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2024년 8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고난은 교회의 정체성은 시작부터 핍박을 겪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당하는 교인들에게 편지로 격려하였습니다. 바로 “베드로 전후서”입니다. 베드로는 힘겹게 신앙을 지켜가는 교회를 향해 무엇을 권면했을까요? 9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교회를 위협 하는 악을 무시하거나 도망하거나 혹은 굴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적하라.”라고 가르칩니다. 그 방법이 중요합니다. 바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을 이기는 올바른 길은 직접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내용은 우리에게 그리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강제로 신앙을 뺏기거나 믿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자와 같은 악한 권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교회를 삼키려 합니다. 좀 더 낮아지고 섬기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욕망을 따르도록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사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가능하면 자녀, 손주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다니길 소망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를 애써 부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지나치게 많이 움켜쥐고 좀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을 행복의 기준과 인생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유치한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돈과 명예라는 이 시대의 우상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살아내신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자기를 비워내고 낮아지는 삶의 방식입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 질서와는 전혀 반대되는 어렵고 위험한 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생활 역시 모양과 환경은 다르지만 그 옛날, 끔찍한 시련과 마주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모두가 한 쪽 눈만을 가진 나라에서는 두 눈 가진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거슬리고 거북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질서처럼 탐욕을 따르지 않고 미련하게 낮추고 비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시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온갖 시련을 겪는 자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절망에 맞서 굳센 믿음으로 싸우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끝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희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10, 1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는 먼저, 그들을 향해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위로합니다. 성도의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잠깐’입니다. 여기서 잔인한 의문을 떠오릅니다. 과연 그 “잠깐”이 언제까지일까요?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할 여러 아픔에 신음하며 주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잠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대부분은 건강이나 경제적 어려움 혹은 가정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 내용들이 하나쯤은 있으실 겁니다. 더러 금세 응답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 2년은 물론이고 10년, 20년, 심지어 평생 동안 간절히 구해도 끝나지 않은 아픔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안에서 인간의 그 어떤 영원함도 결국 유한합니다.  제 아무리 영겁과 같은 시간의 무게도 주님의 위대한 다스림 가운데 반드시 힘을 잃습니다. 그 어떤 고통스런 시간도 참된 은혜로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하는 ‘잠깐’의 의미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본문 말씀을 통해 고난 당한 성도들이 귀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소망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자녀들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휩싸인 성도를 직접, 온전하고 굳건하게, 강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십니다. 

앞서, 9절 말씀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를 이기는 길은 직접 맞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자녀의 믿음을 직접 굳세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힘과 능력이 주님께 영원히 있음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랜 시간 그 끔찍한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이유입니다. 만약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면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분이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고 붙잡아 주시기에,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의 거짓과 불의와 폭력에 기꺼이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영혼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갈 때, 분명 허무함과 좌절과 아픔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시련을 헤쳐갈 믿음 역시 주님께서 직접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 지치고 괴로울 때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7절에 담긴 베드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사도행전과 1세기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듯이 환난과 핍박에도 성도들은 담대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끔찍한 고난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신앙을 어떻게 지킬 수 있었을까요? 교회가 거대한 시련 속에서도 권능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들과 항상 함께 계시고 돌보심을 믿고, 그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관련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어느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진 PPT> 여러분 모두 지금 화면에 보시는 것처럼, 서커스단이 펼치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공중그네 묘기”를 텔레비전에서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어느 날 헨리 나우웬이 세계적인 공중그네단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로 그 팀 리더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로트라이히’ 라는 이름의 리더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공중 비행을 할 때 저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위대한 스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 스타는 저를 잡아주는 죠입니다. 

그는 1초의 몇 분의 몇까지 맞출 만큼 정확하게 제가 갈 자리에 와 있어야 하고, 제가 그네에서 길게 점프할 때 공중에서 저를 잡아채야만 하니까요.”

그러자 헨리 나우웬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 물었습니다. 로트라이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합니다. 이것이 공중그네의 비밀입니다. 

