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9일 목요일

"행복한 소망인으로 향하는 여정", 『아직, 소망이 있다』(IVP, 2024) 서평

행복한 소망인으로 향하는 여정
- 제임스 패커·캐롤린 나이스트롬, 『아직, 소망이 있다』(IVP, 2024) 서평

정대진

절망 중에 만난 책
소망이 없었다.
육군 일병 시절이다. 휴가 첫날 들른 서점에서 책 하나가 처진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제임스 패커’라는 저자 이름과 ‘소망’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바로 집어 들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만큼 소망에 굶주렸었다.

그전까지 내게 기독교 신앙은 평면이었다. 지극히 단순했다. 하나님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응답하는 분이었다. 그 매끈한 틀은 자대 배치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내면 이곳저곳에 유리 조각이 박혔다. 마음벽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으며 깨달았다. 지금껏 굳게 붙잡았던 신앙 체계는 허상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는 목사가 되기에 결함투성이였다. 깊은 절망이 밀려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절망 사이 갈라진 틈으로 조금씩 빛줄기가 들이쳤다. 소망이 무너져 내려 다시 소망이 솟아올랐다. 익숙했던 신념이 무너지는 고통을 통해 암흑 속 균열을 발견했다. 대학 입학 후 조금씩 익혀 갔던 신학이라는 은혜 덕분이다.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연습을 했다. 뒤돌아보며 깨닫는다. 모든 게 소망을 발견하는 훈련이었다.

그 훈련 가운데 만난 여러 스승 중 한 분이 제임스 패커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로 건너가 리젠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존 스토트와 함께 이른바 ‘20세기 복음주의’ 거장으로 불리고,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현대 고전으로 꼽힌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익숙함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렴풋하나마 알아 가기 시작했다. 내 신학 토대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며, 뭔지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그가 ‘소망’을 주제로 쓴 책을 주저 없이 붙잡은 이유다.

불완전한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소망
제임스 패커는 진정한 ‘소망’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 인물 8명을 주목한다. 삼손, 야곱, 마노아의 아내, 요나, 마르다, 도마, 시몬 베드로, 느헤미야다. 저자는 그들을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만지시고 사용하셨는지’를 주목한다. 이는 저자가 부제, ‘How God Touches and Uses Imperfect People’를 통해 밝힌 저술 의도다. 그는 서론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 모든 열등감을 치료하기 위한 최종적인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이 인생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거나, 당신도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부류의 사람들 못지않게, 부적응자와 외톨이와 낙오자를 사랑하시고, 구속하시며,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며,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모든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품은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책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한 소망인으로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34-35쪽)

저자가 다룬 여덟 인물 중, 두 사람을 절망에서 새롭게 일으킨 소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야곱이다. 그는 ‘재물욕’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혼합형 인간”이다. 또한 창세기 12~50장을 관통하는 ‘역기능 가족’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는 희생자이면서 가해자다. 어머니에게 편애를 받고 일그러진 성품으로 자라 편애하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형의 복을 훔쳤으나 외삼촌에게 착취당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과 함께하시고 마침내 나타나셨다. 얍복강 나루에서 홀로 남은 그와 밤새 씨름하셨다. 그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려 다리를 절게 하셨다. 패커는 이 장면을 해설하며 빛나는 통찰을 드러낸다. “그의 자아가 최후를 맞는 순간이라고 여겨졌던 상황이 실제로는 진정한 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79쪽). 나는 이 문장에서 정확히 나 자신을 발견하며 몰입했다. 성경이 알려 주는, ‘진정한 소망이 시작하는 이치’를 깨달았다.

다음으로 시몬 베드로의 소망이다. 저자는 그의 특성을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그는 탁월한 지도자다. 둘째, 영적 지도자 역할을 위해 과감히 희생한 사람이다. 셋째,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상당히 훌륭하고 영웅적이다. 실제로 그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직전에 베드로가 지닌 제자도의 처참한 실상이 드러났다. 그는 어리석었고 실패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였다. 베드로는 비탄에 빠져 상심한 채 울부짖었다. 이 장면을 두고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자기 확신을 꺼내 부수어 버리기 위해 실패를 허용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 즉 우리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을 때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251-252쪽)

요한복음 21장은 베드로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의 경이로운 자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님은 시몬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비참한 기억에 짓눌린 채 사랑을 고백한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세 번 이어졌다.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쓰라린 기억을 씻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연약한 충성’은 ‘정직한 충성’을 거쳐 ‘견고한 충성’이 되어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년에 쓴 두 편지,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성도를 생생하게 권면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건강한 충성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다. 약함 가운데, 반석 같은 베드로처럼 변화됨을 기대하는 소망을 품었다.

