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9일 목요일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2024년 8월 28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고된 인생 여정을 이어갑니다. 나그네의 숙명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여기서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창조’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특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화가 중에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예전에 기념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새삼 제 눈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두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그림 PPT>

이중섭 화백은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담배갑 속에 있는 얇은 은박지에 이 그림을 그려졌습니다.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난한 미술가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은박지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조금 거창하게 “은지화”(銀紙畵)라고 부릅니다. 미술평론가인 김주삼씨에 따르면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독특한 표현기법입니다. 그래서 뉴욕현대미술관은 지난 1955년, 한국인 화가 그림으로는 최초로 그의 은지화 세 점을 구입했습니다. 은지화는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이중섭”만이 주어가 되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 은박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기꺼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우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구절은 본문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광야 길에서 “물과 불”로부터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둘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재해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섬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무속 신앙이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공포입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에 큰 물을 건넌다는 것은 훨씬 더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리 배경인 광야는 밤이 되면 추위가 몰려와서 불을 지피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서 다른 곳에 옮겨 붙으면 무척 끄기 어렵습니다. 메마른 땅에 삽시간에 불이 번지고 맙니다. 따라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생생한 공포의 실체를 명확하게 언급하십니다. 과거 출애굽 여정에서도 그러하셨듯이 두려움을 이겨 낼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며 겪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하게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힘겨운 건강 문제로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 속에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며 삶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 피조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는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결단입니다. 

부모에게 이웃집 예쁜 아이와 우리 집 못난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냐 아니냐입니다. 아무리 귀여워도 옆집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말 안 듣고 속상하게 해도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에서 연주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4성 장군이신 저희 부대 사령관님이 참석하는 행사 전날에는 무척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합주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군악대장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외동딸을 데리고 합주실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겨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편의상 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영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장님은 딸을 한쪽 구석에 앉히고서는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들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점점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마침내 언성을 높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앳된 음성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의 어린 딸, 영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였습니다. 의외로 “딸 바보”셨던 대장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군악대원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덕분에 나머지 연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군악대장의 말과 행동이 “너무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영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 도중에 부대원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등병이 ‘대장님!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칩니다.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깊고 깊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 겁니다.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등병에게 군악대장이란, 두려움으로 맺어진 철저한 계급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영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본문 속 이스라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 뜻을 업신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사랑 받을 만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여정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 깊이 품고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걸음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작품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끌어 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힘차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으로 자녀들을 지으시고 날마다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고된 나그네 길을 지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수없이 지치고 낙심합니다. 그런 저희를 주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 어떤 광야 길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이사 일주년을 맞아.





고양시로 이사 온 지 일 년 되는 날이다.
사택은 일산 위쪽 끄트머리에 있다.
고즈넉한 이곳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사계절을 보내며 점점 더 아늑함을 느낀다.

집 바로 옆에 붙어있는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으로 아들 손을 잡고 등하원할 때,
울창한 가로수가 드리워져 있고 안전하고 넓게 조성된 주변 길을 걸을 때,
오랫동안 잃었던 따스한 숨결이 비로소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나를 발견한다.
어느 때보다 자기애가 높아진 걸 확인한다.
이렇듯 살아가는 환경은 참 중요하다.
여러모로 잘 맞는 동네에 산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나그네 같은 목회 여정 속에서 언제까지 이곳에 살지 모르겠다.
다음은 어느 곳으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창밖에 펼쳐진 야경을 보며 묘한 위로를 느낀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한다.

이곳에 살며 쌓고 쌓아갈 추억이 두고두고 그리울 거다.
또한 나 역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숨 쉴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상처와 번민이 아닌, 포근한 추억의 배경 일부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지난 주일은 승리교회 부임 1주년이다. 두 가지 큰 변화를 겪었다. 매일 아침 회의가 없다. 넥타이를 거의 매지 않는다. 전에 몸담았던 교회들에서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주1일 회의로도 업무에 지장이 없다. 오히려 더 매끄럽다. 주중에 차이나셔츠를 입으며 격식을 갖추면서도 편한 복장을 한다.

