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7일 일요일

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

마침내 심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1절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1절 말씀에는 노아를 향한 주님의 명령과 평가가 담겨있습니다. 그의 온 가족이 이제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서 그의 의로움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읽은 6장에 이미 노아가 ‘의롭다’라는 소개를 발견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언급하십니다. 

성경 속 누구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극한의 찬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아가 완전무결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그의 한계 또한 명확히 보여줍니다. 관련하여 16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생명의 암, 수가 방주에 탔습니다. 이제 홍수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방주가 배로 기능하기 위해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지만 방주는 수많은 동물을 태울 만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입니다. 그 배의 문 또한 분명 매우 컸을 겁니다. 사람 손으로 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은 자동기술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들여보내시고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노아는 비록 의인이나 철저히 무력한 인간이었음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을 보시고 심판을 결정하시고 그 가운데 노아를 택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창세기는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주’의 특성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저께 6장을 설교하며 언급했습니다. 방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바’는 ‘상자’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아기 모세를 넣은 ‘갈대 상자’ 또한 ‘테바’입니다. 한마디로 노아의 방주는 거대한 상자입니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와 전혀 다릅니다. 엄밀히 말해 배 아닌 배입니다. 방향키를 조절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속도를 더하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저 물결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흐름에 맡길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있으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루하루 맡겨진 소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 전체의 진로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뜻, 내 욕심, 내 타이밍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몸소 안전하게 배의 문을 닫으십니다. 신실하신 은혜 가운데 가장 합당한 때에 합당한 곳으로 물결을 일으켜 주십니다.

이처럼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오늘 하루도 마음 깊이 품으며 신뢰와 용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저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며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동시에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배를 물 위에 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인생의 항해를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어리석은 욕심과 감정을 고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한 순종으로 방주에 올라 물결에 몸을 맡기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마주해야 할 이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전하며, 오늘 감당할 일들에 지혜의 빛깔을 더하길 소망합니다. 저마다 근심하며 부르짖는 신음에 응답하시고, 가정마다 평강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서울: 크리쿰북스, 2017) 69~71쪽.


2025년 12월 6일 토요일

창세기 6장 "생명을 보존하라"

2025년 12월 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6장 "생명을 보존하라"

세상이 죄로 인해 타락한 후 하나님의 본격적인 구원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를 위해 부름 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9절에 보면 그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성경 속 가장 눈부신 인물 묘사입니다. 노아와 견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면 마땅히 노아와 같은 찬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이라는 칭찬의 배경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히’ 행하고자 하는 생생한 현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1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썩었습니다. 그 결과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의 일상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이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노아는 홀로 고고하게 살며 주님께 예쁨 받은 게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겪었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사람을 세상이 그냥 둘 리 없습니다. 분명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통과했던 시련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의 삶이 그를 둘러싼 세상과 선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아에게 주님께서 소중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19~20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원문에는 ‘상자’라는 뜻입니다. 상자처럼 네모난 배를 만들어 모든 생물을 각각 암수 한 쌍씩 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심판 가운데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노아는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세 아들과 함께 산 위에서 거대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분명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고초를 겪었을겁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의인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포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지닌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고되고 어려운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코 허무하게 우리를 삼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진실로 동행하며 의롭게 되는 과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는 곧 ‘의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역시 노아와 같습니다. 완전무결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죄와 허물이 있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각자의 헌신과 순종으로 저마다의 방주를 만드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에서 복음과 진리를 지킬 내면의 공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또한 섬김과 희생의 손길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건네시길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포악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패한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이 시대의 노아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붙잡고 주님의 생명을 전하며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5일 금요일

창세기 5장, "동행과 위로"

2025년 12월 5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5장, "동행과 위로"

창세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족보’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족보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족보는 단순한 연대기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담은 또 다른 계시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5장은 아담과 그의 아들 ‘셋’의 계보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것은 명확히 바로 앞에 있는 4장 16절 이하에 기록된 ‘가인의 족보’와 대조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가인의 자손 중에 야발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입니다. 비록 가인은 범죄자였으나 그의 후손들은 화려한 문명과 문화를 꽃 피우는, 강력한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동시에 가인의 족보에는 음산한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후손 라멕이 한 말을 굳이 함께 담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들을 향해 이렇게 으스대며 말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는 살인자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살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가인의 자손들이 이룬 찬란한 업적 이면에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반면 아벨이 죽고 난 후 아담과 하와가 낳은 셋의 후손들에게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살고 죽었다’라는 일상적 언급만 반복될 뿐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처럼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루었다는 사실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에녹과 노아입니다.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다른 사람은 모두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었는데 에녹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라고 언급합니다. 이를 두고 에녹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말도 죽음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에녹 승천의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그의 삶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언급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가인의 후손 중에 살인을 자랑한 라멕과 이름이 같은, 셋의 후손 중 또 다른 라멕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입니다. 그런데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을 그가 덧붙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에서 힘들게 일하는 백성에 대한 위로입니다.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위안입니다.

