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8일 월요일

룻기 4장 13~22절 "핵심 가치1: 일상 – 일상을 살다가"

2025년 12월 7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4장 13~22절 "핵심 가치1: 일상 – 일상을 살다가"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어색하시죠? 지난 32년간 신실하게 섬기신 류인원 원로목사님의 뒤를 이어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이루고 싶은 목회 철학은 크게 세 가지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일상’, ‘여백’, ‘하나님 나라’입니다. 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 여백에 스미는 하나님 나라” 오늘부터 3주간 이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성경에 근거해 함께 나누겠습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건강하고 균형있는 교회를 향한 꿈이 정배교회 안에 깊은 울림으로 서로 공명을 이루길 소망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산은 어느 공동체나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특히 베들레헴과 같은, 농경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은 뭔가 의아합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 오벳을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일반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해당 원문은 이 아기에 대한, 나오미의 상당한 권리을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절입니다. 이웃 여인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오벳에게 나오미는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14절 말씀과 같이 오벳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척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데로 단순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룻기 이야기 전체를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합니다. 그 시작은 무척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기근이 몰아닥쳐 극심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고심 끝에 이방 땅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나오미는 그곳에서 극한 역경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로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입니다.

이제 그녀 곁에는 자기처럼 과부가 된 며느리 둘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아득한 절망에 빠집니다. 하물며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너무나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오미는 과감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대신 모압 출신 두 며느리에게 고향에 남으라고 말합니다. 젊은 그들에게 자신이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모압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와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절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무언가가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안전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고향에 남아 자기 삶을 지탱해 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입니다.


마침내 룻은 낯선 땅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이삭을 주었습니다. 끼니를 잇기 위해 추수하는 들녘으로 찾아갔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곡식을 모두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해 반드시 일부를 남겨 놓았습니다. 룻은 생명의 말씀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조금씩 발견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황량한 삶의 자리에서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보아스는 마침 룻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를 반갑게 알아보았습니다. 나오미를 위한 룻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룻은 집으로 돌아와 그날 들판에서 겪었던 일들을 시어머니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을 레위기 25장 속 희년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년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자신의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혈육을 가리켜 개역 개정 성경은 “기업 무를 자”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고엘>입니다. 이 단어는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훨씬 더 입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고엘’에게 철저한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습니다. 더구나 룻기에서 고엘 제도는, 신명기 25장에 기록된 ‘형사취수혼’ 즉,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거두어 삶을 돌보는 제도 결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그 결과 도움이 필요한 친척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경우, 출산과 양육의 책임까지 떠맡게 됩니다. 본문 앞에 등장하는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주저 없이 포기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놀랍게도 그 무거운 의무를 기꺼이 수행했습니다. 성문 앞에 마을 장로 열 명을 모셔 공식적인 절차까지 번거롭게 밟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기 오벳은 그녀에게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기 오벳은 단순히 룻과 보아스가 빚어낸 평범한 사랑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룻의 헌신과 보아스의 섬김이 만나 이루어진 참으로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두 사람은 자기 곁에 있는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고 돌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은 마치 자기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본문 14, 15절 말씀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여자들이 나오미에게 말했다. “찬양받으실 만합니다, 여호와는! 오늘 남편 집안을 살려 낼 사람이 그대에게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그 아이가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떨치기 바랍니다. 15 그가 그대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고, 노년의 그대를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며느리가 이 아이를 낳았으니까요. 그대의 며느리는 그대에게 일곱 아들보다 더 낫습니다.” 

이처럼 룻기는 성경 전체에도 단연 눈에 띄는,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룻기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이것이 바로 룻기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룻기는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간난 아기는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이자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여기에 룻기의 핵심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의 족보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이름을 굳이 한 번 더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합니다. 본문 18~2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베레스의 계보(히, 톨르도트)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따라서 18절에 등장하는 ‘계보’는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족보가 곳곳에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톨르도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톨르도트’를 룻기는 매우 독특하게 적었습니다. 성경 속 다른 본문에 등장하는 톨르도트와 발음은 같지만 표기법이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은 단어가, 성경에서 가장 처음 족보가 등장하는 창세기 2장 4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
(תּוֹלְדוֹת)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세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1장 2절에서 2장 3절까지, 일곱 날에 걸친 창조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문학은 중요한 주제일수록 같은 내용을 변형해서 반복하는 독특한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른 관점에서 2장 4절부터 서술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야기에 주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 사람과 맺은 언약, 그리고 그들의 죄악과 구원을 묘사합니다. 즉, ‘언약’, ‘범죄’, ‘사랑’이라는 창세기의 핵심 신학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내용을 시작하며 창세기는 그 ‘내력’을 뜻하는 ‘톨르도트’를 같은 창세기 속 다른 톨르토트와 다르게 알파벳 하나를 더 추가해 적어 구별하였습니다. 