'당연'이란게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는다. 당연을 삼가길 다짐한다. 참으로 당연한 것만 당연히 하는 건강한 감각과 상식을 지켜가길 소망한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2024년 8월 11일 일요일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 여는글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정대진

여는 글(1) - 배경과 목적

저는 구약학 석사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졸업논문 작성’이라는 고단한 작업을 거쳤습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유익했습니다. 특별히 ‘설교’에 대해, 목사로서 나름의 이해를 갖추고 방법론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첫 번째 저서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서울: 좋은씨앗, 2023)의 저술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책을 탈고하며 성서학을 통해 익힌 설교법을 좀 더 다듬고 숙달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러한 저 나름의 설교이해와 방법론을 정리하고 공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물론 저는 지역교회를 섬기는 평범한 부목사에 불과합니다. 특출난 명설교가가 아니며 그럴듯한 화려한 이력이나 학력을 갖추지도 못합니다. 다만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이라고 이름붙인 제 설교 준비과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눌변입니다. 저는 설교가로서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극심한 무대 공포를 겪었습니다. 준비한 원고를 차분하게 전달하는데 몹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설교 개요만 들고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매 주일마다 좌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전임전도사 사역을 하며 ‘원고를 최대한 정갈하게 작성하고 잘 낭독’하는 이른바 ‘원고 설교’가 저에게 가장 맞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탕에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독서와 글쓰기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제 오랜 치유와 수행의 도구였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몇 줄 문장을 남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꾸준한 글쓰기는 곧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고심하며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배열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설교자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원고에 집중하여 낭독을 전제하는 특정 방법론에 대한 제 경험과 방법을 나누는 것과 동시에, 각자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설교론의 기본기를 탐구하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설교자로서 저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이 글의 우선 목표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어눌한 언변으로 갈등하고 좌절하며 설교단을 내려왔던 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희망을 품는데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길 원합니다.

여는 글(2) - ‘설교’ 개념 정의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설교’란 무엇인지, 기본적인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 관한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정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수직적인 측면’에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묵상과 연구입니다. 다음으로 ‘수평적인 측면’에서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하기 위한 소통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요소가 동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에 좀 더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달’은 말씀에 집중한 다음에 주력해야 할 이차적인 대상입니다. ‘전달력’이 없다면 ‘결함 있는 설교’가 되지만 ‘말씀’이 없다면 아예 설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피하고자 거듭 말씀드립니다. 저는 설교에 있어 ‘전달’에 해당하는 요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른바 ‘들리는 설교’를 주장하는 ‘신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 movement)의 문제 제기와 방법론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들리는 설교’는 자칫 군중의 환호를 끌어내려는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자극할 위험이 큽니다. 게다가 묵묵히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지루한 작업에서 도피하는 변명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설교학’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대 설교학 이론 그 자체에는 죄가 없습니다. 다만 극단적인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참석한 설교 세미나에서 타교단 목사님께서 강사로 오셨습니다. 자신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해외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성공 신화를 강의 주제와 무관하게 극적으로 간증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뜬금없이 유명 자기계발 강사를 롤모델로 언급하셨습니다. 유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따라 하라고 적극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 TV에서 그분의 설교 영상을 보았습니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애처로웠습니다. 조심스러운 짐작이지만 ‘열등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쓴듯한 억지 미소를 짓고 체화되지 않은 농담을 남발했습니다. 많은 인기를 누리고 억대 연봉을 받는 유명 강사처럼 되고 싶은 욕망과 그 안에 담긴 뒤틀린 자존감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예배당 이곳저곳을 과장된 몸짓으로 오가는 모습이 충격을 넘어 슬픔으로 지금도 제 마음에 다가옵니다.

