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하루도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철저히 망가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읽은 창세기 이야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 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 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 그와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셈과 야벳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우 없이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아가 겪어온 고통 어린 순간들을 말없이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품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받아 오늘 하루도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위대한 용서와 속죄의 주 하나님.
깊은 상심과 좌절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노아를 향한 아들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함에게서 저희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합니다.
저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연약함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때로 삶에 지쳐 무너진 저희의 전 존재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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