다시 룻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을 끝맺으며 베레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른 구약 본문들처럼 평범하게 표기해도 내용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룻기는 본문 외에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만 나오는 창세기 2장 4절 속 톨르도트의 표기법을 굳이 가져다 썼습니다. 그러면서 베레스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기록하며 룻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드러내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어휘사용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바로 창조신앙과의 연결입니다. 룻기는 아담의 죄를 해결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를 통해 룻기가 가진 막중한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소박한 동화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과 구원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복음의 주인공으로 룻과 보아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룻과 보아스가 거둔 모두가 두 사람이 커다란 야망을 품고 애써 노력한 결과일까요? 자기 이름을 드높이고자 치밀하게 계획하여, 이를 앙다물고 맹렬히 달려간 끝에 얻은 결실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그 가냘픈 어깨에 무거운 봇짐을 짊어졌을 때,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뿌연 모래 먼지 사이를 헤치고 마침내 낯선 땅 베들레헴에 겨우 도착했을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거친 농사꾼들 사이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나가 떨리는 손으로 이삭을 주었을 때,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 위대한 희생이 기록되어 수 천 년 동안이나 전해져 내려올 것을 과연 그녀가 알고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자신의 보리밭 한쪽에서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애처롭게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며 따로 먹을 것을 챙겨 주었을 때, 성문 앞에서 의아해하는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조상으로 성경에 족보가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릴 걸 그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묵묵히 섬겼을 뿐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험난한 위험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상을 믿음으로 담담하게 이어갔습니다. 그런 그들의 소박한 일상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더없이 눈부시게 찬란한 구원의 여정이 온 우주 가운데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순종은 굉장히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에 가까운 금욕과 가학적인 자기 절제를 바라시지도, 결벽적인 도덕성을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펼쳐진 이야기처럼, 날마다 우리 눈앞에 놓인 일상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십니다.


몇 년 전, 진료 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거둔 임세원 교수님을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뉴스를 듣고 마음이 아파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과거에 우울증에 걸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정신건강전문의’, 이 끔찍한 삶의 모순이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의 아픔을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진솔한 고백이 담긴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입니다. 이 중에서 오랫동안 저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출구가 없는 답답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바꿔 말해 희망을 상실하고 우울해진 사람들은 일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중단한다. 일상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이런 절박한 상황에 내가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취미생활을 끊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 즉 삶 그 자체마저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상황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드는 요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비관적으로 느끼고 자신의 일상 여러 부분을 하나씩 그만두는 과정 자체가 우울감을 더 악화시킨다. 

우리 삶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천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단언컨대, 현실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는 지독하게 운 나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보통 사람의 정신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적당한 수준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긍정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중략) 일상에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활동들, 이를테면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떨기 
동료들과 점심으로 특별한 음식 먹어보기
애완견과 공원 산책하기 
좋아하는 스포츠 팀 경기를 보며 응원하기 
밤 9시, 치킨을 배달시켜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며 먹기   

좋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곧 행복이라는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모여 행복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中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보다 일상을 일구고 가꾸고 지켜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누가 봐도 화려한 업적이나 성과 혹은 극적인 체험이나 간증보다는, 뻔한 매일 삶 속에 생명력 있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초라하고 비참하고 눈물겨운 나날이야말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나자신의 처절한 한계와 결핍과 마주하는 하루하루야말로, 복음을 깨달아 누리고 실천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더 없이 드높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을수록 우리의 발은 더욱더 굳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비장하게 움켜쥔 주먹을 내려놓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일상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그림을 완성한다는 진리를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룻의 평범한 아들로 그치지 않고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거듭 강조하며 분명히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그 후 약 천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생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기를 둘러싼 상황은 뭔가 기이합니다. 탁월한 학식과 지혜를 가진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대받던 목자들 역시 그 아기에게 찾아와 찬송하였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들이 온 우주를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드렸습니다. 한편으로는 공포에 빠진 왕궁이 그 아기로 말미암아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삶의 시작부터, 인생의 모든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부활 하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룻기를 거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심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내 일상의 주인으로 모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행하시고 룻기가 알려주듯이 날마다 일상을 일구어 가며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전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러한 ‘일상’이 바로 제가 정배교회 담임 목사로서 지향하는 첫 번째 핵심 가치입니다. 이단의 선명한 특징이 있습니다. 일상을 파괴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건강한 복음 공동체는 정반대입니다. 가정과 일터를 비롯한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교회 안의 종교생활만이 아닌 교회 밖에서 땀 흘려 부대끼는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성도 간의 교제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도 진지하게 사귐과 대화를 나눕니다. 교회의 외형에만 집착하지 않고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소통합니다.

이처럼 일상을 건강하게 가꾸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교회를 이루기 위해 우리 함께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그 꿈을 마음 깊이 품고 그 어떤 시련에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사사시대와 같은 숱한 위기와 혼란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룻과 보아스가 그러했듯이 진리를 따라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길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정배교회가 성도와 이웃의 일상을 존귀히 여기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평범한 하루하루에 담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헤아리며 일상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을 넘어 일상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