다른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 청년 연합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청년사역으로 유명한 강사 목사님이 1시간가량 열정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화려한 입담으로 회중을 휘어잡으며 울고 웃기셨습니다. 분위기는 뜨겁고 무르익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동경의 눈길을 보내고 감탄하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를 돌이켜보면 씁쓸해집니다. 그 목사님은 설교 내내 성경을 단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때 청년들이 받았다고 말하는 ‘은혜’의 실체를 과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사례는 극단적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의 실존과 욕망을 보여줍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설교단에 서지만 우리 앞에는 사람이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해야 할 말’보다는 ‘하고 싶은 말’ 혹은 ‘듣고 싶은 말’을 설교로 포장하려는 게 연약한 죄인으로서 목회자가 겪는 유혹입니다. 그 결과 ‘말씀보다 전달’에 집중하는 설교를 넘어 ‘전달만 남은’, 설교 아닌 설교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는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 설교가 됩니다. 말씀에 갈급한 성도의 귀를 닫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에 있어 ‘전달’에 담긴 위험 요소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전달’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한 ‘전달’의 의미를 고민해야 합니다. 군중을 열광시켜 환호에 도취 되는 설교, 강단을 무대로 변질시키는 설교, 복음을 듣기 좋은 수다로 뒤바뀌는 설교를 지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에 집중하는 태도와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저는 21살부터 교육전도사 사역을 했습니다. 설교자로서 오랫동안 많은 좌절을 했습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지난번 글에 쓴 바와 같이 구약학 석사과정과 책 저술 과정을 통해 저 나름의 설교 방법론을 정립했습니다. 말씀 자체가 지닌 전달력을 신뢰하는 설교, 군중 커뮤니케이션 보다 성경에 더 집중하는 설교, 신학적 깊이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춘, 본문에 철저히 근거한 원고를 차분히 낭독하는 방식의 설교입니다. 각각 아래와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묵상 – 연구 – 작성 - 연습 - 설교 – 정리

다음 글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여기에 해당하는 모든 단계를 다 지키지 못합니다. 시간이 부족할 때 많은 부분을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틀을 꾸준히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방법론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제겐 큰 부담입니다. 스스로 많은 한계를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되길 바랍니다. 다음 글로 찾아뵈겠습니다.

2024년 8월 9일 금요일

사무엘하 5장 1~10절 “만군의 하나님”

2024년 8월 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하 5장 1~10절 “만군의 하나님”

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4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6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그는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한 소년이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참혹한 공간 속 매우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군인이 아닙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먼 길을 떠나온 천덕꾸러기 막내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큰 형이 노골적으로 불쾌해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 갑옷과 투구를 내어준 왕도 그를 껄끄러워합니다. 이스라엘 군대 어느 누구도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그저 이 불편한 상황이 얼른 끝나기 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가장 고독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반대 편에 서 있는 골리앗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블레셋 군대 지휘관입니다. 매서운 눈빛, 몸 이곳저곳에 있는 흉터,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탄탄한 근육들. 굳이 여러 설명을 하지 않아도 겉모습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용맹한 장수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이 기세등등하게 그의 이름을 외칩니다. 보나마나 결과는 뻔합니다. 블레셋 군대로서는 잠시 쉬어가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골리앗은 자기 눈 앞에 서 있는 앳된 소년을 우습게 여기며 블레셋 신들의 이름으로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이 상황에 놓인다면 누구나 벌벌 떨게 됩니다. 거대한 공포에 짓눌립니다. 온몸이 굳어져 꼼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당당히 일어나 골리앗과 맞서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눈부신 승리가 가능했을까요? 과연 무엇이 그에게 그토록 놀라운 용기를 안겨주었을까요? 사무엘상 17장 45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우리는 이 때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외치는 신앙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만군’으로 옮긴 히브리어 <츠바오트>는 ‘많은 무리’를 뜻합니다. 직접적인 의미는 땅에 있는 군대입니다. 동시에 수많은 별을 뜻합니다. 

오늘처럼 빛 공해가 없는 옛날 밤 하늘에는 별들로 빼곡히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은 그 별들을 대상으로 상상력을 펼치며 신화와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이 말하는 ‘만군’의 의미는 대적, 블레셋의 우상을 포함한 온 우주를 아우르는 군대입니다.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는 단순히 많은 군대를 거느린 것을 넘어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권능을 높이는 호칭입니다. 