죠에게 날아갈 때 저는 그저 팔하고 손만 뻗으면 됩니다. 그 다음엔 그가 저를 잡아 무대 앞으로 안전하게 끌어가 주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우웬은 무척 놀라워하였습니다. 정말 그가 공중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되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실수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죠를 잡으려 들면 안 됩니다. 저를 붙잡는 것은 죠의 임무입니다. 

만약 제가 죠의 손목을 잡는다면 그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제 손목이 부러지고 말겁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끝장입니다. 

공중 비행을 하는 사람은 날기만 하고, 붙잡아 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해야 합니다. 공중 비행을 하는 사람은 붙잡아줄 사람이 자기를 위해 제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자신의 팔을 뻗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서커스 공연장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교회는 그 어떤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공중 그네를 타는 부활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비웃거나 심지어 미워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의 화려한 성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곤 합니다. 때때로 초라한 자기 모습에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중 그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마음 깊이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연습한 데로 최선을 다해 힘껏 하늘로 날아오른 뒤에는, 자신을 붙잡는 사람을 향해 그저 손과 팔을 뻗어야만 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게으르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인생 여정 가운데 인간의 능력과 경험과 배경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잠잠히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내 방법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억지로 움켜쥐려 드는 것은 최악의 실수라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불안과 염려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붙잡아주시려 하나님께서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계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정없이 곤두박질하는 듯 한 아찔한 인생의 추락 속에서, 자녀의 고난 가운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순간을 그분의 드넓은 팔에 내어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넘어지는 자녀를 붙잡으시려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시는 놀라운 구원의 하나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곧 우는 사자처럼 저희를 노려보는 여러 모양의 악한 세력과 마주하는 일임을 찢긴 마음을 안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승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삶의 자리를 은혜와 평안으로 지켜 보호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2024년 8월 28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고된 인생 여정을 이어갑니다. 나그네의 숙명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여기서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창조’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특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화가 중에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예전에 기념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새삼 제 눈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두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그림 PPT>

이중섭 화백은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담배갑 속에 있는 얇은 은박지에 이 그림을 그려졌습니다.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난한 미술가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은박지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조금 거창하게 “은지화”(銀紙畵)라고 부릅니다. 미술평론가인 김주삼씨에 따르면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독특한 표현기법입니다. 그래서 뉴욕현대미술관은 지난 1955년, 한국인 화가 그림으로는 최초로 그의 은지화 세 점을 구입했습니다. 은지화는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이중섭”만이 주어가 되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 은박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기꺼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우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구절은 본문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광야 길에서 “물과 불”로부터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둘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재해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섬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무속 신앙이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공포입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에 큰 물을 건넌다는 것은 훨씬 더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리 배경인 광야는 밤이 되면 추위가 몰려와서 불을 지피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서 다른 곳에 옮겨 붙으면 무척 끄기 어렵습니다. 메마른 땅에 삽시간에 불이 번지고 맙니다. 따라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생생한 공포의 실체를 명확하게 언급하십니다. 과거 출애굽 여정에서도 그러하셨듯이 두려움을 이겨 낼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며 겪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하게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힘겨운 건강 문제로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 속에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며 삶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 피조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는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결단입니다. 

부모에게 이웃집 예쁜 아이와 우리 집 못난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냐 아니냐입니다. 아무리 귀여워도 옆집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말 안 듣고 속상하게 해도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에서 연주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4성 장군이신 저희 부대 사령관님이 참석하는 행사 전날에는 무척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합주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군악대장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외동딸을 데리고 합주실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겨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편의상 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영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장님은 딸을 한쪽 구석에 앉히고서는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들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점점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마침내 언성을 높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앳된 음성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의 어린 딸, 영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였습니다. 의외로 “딸 바보”셨던 대장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군악대원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덕분에 나머지 연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군악대장의 말과 행동이 “너무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영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 도중에 부대원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등병이 ‘대장님!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칩니다.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깊고 깊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 겁니다.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등병에게 군악대장이란, 두려움으로 맺어진 철저한 계급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영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본문 속 이스라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 뜻을 업신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사랑 받을 만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여정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 깊이 품고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걸음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작품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끌어 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힘차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으로 자녀들을 지으시고 날마다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고된 나그네 길을 지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수없이 지치고 낙심합니다. 그런 저희를 주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 어떤 광야 길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이사 일주년을 맞아.





