사울의 전속 악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탁월한 수금 연주자를 가까이 두고, 그가 들려주는 찬양을 통해 치유 받을 것을 권했습니다. 사울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온 나라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았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소년 다윗은 항상 손에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예배자입니다. 그런데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유다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저 멀리 어디선가 들리는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수한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움켜 쥐며 잠잠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황량한 광야 한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마치, 길 잃은 어린 양에게 목자가 지팡이를 내밀 듯, 다윗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사무엘상 16장 1절 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앞서 언급했던,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이 보셨다는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현재 폭정을 일삼는 사울이 아닙니다. 지금 기름 부어 훗날 새롭게 즉위할 다른 왕, 곧 다윗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왕을 ‘보았다’가 아니라 ‘볼 것이다’라는 미래 의미를 담은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경우 흔히 해당 동사를 히브리어 문법상 미완료형으로 적습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구약 원문은 이 단어를 보통, 과거 혹은 현재를 의미하는 완료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미래 사건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완료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켜 ‘예언적 완료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드러내는 구약성경의 엄중한 표현법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인간의 시간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주님의 눈길이 담겨 있습니다. 따뜻하게 양 떼를 보듬는 목자의 손길이 드러납니다. 앞서 보았듯 지금 다윗의 모습은 왕과 전혀 거리가 먼, 초라한 목동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다윗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이미 그는 한 왕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왕’이라는 특정 직분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지 주변 다른 나라 군주들처럼, 권력자로 세우려고 그에게 기름 붓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목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일깨우라고 그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 아닌 목자입니다. 자기 역시 양 떼의 일부임을 명심하며, 참 목자의 음성을 먼저 듣고 앞서 나아가 나머지 양들을 이끄는 존재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백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곧바로 왕좌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왕위로부터 한참 동안 먼 길을 돌았습니다. 10년 가까이 힘겨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하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던 시간입니다. 목동으로 보냈던 소년기 못지않게 어두운 나날이었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다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모든 시련을 통해 다윗은 목자이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지도자로 자라갔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 후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를 실현하며 메시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잘못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일과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군대로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린 사건입니다.

이 두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왕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휘둘렀던 통치행위입니다. 왕이 자기 눈에 들어온 여인을 마음대로 곁에 두는 사례는 역사책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심지어 왕가의 혈통을 늘리는 정당한 행동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백성 중 누구도 감히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벌인 짓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이 자국의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임금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군대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병사의 숫자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이 일을 엄중히 금하신 까닭은 분명합니다. 어느 순간 현실을 핑계로 하나님보다 창과 칼과 병거를 더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의 이 두 가지 죄악 즉, 밧세바를 아내로 삼은 것과 인구 조사를 한 것에 격노하신 핵심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어느새 권력에 취해 자기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잊고 백성을 충실히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극명하게 갈립니다. 사울은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를 끝내 외면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기필코 왕권을 잃지 않으려다 파국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그분 앞에서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주어진 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다윗의 말년을 기록합니다. 그는 몹시 늙어 이불을 덮어도 냉기를 느낄 정도로 기력이 쇠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가장 예쁜 처녀인 아비삭을 찾았습니다.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도록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노회한 정치인들의 교묘한 술책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건 아니어서, 노쇠한 임금이 죄의식을 갖지 않으면서도 좋아할 법한 묘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당사자인 아비삭의 처지는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예쁘다’라는 기준은 보편적이면서도 주관적입니다. 불의한 정치가 작용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따라서 밤마다 늙은 임금의 품에 안기는, 어린 처녀로서는 너무나 무섭고 수치스러운 역할을 고관대작의 여식에게 맡길 리가 없습니다. 아비삭은 이스라엘 변방지역인 수넴 출신으로서, 권력에 저항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마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왕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복잡한 정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편의를 위해 현실에 눈 감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고 위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열왕기상 1장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윗은 신하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하고 양 떼를 섬기는 소명을 한결같이 성찰한 결과입니다. 성경이 이 사건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기록해 들려준 이유입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기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세속 군주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지만, 하나님 앞에 기름 부음 받은 목자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비삭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아끼고 돌봐야 할 길 잃은 어린 양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다윗은 그런 고결한 신앙과 인격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가 시편 23편을 통해 찬양했듯 주님을 ‘나의 목자’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고백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굳게 붙잡았습니다.