다윗은 부모에게 외면당하고 쓸쓸하게 양 떼를 돌보던 광야에서 만군의 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맹수의 공격에서 자기를 보호하신 주님, 인생의 햇볕을 막아주는 그늘이자 싸늘한 밤공기를 물리쳐준 온기가 되신 주님, 신비로운 길로 자신을 점점 강하게 단련시켜 가시며 항상 함께 하신 주님의 돌보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만군의 하나님 이름으로 다윗은 골리앗과 맞서 싸워 마침내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이후 다윗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 순간에 온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탄탄대로가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인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삶에는 항상 굴곡이 있습니다. 어김없이 파도가 몰아칩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를 받아 비참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목 끝에 누군가 칼을 겨누는 것 같은 서늘한 살기를 느끼며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목동이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가 다윗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습니다. 마침내 왕관을 머리에 썼습니다. 너무나 극적인 인생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책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위대한 영웅 신화도 아닙니다. 다윗의 삶을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전에 사울이 왕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출전하였다가 다시 데리고 돌아오신 분이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네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며, 네가 이스라엘의 통치자<히, 나기드>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바로 임금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으로 왕을 찾아오니,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사울이 장남 요나단과 함께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뒤를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도 부하들에 의해 살해 되었습니다. 온 나라에 공포와 혼란이 뒤 덮였습니다. 이대로 나라가 분열되어 나뉘거나 이 틈을 타 외적이 침입하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지도자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가 단순히 싸움을 잘하거나, 요나단의 친구이자 미갈의 남편으로서 왕실 배경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어떤 상황 속에도 늘 함께 하신 것을 이스라엘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부르시고 날마다 동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련해서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 부르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목자’와 ‘통치자’입니다. 여기서 ‘통치자’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나기드>입니다. 이것은 백성을 형제로 섬기는 지도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주변 다른 나라 왕들과 다릅니다. 그들처럼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지 않습니다. 대신 목자이신 주님을 대신 해 백성을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왕실에 앉아 한가롭게 즐길 시간이 없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왕관을 쓰고 우쭐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중요한, 그렇지만 몹시 위험한 사명을 서둘러 완수해야 합니다. 바로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동안 분열 해 있던 이스라엘을 통합하기 적합한 새로운 도읍지입니다. 우선 현재 여부스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살고 있어서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공간입니다. 게다가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군사 요지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상황은 다윗으로 하여금 거대한 위협으로 내몰았습니다. 도무지 함락하기 힘든 땅을 차지한 이방민족과 싸워 이기는 것으로 이스라엘 왕으로서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또 다른 골리앗과 마주하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자세히 묘사하진 않았지만 작전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뇌에 빠졌을 겁니다. 본문 6절은 그런 다윗을 향한 여부스 사람들의 야유를 기록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6 다윗 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니, 그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그 곳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막 왕으로 등극한 다윗을 움츠러들게 하는 일종의 심리전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내전이 끝난 직후였고 열두 지파는 각각 개성과 주관을 강력하게 유지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쩌면 다윗의 결정을 비웃고 무시하는 권력 실세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분명 엘라 골짜기에서 경험한 것 그 이상으로 그는 거대한 고독과 압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국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수아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한 땅을 완전하게 차지했습니다. 이후로 예루살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찬란하게 기록된 다윗 왕조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 역사가는 이 사건을 두고 매우 의미심장한 평가를 남깁니다. 1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그 하나님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만군의 하나님’입니다. 이 자리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같은 다른 수식어를 사용해도 내용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성경 중 사무엘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 전체 흐름에 보면 전에 없었던, 새로운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마침내 왕이 되어 거둔 의미심장한 첫 승리를 묘사하며 사무엘서가 굳이 ‘만군의 여호와’를 언급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다윗이 지난날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고백한 그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양 떼와 밤을 새며 수많은 별을 올려다보던, 어린 다윗의 심장 깊은 곳에 새겨진 하나님, 그리하여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대결을 자원하며 고백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대로 다윗은 도망자로 외롭게 지낼 때도 자신과 늘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권능을 경험하였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또다시 도망자가 되는 처량한 신세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군의 하나님은 결코 그를 홀로 외롭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일생을 신실하게 지키고 돌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홀로 울부짖으셨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철저히 외로운 존재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역설적인 진리를 알려줍니다. 고독할 때야 말로 진정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온 우주를 참으로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만군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혼자입니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양한 모습의 거대한 골리앗과 마주합니다. 여러 성벽을 부들거리며 오릅니다. 때때로 고된 외로움에 지쳐 쓰러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평생 동안 항상 함께 하신 주님,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자녀들과 동행하시는 주님께서 또한 온 우주의 피조물과 더불어 우리에게 임재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다윗처럼, 주님의 선하신 품에 안겨 참된 승리를 거두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만군의 하나님.
주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과 맞서는 용기를 주셨고, 고단한 도망자 신세를 이겨내게 하셨고,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하셨음을 말씀을 통해 확인합니다. 온 우주를 아우르는 만군을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저희 일생을 신실하게 이끄시고 돌보심을 고백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가장 외로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시어 온 세상을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