저마다의 결핍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소망의 길잡이
나머지 여섯 명의 성경 인물 역시 저자는 깊은 통찰로 들여다본다. 저마다 겪은 고통과 결핍, 그리고 그 모두를 덮는 소망을 감동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유지한다. 해당 본문의 표면에만 시선이 머물지 않는다. 깊이에 다다른다. 각 인물을 둘러싼 상황과 사건을 탄탄한 신학에 근거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내가 그랬듯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저마다의 다양한 약점을 마주할 것이다. 동시에 결핍을 딛고 일어설 나만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 지쳐 소망이 짓밟힌 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탁월한 주제를 전개하는 형식 또한 무척 훌륭하다. 자연스럽게 성경 곳곳을 넘나든다. 구약 인물의 경우 신약성경과 유기적인 관계를 풀어낸다. 가령 삼손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야곱에게서 예수님의 화해 사역을 발견한다. 예화도 인상적이다. 그는 존 던과 키플링과 엘리어트가 쓴 시, 존 버니언과 입센과 C. S. 루이스가 지은 소설을 적절히 인용하여 문학적 품격을 높인다. 여러 선교사를 언급하며 각 본문을 선교적 시각으로 이해한다. 북아일랜드 분쟁과 코소보 학살 등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운다. 게다가 곳곳에 유머도 녹아 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포근하면서도 기품 있는 설교를 완성했다.

설교자로서 나는 이 책에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신학과 문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내가 꿈꾸는 설교의 원형을 여기서 처음 발견했다. 그런 까닭에 주위 목회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사역에 지쳐 흔들리는 소명을 붙잡을 힘과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훌륭한 설교 교재로서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소그룹을 맡아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각 장마다 ‘기도문’과 ‘연구 질문’, ‘기도 제목’, ‘기록과 적용’을 제시한다.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캐롤린 나이스트롬의 공헌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은 한 사람의 독자를 넘어 공동체의 소망을 회복하는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여러 명이 함께 읽고 나누고 함께 기도할 때, 모임 가운데 참 소망이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소망이 사치인 시대에 더욱 절실한 소망
다시 군대 시절 이야기다. 휴가 복귀 후 선임들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이 책을 들춰 보다가 마침내 다 읽었던 날을 기억한다. 먹먹한 감동을 품고 경계근무 초소에 올라갔다. 유리 조각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밤하늘에 흩어졌다. 문득, 어두운 평면 너머 아득하게 펼쳐진 공간이 보였다. 거대한 다면체 별자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온 우주에 얽힌 따뜻한 소망 이야기를 내 귓가에 속삭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책 내용을 곱씹으며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절망에 균열을 내며 진정한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했다. 불완전한 나를 하나님께서 계속 만지시고 사용하시길 구했다. 물론 그 후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나는 ‘행복한 소망인’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임스 패커가 이 책을 통해 의도한 바가 내게 이루어졌다.

그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삶이 서툴던 신학생은 어느새 기성세대 문턱에 들어선 40대 목사가 되었다. 그 시절과 다른 이유로 절망하고 그때와 다른 이유로 소망을 꿈꾼다. 삶의 거친 매듭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소망이 큰 힘이 되었다. 목회자로서 소명과 인격과 설교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 적극 추천하고 선물했다. 그랬던 책이 ‘아직, 소망이 있다’라는, 더욱 적절한 제목과 보다 세련된 편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다시금 소망이 물결치길 기도한다.

소망이 사치인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재난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 갈등과 긴장이 격하게 치닫고 있다. 한국 교회의 쇠락은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처럼 보인다. 각 개인의 삶에도 여러 모양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망을 꿈꾸고 증언하는 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이다. 오랜만에 감격스레 이 책을 펼쳐 읽고 더욱 생생한 감동을 느끼며 깨닫는 결론이다. 책장을 덮으며 기도하듯 이렇게 읊조렸다. 
아직, 소망이 있다.


필자 소개: 정대진
시편 131편 찬송처럼,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젖 뗀 아이와 같은 고요와 평온을 지닌 목사가 되길 꿈꾼다. 자기를 돌아보는 정갈한 글쓰기로 빚어낸 설교를 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결실로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좋은씨앗, 2023)을 출간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석사(Th.M)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목회신학박사 과정(Th.D. in Min.)에서 ‘목회와성서’ 전공으로 균형 있는 성경 연구를 이어 가고 있다. 영남 지역 전통 교회들을 거쳐 현재 일산 승리교회 교구목사로 섬기며 배우는 중이다.


