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9일 화요일

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2025년 12월 1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하루도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철저히 망가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읽은 창세기 이야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 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 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 그와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셈과 야벳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우 없이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아가 겪어온 고통 어린 순간들을 말없이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품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받아 오늘 하루도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위대한 용서와 속죄의 주 하나님.
깊은 상심과 좌절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노아를 향한 아들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함에게서 저희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합니다. 
저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연약함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때로 삶에 지쳐 무너진 저희의 전 존재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8일 월요일

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

2025년 12월 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

우리를 항상 기억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온 땅을 덮는 홍수가 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매우 중요한 동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1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하나님은 온 땅에 가득한 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얼핏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저 분노하고 심판만 하는 존재라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물로 쓸어버린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주님의 성품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방주 안에서 무려 1년을 보낸 당신의 의인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함께 있는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한글 어순을 살려서 ‘기억하사’가 1절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원문을 그렇지 않습니다. 1절 초반부를 직역하면 ‘그리고 기억하다.’입니다. 바로 앞절인 7장 24절은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온 땅에 물이 넘치자 마자 주님은 곧바로 먼저 기억하셨습니다. 방주에 태운 피조물들을 즉시 기억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아실겁니다. 그런데 그 못지 않게 다음절인 1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과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시는 구원에 참여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방주 안에서 기약 없이 물 위에 떠도는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셨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마침내 땅이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드디어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때 노아가 행한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 즉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안에 들어온 사람들,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마땅한 반응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행동이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곧 기억의 순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들과 같습니다. 인생 여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때때로 노아가 맡았던 습한 바다 내음과 노아가 들었던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헤아리시고 마침내 방주를 멈추고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품고 곱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주일 예배를 더욱 소중히 드리고, 또한 일상 가운데 예배의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기도
크고 넓으신 사랑의 주 하나님
방주 안에서 1년간 정처 없이 떠돈 노아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억하신 주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의 여러 아픔과 고난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간절히 구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보이실 구원을 기대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기억하는 주일 예배와 일상의 예배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룻기 4장 13~22절 "핵심 가치1: 일상 – 일상을 살다가"

2025년 12월 7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4장 13~22절 "핵심 가치1: 일상 – 일상을 살다가"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어색하시죠? 지난 32년간 신실하게 섬기신 류인원 원로목사님의 뒤를 이어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이루고 싶은 목회 철학은 크게 세 가지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일상’, ‘여백’, ‘하나님 나라’입니다. 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 여백에 스미는 하나님 나라” 오늘부터 3주간 이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성경에 근거해 함께 나누겠습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건강하고 균형있는 교회를 향한 꿈이 정배교회 안에 깊은 울림으로 서로 공명을 이루길 소망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산은 어느 공동체나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특히 베들레헴과 같은, 농경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은 뭔가 의아합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 오벳을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일반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해당 원문은 이 아기에 대한, 나오미의 상당한 권리을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절입니다. 이웃 여인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오벳에게 나오미는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14절 말씀과 같이 오벳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척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데로 단순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룻기 이야기 전체를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합니다. 그 시작은 무척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기근이 몰아닥쳐 극심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고심 끝에 이방 땅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나오미는 그곳에서 극한 역경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로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입니다.

이제 그녀 곁에는 자기처럼 과부가 된 며느리 둘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아득한 절망에 빠집니다. 하물며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너무나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오미는 과감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대신 모압 출신 두 며느리에게 고향에 남으라고 말합니다. 젊은 그들에게 자신이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모압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와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절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무언가가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안전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고향에 남아 자기 삶을 지탱해 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입니다.