이처럼 아담의 족보에 등장하는 두 사람, 에녹과 노아를 통해 가인의 후손들과 정반대의 특성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 그리고 위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비교할 때 우리가 이룬 것이 초라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고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더욱더 화려한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그런 현실에 너무나 답답하고 힘겨운 순간이 수시로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묵묵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로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초라하고 별 볼일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든 여정을 기뻐 받으시어 온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고난이 참혹할수록 부활의 영광은 더없이 찬란하다는 복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가슴 깊이 품고 더욱더 주님과 발걸음을 맞추고 위로를 전하며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위로의 주 하나님
가인의 후손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악한 이들의 폭력이 기세 등등하고 그들이 거둔 화려한 업적과 승리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과 동행하며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저희 삶을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묵묵히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3일 수요일

창세기 4장 "죄의 파장"

2025년 12월 4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4장 "죄의 파장"

이 새벽, 주님의 포근한 은혜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어제 읽은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죄와 그 결과를 기록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사랑으로 옷을 입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비극은 멈추지 않습니다. 죄가 지닌 파괴력은 계속 내달립니다. 창세기 4장은 성경이 기록한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보여줍니다. 아끼고 돌봐야 할 동생을 형이 시기하고 분노한 나머지 쳐 죽였습니다. 살인자 가인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죄가 얼마나 사람의 양심을 병들고 어둡게 하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과 정반대 행동을 합니다. 적어도 아담은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죄를 낱낱이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완악하게 행동합니다. 자기가 숨을 끊었음에도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고 뻔뻔하게 되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이 인상적입니다. 10~11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가인은 자기가 저지른 살인을 완전 범죄라고 여겼습니다. 아무도 자기 행동을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매우 중요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성경은 피를 의인화 합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참하게 희생당한 핏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살인에 이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서러운 피를 흘리며 살아갑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폭력과 압력에 시달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아십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상처와 억압에 함께 하시고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제 읽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하여 부끄러움에 눈을 뜬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께 받은 징벌을 감당하기 벅차 했습니다. 크나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 가인의 저지른 죄에 분노하고 그를 심판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저주 아래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보호하는 표를 주셨습니다. 어제 말씀대로 창세기를 비롯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랑의 패턴입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여기서도 발견합니다.

그 사랑이 또한 우리에게도 향해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억울한 눈물에 함께 신음하시는 하나님, 때로 꾸짖으시나 끝까지 사랑으로 돌보시는 주님의 넓은 품에 안겨 살아가는 오늘 하루 보내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주 하나님
동생의 피를 흘렸음에도 뻔뻔하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되묻는 가인의 모습에게서 죄의 막강한 파괴력을 실감합니다.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를 다스리는, 정결한 삶을 살아갈 힘을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가 흘리는 모든 피와 눈물의 호소를 주님께서 듣고 계심을 믿고 기도 가운데 아픔을 토로하며 새 힘을 얻길 구합니다. 끝까지 죄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넒은 품에 안기며 그 놀라운 사랑을 닮고 전하는 오늘 하루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2일 화요일

창세기 3장, 하나님이 입히시다

2025년 12월 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창세기 3장, 하나님이 입히시다

갈수록 추워지는 겨울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성도님들 가정과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찬란하고 눈부신 이야기를 지나 이제 어두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해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을 확인합니다. 죄라는 것은 단지 특정 행동을 했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관계의 파괴’를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뱀으로 나타난 악한 피조물의 꾀임에 넘어가 주님이 금지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행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과 친밀한 사귐이 무너지고 홀로 음침한 곳에 숨어있는 그의 상태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두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냅니다. 너무나 절망스러운 형벌입니다. 이 이상의 비극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눈부시게 위대한 사랑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옷이 왜 필요 했을까요? 죄를 짓고 부끄러움에 눈을 떠 몸을 가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이 저지른 허물을 몸소 덮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그 옷은 가죽 옷입니다. 어느 동물의 희생으로 생긴 옷감입니다.

이 짧은 장면에서 성경 전체에 반복되며 흐르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엄하게 심판하시면서도 동시에 위대한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의 피를 흘립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제가 전에 섬겼던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담임 목사님은 신약학자이기도 하십니다. 그분께서 쓰신 “다시 만나는 교회”를 오늘부터 수요기도회 시간에 나누려고 합니다. 이 책에서 박 목사님이 쓴 인상 깊은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이란 내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나 연약하고 어리석어 진리에서 벗어나 거짓에 속아 죄를 짓습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오류도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강박적이고 부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디 오늘 함께 읽은 통해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존재 자체를 품어 안으십니다. 이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영혼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받은 사랑에서 전하는 사랑으로, 감싸 안기는 인생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끌어 안는 인생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 사랑의 주 하나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통해 모든 사람이 짊어진 죄와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대신 거짓의 꾀임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정결히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동시에 저희의 모든 한계와 결핍을 온전히 품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기꺼이 안기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지치고 상한 이들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에게서 벗어나 이웃과 세계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숱한 상처와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