고양시로 이사 온 지 일 년 되는 날이다.
사택은 일산 위쪽 끄트머리에 있다.
고즈넉한 이곳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사계절을 보내며 점점 더 아늑함을 느낀다.

집 바로 옆에 붙어있는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으로 아들 손을 잡고 등하원할 때,
울창한 가로수가 드리워져 있고 안전하고 넓게 조성된 주변 길을 걸을 때,
오랫동안 잃었던 따스한 숨결이 비로소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나를 발견한다.
어느 때보다 자기애가 높아진 걸 확인한다.
이렇듯 살아가는 환경은 참 중요하다.
여러모로 잘 맞는 동네에 산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나그네 같은 목회 여정 속에서 언제까지 이곳에 살지 모르겠다.
다음은 어느 곳으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창밖에 펼쳐진 야경을 보며 묘한 위로를 느낀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한다.

이곳에 살며 쌓고 쌓아갈 추억이 두고두고 그리울 거다.
또한 나 역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숨 쉴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상처와 번민이 아닌, 포근한 추억의 배경 일부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지난 주일은 승리교회 부임 1주년이다. 두 가지 큰 변화를 겪었다. 매일 아침 회의가 없다. 넥타이를 거의 매지 않는다. 전에 몸담았던 교회들에서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주1일 회의로도 업무에 지장이 없다. 오히려 더 매끄럽다. 주중에 차이나셔츠를 입으며 격식을 갖추면서도 편한 복장을 한다.

'당연'이란게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는다. 당연을 삼가길 다짐한다. 참으로 당연한 것만 당연히 하는 건강한 감각과 상식을 지켜가길 소망한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2024년 8월 11일 일요일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 여는글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정대진

여는 글(1) - 배경과 목적

저는 구약학 석사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졸업논문 작성’이라는 고단한 작업을 거쳤습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유익했습니다. 특별히 ‘설교’에 대해, 목사로서 나름의 이해를 갖추고 방법론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첫 번째 저서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서울: 좋은씨앗, 2023)의 저술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책을 탈고하며 성서학을 통해 익힌 설교법을 좀 더 다듬고 숙달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러한 저 나름의 설교이해와 방법론을 정리하고 공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물론 저는 지역교회를 섬기는 평범한 부목사에 불과합니다. 특출난 명설교가가 아니며 그럴듯한 화려한 이력이나 학력을 갖추지도 못합니다. 다만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이라고 이름붙인 제 설교 준비과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눌변입니다. 저는 설교가로서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극심한 무대 공포를 겪었습니다. 준비한 원고를 차분하게 전달하는데 몹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설교 개요만 들고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매 주일마다 좌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전임전도사 사역을 하며 ‘원고를 최대한 정갈하게 작성하고 잘 낭독’하는 이른바 ‘원고 설교’가 저에게 가장 맞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탕에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독서와 글쓰기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제 오랜 치유와 수행의 도구였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몇 줄 문장을 남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꾸준한 글쓰기는 곧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고심하며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배열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설교자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원고에 집중하여 낭독을 전제하는 특정 방법론에 대한 제 경험과 방법을 나누는 것과 동시에, 각자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설교론의 기본기를 탐구하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설교자로서 저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이 글의 우선 목표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어눌한 언변으로 갈등하고 좌절하며 설교단을 내려왔던 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희망을 품는데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길 원합니다.