시편 23편을 시작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훼 로이> 혹은 <아도나이 로이>입니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운문체의 특성을 따라, 다양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나를 양 돌보듯 돌보시는 분’이라는 서술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훼, 내 목자시여”라는 부르짖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 목자는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야훼시라”라는 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찬송에서 우리는 다윗이 지닌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새삼 발견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어린 양이라는 진리를 거듭 명심했습니다. 인생 길에 찾아오는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벗어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품었습니다. 자신의 삶 가운데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했습니다.

다윗은 이 찬송을 언제 지었을까요? 양 떼를 지키며 수금을 연주하던 소년 시절이었을지 모릅니다. 혹은 치열한 권력 투쟁을 이어가던 중년 시기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보며 회한에 잠긴 노년 때일지도 모릅니다. 모두 추측의 영역입니다. 다만 성경이 기록한 다윗의 생애를 통해 선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의 찬양과 고백 그대로, 그가 진심을 담아 부른 하나님의 이름처럼, 주님이 다윗의 신실한 목자가 되어 그의 삶 전체를 이끌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연히 다윗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모든 이를 향한 동일한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주님을 예배하며 오랫동안 이 노래를 함께 부른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목자이신 주님의 온전한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길 잃은 양 떼를 진실로 구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가며 당신이 참된 목자임을 생생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복음서의 두 장면이 있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6장 3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는 백성을 양 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 눈길은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소년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어린 시선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갈릴리 빈민들은 “목자 없는 양” 같았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종교 지도자들조차 기득권에 안주할 뿐 그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난과 억압으로 고통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체휼하는 공감입니다. 주님은 양 떼의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구약성경에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이 이미 다윗과 온 이스라엘의 신실한 목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의 지극한 사랑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그분이 주시는 진정한 희망과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이 반드시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돌아보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마음에 담고 시편 23편을 다시금 차근히 읽어보길 바랍니다. 천천히 소리 내 읊조리며 곱씹어보길 바랍니다. 이 위대한 찬송을 통해 갈수록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갈 희망을 깨닫습니다. 막막한 인생 여정에서 반가운 이정표를 발견하고 안심하며 걸어갈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복음을 깨닫고 누릴, 청초한 푸른 풀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새한글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혼잣말)
1 여호와가 나의 목자,
내게 모자람 없네.
2 푸른 풀밭에 나를 눕히시네.
물가 푹 쉴 곳으로 나를 데려가시네.
3 내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네.
나를 이끄시네, 의로운 길로,
여호와의 이름 위해서라네.

(기도)
4 캄캄한 골짜기를 가야 해도
나 잘못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니까요.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내게 힘 됩니다.
5 주님이 내 앞에 밥상을 차려 주십니다, 내 적들 맞은편에.
주님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어 주십니다.
내 잔이 넘쳐 납니다.

(혼잣말)
6 정말이야, 좋은 것과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따라다닐 거야, 나 사는 모든 날에!
나 여호와의 집에 머물고 싶어, 언제까지나!


기도 
저희 참 목자이신 주 하나님.
주께서 자녀들의 삶을 날마다 신실하게 이끄심을 고백합니다. 그 믿음을 담아 찬양 드렸던 다윗의 일생을 돌이켜봅니다. 부모에게조차 돌봄 받지 못했던 그의 외로운 소년 시절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목동으로 양 떼를 돌보며 신실하게 주님을 바라보았던 그의 놀라운 신앙을 되새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는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이 흩어진 양들의 목자로 이 땅에 오셨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선한 목자의 사랑을 부어주신 은혜를 높이 찬양합니다. 그 위대한 진리를 마음 깊이 깨닫길 원합니다.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항상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보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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