기사링크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623

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2024년 8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고난은 교회의 정체성은 시작부터 핍박을 겪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당하는 교인들에게 편지로 격려하였습니다. 바로 “베드로 전후서”입니다. 베드로는 힘겹게 신앙을 지켜가는 교회를 향해 무엇을 권면했을까요? 9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교회를 위협 하는 악을 무시하거나 도망하거나 혹은 굴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적하라.”라고 가르칩니다. 그 방법이 중요합니다. 바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을 이기는 올바른 길은 직접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내용은 우리에게 그리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강제로 신앙을 뺏기거나 믿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자와 같은 악한 권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교회를 삼키려 합니다. 좀 더 낮아지고 섬기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욕망을 따르도록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사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가능하면 자녀, 손주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다니길 소망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를 애써 부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지나치게 많이 움켜쥐고 좀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을 행복의 기준과 인생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유치한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돈과 명예라는 이 시대의 우상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살아내신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자기를 비워내고 낮아지는 삶의 방식입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 질서와는 전혀 반대되는 어렵고 위험한 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생활 역시 모양과 환경은 다르지만 그 옛날, 끔찍한 시련과 마주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모두가 한 쪽 눈만을 가진 나라에서는 두 눈 가진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거슬리고 거북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질서처럼 탐욕을 따르지 않고 미련하게 낮추고 비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시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온갖 시련을 겪는 자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절망에 맞서 굳센 믿음으로 싸우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끝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희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10, 1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는 먼저, 그들을 향해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위로합니다. 성도의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잠깐’입니다. 여기서 잔인한 의문을 떠오릅니다. 과연 그 “잠깐”이 언제까지일까요?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할 여러 아픔에 신음하며 주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잠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대부분은 건강이나 경제적 어려움 혹은 가정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 내용들이 하나쯤은 있으실 겁니다. 더러 금세 응답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 2년은 물론이고 10년, 20년, 심지어 평생 동안 간절히 구해도 끝나지 않은 아픔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안에서 인간의 그 어떤 영원함도 결국 유한합니다.  제 아무리 영겁과 같은 시간의 무게도 주님의 위대한 다스림 가운데 반드시 힘을 잃습니다. 그 어떤 고통스런 시간도 참된 은혜로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하는 ‘잠깐’의 의미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본문 말씀을 통해 고난 당한 성도들이 귀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소망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자녀들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휩싸인 성도를 직접, 온전하고 굳건하게, 강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십니다. 

앞서, 9절 말씀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를 이기는 길은 직접 맞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자녀의 믿음을 직접 굳세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힘과 능력이 주님께 영원히 있음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랜 시간 그 끔찍한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이유입니다. 만약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면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분이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고 붙잡아 주시기에,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의 거짓과 불의와 폭력에 기꺼이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영혼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갈 때, 분명 허무함과 좌절과 아픔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시련을 헤쳐갈 믿음 역시 주님께서 직접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 지치고 괴로울 때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7절에 담긴 베드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사도행전과 1세기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듯이 환난과 핍박에도 성도들은 담대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끔찍한 고난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신앙을 어떻게 지킬 수 있었을까요? 교회가 거대한 시련 속에서도 권능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들과 항상 함께 계시고 돌보심을 믿고, 그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관련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어느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진 PPT> 여러분 모두 지금 화면에 보시는 것처럼, 서커스단이 펼치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공중그네 묘기”를 텔레비전에서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어느 날 헨리 나우웬이 세계적인 공중그네단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로 그 팀 리더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로트라이히’ 라는 이름의 리더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공중 비행을 할 때 저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위대한 스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 스타는 저를 잡아주는 죠입니다. 

그는 1초의 몇 분의 몇까지 맞출 만큼 정확하게 제가 갈 자리에 와 있어야 하고, 제가 그네에서 길게 점프할 때 공중에서 저를 잡아채야만 하니까요.”

그러자 헨리 나우웬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 물었습니다. 로트라이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합니다. 이것이 공중그네의 비밀입니다. 

죠에게 날아갈 때 저는 그저 팔하고 손만 뻗으면 됩니다. 그 다음엔 그가 저를 잡아 무대 앞으로 안전하게 끌어가 주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우웬은 무척 놀라워하였습니다. 정말 그가 공중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되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실수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죠를 잡으려 들면 안 됩니다. 저를 붙잡는 것은 죠의 임무입니다. 

만약 제가 죠의 손목을 잡는다면 그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제 손목이 부러지고 말겁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끝장입니다. 