마침내 룻은 낯선 땅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이삭을 주었습니다. 끼니를 잇기 위해 추수하는 들녘으로 찾아갔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곡식을 모두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해 반드시 일부를 남겨 놓았습니다. 룻은 생명의 말씀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조금씩 발견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황량한 삶의 자리에서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보아스는 마침 룻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를 반갑게 알아보았습니다. 나오미를 위한 룻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룻은 집으로 돌아와 그날 들판에서 겪었던 일들을 시어머니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을 레위기 25장 속 희년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년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자신의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혈육을 가리켜 개역 개정 성경은 “기업 무를 자”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고엘>입니다. 이 단어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훨씬 더 입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고엘’에게 철저한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습니다. 더구나 룻기에서 고엘 제도는, 신명기 25장에 기록된 ‘형사취수혼’ 즉,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거두어 삶을 돌보는 제도 결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그 결과 도움이 필요한 친척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경우, 출산과 양육의 책임까지 떠맡게 됩니다. 본문 앞에 등장하는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주저 없이 포기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놀랍게도 그 무거운 의무를 기꺼이 수행했습니다. 성문 앞에 마을 장로 열 명을 모셔 공식적인 절차까지 번거롭게 밟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기 오벳은 그녀에게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기 오벳은 단순히 룻과 보아스가 빚어낸 평범한 사랑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룻의 헌신과 보아스의 섬김이 만나 이루어진 참으로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두 사람은 자기 곁에 있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고 돌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은 마치 자기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본문 14, 15절 말씀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여자들이 나오미에게 말했다. “찬양받으실 만합니다, 여호와는! 오늘 남편 집안을 살려 낼 사람이 그대에게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이가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떨치기 바랍니다. 15 그가 그대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고, 노년의 그대를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며느리가 이 아이를 낳았으니까요. 그대의 며느리는 그대에게 일곱 아들보다 더 낫습니다.” 

이처럼 룻기는 성경 전체에도 단연 눈에 띄는,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룻기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이것이 바로 룻기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룻기는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간난 아기는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이자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여기에 룻기의 핵심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의 족보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이름을 굳이 한 번 더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합니다. 본문 18~2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베레스의 계보(히, 톨르도트)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따라서 18절에 등장하는 ‘계보’는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족보가 곳곳에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톨르도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톨르도트’를 룻기는 매우 독특하게 적었습니다. 성경 속 다른 본문에 등장하는 톨르도트와 발음은 같지만 표기법이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은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처음 족보가 등장하는 창세기 2장 4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
(תּוֹלְדוֹת)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세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1장 2절에서 2장 3절까지, 일곱 날에 걸친 창조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문학은 중요한 주제일수록 같은 내용을 변형해서 반복하는 독특한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른 관점에서 2장 4절부터 서술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야기에 주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 사람과 맺은 언약, 그리고 그들의 죄악과 구원을 묘사합니다. 즉, ‘언약’, ‘범죄’, ‘사랑’이라는 창세기의 핵심 신학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내용을 시작하며 창세기는 그 ‘내력’을 뜻하는 ‘톨르도트’를 같은 창세기 속 다른 톨르토트와 다르게 알파벳 하나를 더 추가해 적어 구별하였습니다. 

다시 룻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을 끝맺으며 베레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른 구약 본문들처럼 평범하게 표기해도 내용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룻기는 본문 외에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만 나오는 창세기 2장 4절 속 톨르도트의 표기법을 굳이 가져다 썼습니다. 그러면서 베레스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기록하며 룻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드러내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어휘사용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바로 창조신앙과의 연결입니다. 룻기는 아담의 죄를 해결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룻기가 가진 막중한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소박한 동화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과 구원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복음의 주인공으로 룻과 보아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룻과 보아스가 거둔 모두가 두 사람이 커다란 야망을 품고 애써 노력한 결과일까요? 자기 이름을 드높이고자 치밀하게 계획하여, 이를 앙다물고 맹렬히 달려간 끝에 얻은 결실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그 가냘픈 어깨에 무거운 봇짐을 짊어졌을 때,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뿌연 모래 먼지 사이를 헤치고 마침내 낯선 땅 베들레헴에 겨우 도착했을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거친 농사꾼들 사이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나가 떨리는 손으로 이삭을 주었을 때,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 위대한 희생이 기록되어 수 천 년 동안이나 전해져 내려올 것을 과연 그녀가 알고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자신의 보리밭 한쪽에서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애처롭게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며 따로 먹을 것을 챙겨 주었을 때, 성문 앞에서 의아해하는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조상으로 성경에 족보가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릴 걸 그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묵묵히 섬겼을 뿐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험난한 위험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상을 믿음으로 담담하게 이어갔습니다. 그런 그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더없이 눈부시게 찬란한 구원의 여정이 온 우주 가운데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순종은 굉장히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에 가까운 금욕과 가학적인 자기 절제를 바라시지도, 결벽적인 도덕성을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펼쳐진 이야기처럼, 날마다 우리 눈앞에 놓인 일상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십니다.