여는 글(2) - ‘설교’ 개념 정의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설교’란 무엇인지, 기본적인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 관한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정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수직적인 측면’에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리는 묵상과 연구입니다. 다음으로 ‘수평적인 측면’에서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하기 위한 소통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요소가 동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에 좀 더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달’은 말씀에 집중한 다음에 주력해야 할 이차적인 대상입니다. ‘전달력’이 없다면 ‘결함 있는 설교’가 되지만 ‘말씀’이 없다면 아예 설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피하고자 거듭 말씀드립니다. 저는 설교에 있어 ‘전달’에 해당하는 요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른바 ‘들리는 설교’를 주장하는 ‘신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 movement)의 문제 제기와 방법론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들리는 설교’는 자칫 군중의 환호를 끌어내려는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자극할 위험이 큽니다. 게다가 묵묵히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지루한 작업에서 도피하는 변명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설교학’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대 설교학 이론 그 자체에는 죄가 없습니다. 다만 극단적인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참석한 설교 세미나에서 타교단 목사님께서 강사로 오셨습니다. 자신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해외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성공 신화를 강의 주제와 무관하게 극적으로 간증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뜬금없이 유명 자기계발 강사를 롤모델로 언급하셨습니다. 유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따라 하라고 적극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 TV에서 그분의 설교 영상을 보았습니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애처로웠습니다. 조심스러운 짐작이지만 ‘열등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쓴듯한 억지 미소를 짓고 체화되지 않은 농담을 남발했습니다. 많은 인기를 누리고 억대 연봉을 받는 유명 강사처럼 되고 싶은 욕망과 그 안에 담긴 뒤틀린 자존감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예배당 이곳저곳을 과장된 몸짓으로 오가는 모습이 충격을 넘어 슬픔으로 지금도 제 마음에 다가옵니다.

다른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 청년 연합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청년사역으로 유명한 강사 목사님이 1시간가량 열정적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화려한 입담으로 회중을 휘어잡으며 울고 웃기셨습니다. 분위기는 뜨겁고 무르익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동경의 눈길을 보내고 감탄하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를 돌이켜보면 씁쓸해집니다. 그 목사님은 설교 내내 성경을 단 한 구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때 청년들이 받았다고 말하는 ‘은혜’의 실체를 과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사례는 극단적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의 실존과 욕망을 보여줍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설교단에 서지만 우리 앞에는 사람이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해야 할 말’보다는 ‘하고 싶은 말’ 혹은 ‘듣고 싶은 말’을 설교로 포장하려는 게 연약한 죄인으로서 목회자가 겪는 유혹입니다. 그 결과 ‘말씀보다 전달’에 집중하는 설교를 넘어 ‘전달만 남은’, 설교 아닌 설교가 됩니다. 그리고 그때는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 설교가 됩니다. 말씀에 갈급한 성도의 귀를 닫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에 있어 ‘전달’에 담긴 위험 요소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전달’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한 ‘전달’의 의미를 고민해야 합니다. 군중을 열광시켜 환호에 도취 되는 설교, 강단을 무대로 변질시키는 설교, 복음을 듣기 좋은 수다로 뒤바뀌는 설교를 지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에 집중하는 태도와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저는 21살부터 교육전도사 사역을 했습니다. 설교자로서 오랫동안 많은 좌절을 했습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지난번 글에 쓴 바와 같이 구약학 석사과정과 책 저술 과정을 통해 저 나름의 설교 방법론을 정립했습니다. 말씀 자체가 지닌 전달력을 신뢰하는 설교, 군중 커뮤니케이션 보다 성경에 더 집중하는 설교, 신학적 깊이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춘, 본문에 철저히 근거한 원고를 차분히 낭독하는 방식의 설교입니다. 각각 아래와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묵상 – 연구 – 작성 - 연습 - 설교 – 정리

다음 글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여기에 해당하는 모든 단계를 다 지키지 못합니다. 시간이 부족할 때 많은 부분을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틀을 꾸준히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방법론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제겐 큰 부담입니다. 스스로 많은 한계를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되길 바랍니다. 다음 글로 찾아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