공중 비행을 하는 사람은 날기만 하고, 붙잡아 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해야 합니다. 공중 비행을 하는 사람은 붙잡아줄 사람이 자기를 위해 제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자신의 팔을 뻗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서커스 공연장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교회는 그 어떤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공중 그네를 타는 부활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비웃거나 심지어 미워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의 화려한 성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곤 합니다. 때때로 초라한 자기 모습에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중 그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마음 깊이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연습한 데로 최선을 다해 힘껏 하늘로 날아오른 뒤에는, 자신을 붙잡는 사람을 향해 그저 손과 팔을 뻗어야만 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게으르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인생 여정 가운데 인간의 능력과 경험과 배경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잠잠히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내 방법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억지로 움켜쥐려 드는 것은 최악의 실수라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불안과 염려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붙잡아주시려 하나님께서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계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정없이 곤두박질하는 듯 한 아찔한 인생의 추락 속에서, 자녀의 고난 가운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순간을 그분의 드넓은 팔에 내어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넘어지는 자녀를 붙잡으시려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시는 놀라운 구원의 하나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곧 우는 사자처럼 저희를 노려보는 여러 모양의 악한 세력과 마주하는 일임을 찢긴 마음을 안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승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삶의 자리를 은혜와 평안으로 지켜 보호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2024년 8월 28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고된 인생 여정을 이어갑니다. 나그네의 숙명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여기서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창조’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특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화가 중에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예전에 기념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새삼 제 눈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두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그림 PPT>

이중섭 화백은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담배갑 속에 있는 얇은 은박지에 이 그림을 그려졌습니다.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난한 미술가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은박지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조금 거창하게 “은지화”(銀紙畵)라고 부릅니다. 미술평론가인 김주삼씨에 따르면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독특한 표현기법입니다. 그래서 뉴욕현대미술관은 지난 1955년, 한국인 화가 그림으로는 최초로 그의 은지화 세 점을 구입했습니다. 은지화는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이중섭”만이 주어가 되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 은박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기꺼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우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구절은 본문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광야 길에서 “물과 불”로부터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둘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재해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섬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무속 신앙이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공포입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에 큰 물을 건넌다는 것은 훨씬 더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리 배경인 광야는 밤이 되면 추위가 몰려와서 불을 지피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서 다른 곳에 옮겨 붙으면 무척 끄기 어렵습니다. 메마른 땅에 삽시간에 불이 번지고 맙니다. 따라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생생한 공포의 실체를 명확하게 언급하십니다. 과거 출애굽 여정에서도 그러하셨듯이 두려움을 이겨 낼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며 겪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하게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힘겨운 건강 문제로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 속에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며 삶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 피조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는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결단입니다. 

부모에게 이웃집 예쁜 아이와 우리 집 못난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냐 아니냐입니다. 아무리 귀여워도 옆집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말 안 듣고 속상하게 해도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에서 연주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4성 장군이신 저희 부대 사령관님이 참석하는 행사 전날에는 무척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합주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군악대장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외동딸을 데리고 합주실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겨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편의상 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영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장님은 딸을 한쪽 구석에 앉히고서는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들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점점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마침내 언성을 높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앳된 음성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의 어린 딸, 영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였습니다. 의외로 “딸 바보”셨던 대장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군악대원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덕분에 나머지 연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군악대장의 말과 행동이 “너무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영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 도중에 부대원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등병이 ‘대장님!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칩니다.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깊고 깊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 겁니다.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등병에게 군악대장이란, 두려움으로 맺어진 철저한 계급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영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본문 속 이스라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 뜻을 업신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사랑 받을 만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여정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 깊이 품고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걸음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작품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끌어 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힘차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으로 자녀들을 지으시고 날마다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고된 나그네 길을 지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수없이 지치고 낙심합니다. 그런 저희를 주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 어떤 광야 길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이사 일주년을 맞아.





고양시로 이사 온 지 일 년 되는 날이다.
사택은 일산 위쪽 끄트머리에 있다.
고즈넉한 이곳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사계절을 보내며 점점 더 아늑함을 느낀다.

집 바로 옆에 붙어있는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으로 아들 손을 잡고 등하원할 때,
울창한 가로수가 드리워져 있고 안전하고 넓게 조성된 주변 길을 걸을 때,
오랫동안 잃었던 따스한 숨결이 비로소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나를 발견한다.
어느 때보다 자기애가 높아진 걸 확인한다.
이렇듯 살아가는 환경은 참 중요하다.
여러모로 잘 맞는 동네에 산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나그네 같은 목회 여정 속에서 언제까지 이곳에 살지 모르겠다.
다음은 어느 곳으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창밖에 펼쳐진 야경을 보며 묘한 위로를 느낀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한다.

이곳에 살며 쌓고 쌓아갈 추억이 두고두고 그리울 거다.
또한 나 역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숨 쉴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상처와 번민이 아닌, 포근한 추억의 배경 일부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

지난 주일은 승리교회 부임 1주년이다. 두 가지 큰 변화를 겪었다. 매일 아침 회의가 없다. 넥타이를 거의 매지 않는다. 전에 몸담았던 교회들에서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주1일 회의로도 업무에 지장이 없다. 오히려 더 매끄럽다. 주중에 차이나셔츠를 입으며 격식을 갖추면서도 편한 복장을 한다.

'당연'이란게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는다. 당연을 삼가길 다짐한다. 참으로 당연한 것만 당연히 하는 건강한 감각과 상식을 지켜가길 소망한다.

당연은 당연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