몇 년 전, 진료 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거둔 임세원 교수님을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뉴스를 듣고 마음이 아파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과거에 우울증에 걸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정신건강전문의’, 이 끔찍한 삶의 모순이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의 아픔을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진솔한 고백이 담긴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입니다. 이 중에서 오랫동안 저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출구가 없는 답답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바꿔 말해 희망을 상실하고 우울해진 사람들은 일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중단한다. 일상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이런 절박한 상황에 내가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취미생활을 끊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 즉 삶 그 자체마저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상황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드는 요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비관적으로 느끼고 자신의 일상 여러 부분을 하나씩 그만두는 과정 자체가 우울감을 더 악화시킨다. 

우리 삶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천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단언컨대, 현실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는 지독하게 운 나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보통 사람의 정신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적당한 수준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긍정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중략) 일상에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활동들, 이를테면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떨기 
동료들과 점심으로 특별한 음식 먹어보기
애완견과 공원 산책하기 
좋아하는 스포츠 팀 경기를 보며 응원하기 
밤 9시, 치킨을 배달시켜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며 먹기   

좋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곧 행복이라는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모여 행복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中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보다 일상을 일구고 가꾸고 지켜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누가 봐도 화려한 업적이나 성과 혹은 극적인 체험이나 간증보다는, 뻔한 매일 삶 속에 생명력 있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초라하고 비참하고 눈물겨운 나날이야말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나자신의 처절한 한계와 결핍과 마주하는 하루하루야말로, 복음을 깨달아 누리고 실천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더 없이 드높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을수록 우리의 발은 더욱더 굳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비장하게 움켜쥔 주먹을 내려놓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일상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그림을 완성한다는 진리를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룻의 평범한 아들로 그치지 않고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거듭 강조하며 분명히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그 후 약 천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생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기를 둘러싼 상황은 뭔가 기이합니다. 탁월한 학식과 지혜를 가진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대받던 목자들 역시 그 아기에게 찾아와 찬송하였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들이 온 우주를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드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공포에 빠진 왕궁이 그 아기로 말미암아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삶의 시작부터, 인생의 모든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부활 하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룻기를 거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심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내 일상의 주인으로 모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행하시고 룻기가 알려주듯이 날마다 일상을 일구어 가며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전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러한 ‘일상’이 바로 제가 정배교회 담임 목사로서 지향하는 첫 번째 핵심 가치입니다. 이단의 선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일상을 파괴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건강한 복음 공동체는 정반대입니다. 가정과 일터를 비롯한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교회 안의 종교생활만이 아닌 교회 밖에서 땀 흘려 부대끼는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성도 간의 교제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도 진지하게 사귐과 대화를 나눕니다. 교회의 외형에만 집착하지 않고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소통합니다.

이처럼 일상을 건강하게 가꾸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교회를 이루기 위해 우리 함께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그 꿈을 마음 깊이 품고 그 어떤 시련에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사사시대와 같은 숱한 위기와 혼란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룻과 보아스가 그러했듯이 진리를 따라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길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정배교회가 성도와 이웃의 일상을 존귀히 여기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평범한 하루하루에 담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헤아리며 일상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을 넘어 일상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7일 일요일

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7장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

마침내 심판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1절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1절 말씀에는 노아를 향한 주님의 명령과 평가가 담겨있습니다. 그의 온 가족이 이제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서 그의 의로움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저께 읽은 6장에 이미 노아가 ‘의롭다’라는 소개를 발견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언급하십니다. 

성경 속 누구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극한의 찬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아가 완전무결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그의 한계 또한 명확히 보여줍니다. 관련하여 16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생명의 암, 수가 방주에 탔습니다. 이제 홍수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방주가 배로 기능하기 위해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지만 방주는 수많은 동물을 태울 만큼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입니다. 그 배의 문 또한 분명 매우 컸을 겁니다. 사람 손으로 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오늘날과 같은 자동기술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들여보내시고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노아는 비록 의인이나 철저히 무력한 인간이었음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을 보시고 심판을 결정하시고 그 가운데 노아를 택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창세기는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주’의 특성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저께 6장을 설교하며 언급했습니다. 방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테바’는 ‘상자’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아기 모세를 넣은 ‘갈대 상자’ 또한 ‘테바’입니다. 한마디로 노아의 방주는 거대한 상자입니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와 전혀 다릅니다. 엄밀히 말해 배 아닌 배입니다. 방향키를 조절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속도를 더하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그저 물결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흐름에 맡길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있으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하루하루 맡겨진 소임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생 전체의 진로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뜻, 내 욕심, 내 타이밍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몸소 안전하게 배의 문을 닫으십니다. 신실하신 은혜 가운데 가장 합당한 때에 합당한 곳으로 물결을 일으켜 주십니다.

이처럼 선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오늘 하루도 마음 깊이 품으며 신뢰와 용기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저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며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동시에 방주의 문을 닫으시고 배를 물 위에 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인생의 항해를 하나님께서 이끄심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어리석은 욕심과 감정을 고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대한 순종으로 방주에 올라 물결에 몸을 맡기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마주해야 할 이들에게 복음의 향기를 전하며, 오늘 감당할 일들에 지혜의 빛깔을 더하길 소망합니다. 저마다 근심하며 부르짖는 신음에 응답하시고, 가정마다 평강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서울: 크리쿰북스, 2017) 69~71쪽.


2025년 12월 6일 토요일

창세기 6장 "생명을 보존하라"

2025년 12월 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6장 "생명을 보존하라"

세상이 죄로 인해 타락한 후 하나님의 본격적인 구원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를 위해 부름 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9절에 보면 그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성경 속 가장 눈부신 인물 묘사입니다. 노아와 견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면 마땅히 노아와 같은 찬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이라는 칭찬의 배경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히’ 행하고자 하는 생생한 현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11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썩었습니다. 그 결과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인 노아의 일상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이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노아는 홀로 고고하게 살며 주님께 예쁨 받은 게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겪었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사람을 세상이 그냥 둘 리 없습니다. 분명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통과했던 시련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그의 삶이 그를 둘러싼 세상과 선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아에게 주님께서 소중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19~20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원문에는 ‘상자’라는 뜻입니다. 상자처럼 네모난 배를 만들어 모든 생물을 각각 암수 한 쌍씩 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심판 가운데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노아는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세 아들과 함께 산 위에서 거대한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분명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고초를 겪었을겁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의인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포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지닌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고되고 어려운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코 허무하게 우리를 삼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진실로 동행하며 의롭게 되는 과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는 곧 ‘의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역시 노아와 같습니다. 완전무결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죄와 허물이 있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각자의 헌신과 순종으로 저마다의 방주를 만드시길 축복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에서 복음과 진리를 지킬 내면의 공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또한 섬김과 희생의 손길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건네시길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포악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패한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이 시대의 노아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붙잡고 주님의 생명을 전하며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