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4일 화요일

요한복음 2장 13-22절 "회복을 위한 분노"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2017년 4월 2일, 부산진교회 청년 설교, 정대진 목사
요한복음 2장 13-22절 "회복을 위한 분노"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014년 “슈퍼스타K”의 우승자는 곽진언 씨 였습니다. 화려한 연주와 가창력을 뽐내는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의 수상자들과 달리 담담한 창법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가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결승 때 부른 “자랑”의 가사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의 품이 포근하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나눠줄 만큼 행복한 사람이 되면
그대에게 제일 먼저 자랑할 거예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안에 묘사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간절히 가지게 되곤 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만큼 포근한 품을 가진 사람이 이 시대에 참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기 보다는 더욱 너그러운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기를 종종 간절히 기도합니다. 적절하지 못하게 함부로 분노 하는 것은 자신과 이웃의 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스스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여러 불편함과 피해를 끼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마땅히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야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적절하지 않은 증오가 바람직하지 않듯이, 적절하지 못한 인내는 잘못을 계속 방치하는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1년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고령의 저술가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을 출판하여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부패한 자본과 권력에 대해 분노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처럼 우리가 “더 큰 정의와 자유”를 위해 침묵하지 말고 분연히 일어서서 분노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고 올바른 일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분이 바로 본문 속 예수님입니다. 복음서가 소개하는 예수님은 분명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무시당하고 소외된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항상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당한 폭력과 마주할 때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불같이 화를 내셨음을 복음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주님의 분노는 당신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바른 진리와 복음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오늘 본문에 소개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과 동일하게 기록한 몇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만큼 이 장면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왜 화를 내셨고 그러한 그분의 분노가 우리에게 보여준 복음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다함께 14절 말씀 읽겠습니다.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날 화를 내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며 주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온 세계 가운데 선포해야할 성전이 오히려 정반대의 불의와 폭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성전 안에 있던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본문 말씀을 두고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의 장사하는 행위 자체로 말미암아 화를 냈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마냥 나쁘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카페, “포도나무 정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좋은 음료를 저렴하게 팔아서 선교를 돕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뜻을 위해 교회 안에 서점을 운영하는 곳도 있고 시골 목사님들이 수고로이 농사지은 채소와 과일을 교회 안에서 판매해서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무얼 위해 장사 하느냐 입니다. 이와 관련해 본문 속, 장사 물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와 양과 비둘기” 입니다. 이 동물들이 왜 필요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제사에 쓰일 제물들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구약의 야훼 제사와 그 시대 다른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사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다른 중동 종교들은 “제물의 값어치와 양”을 주목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비싸고 많은 제물을 받칠수록 자신들의 신이 기뻐한다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야훼 하나님은 제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드리는 사람들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 형편에 맞게 소나 양이나 비둘기 중에서 하나를 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사 장소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한 곳이기 때문에 멀리서 제사를 드리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정성스레 제물을 준비한다 할지라도 예루살렘까지 오면서 제물이 상하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물이 죽었다고 다시 그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마련한 것이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성전 안에서 제물을 구입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파는 것 그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합리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 성전 안에서의 제물 판매는 본래의 좋은 취지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아무 제물이나 바칠 수 없었습니다. 같은 소나 양이나 비둘기라 하더라도 제사장이 허락한 제물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물에 상처나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골라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들은 이런 율법의 위대한 취지를 자기들 멋대로 이용했습니다.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받아내며 그들이 파는 제물만 제사에 바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아무리 정성스레 제물을 준비해도 그것은 허락하지 않고 성전에서 판매한 제물만 받아주어서 장사꾼들이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제사장들도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이런 제사장들의 죄악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쫓아낸 사람들은 장사꾼들만이 아니라 “돈 바꾸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제물을 파는 사람들이야 제사에 제물이 필요하니까 당연히 있을법한데 돈 바꾸는 사람들이 성전에 왜 있었을까요?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그 시대 제사장들의 돈에 대한 치밀한 욕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제사장들은 자신들과 결탁한 성전 장사꾼들이 파는 제물만 제사에 허락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제물들을 사는 돈입니다. 제물은 거룩한 것이라는 이유로 평소 사용하는 화폐로는 제사에 쓰일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못 사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만 쓸 수 있는 돈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가진 돈을 성전 화폐와 바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환전수수료를 챙겼고 역시 그 중 상당수가 제사장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정리하기 위해 여러분이 그 시대 제사를 드리러온 사람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우선 겨우겨우 힘들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지만 제사장들은 여러분이 정성스레 준비한 제물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짓자 제사장은 답답하다는 듯 성전 한쪽을 향해 눈짓합니다. 바로 장사꾼들이 파는 훨씬 상태가 좋지 못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분한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장사꾼들의 천막으로 찾아가서 돈을 내밀자 그들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돈은 성전에서 사용할 수 없게 부정하다는 이유를 들이대었습니다. 그러더니 건너편에 있는 환전상에게서 돈을 바꿔 오라고 합니다. 그 얘길 들은 여러분은 허탈하게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말도 안 되는 환전수수료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한 많은 돈을 지불하여 성전 화폐로 바꾼 후 겨우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 했고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과 관계없이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이라며 점점 멸시를 당해서 그 결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가진 돈에 관계없이 누구나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따뜻한 배려로 가득한 제사법을 정하셨지만, 제사장들은 도리어 그 제도를 악용해서 자신들의 배만을 불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높여야할 성전이, 그와 정 반대되는 탐욕과 폭력으로 가득한 부패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에 예수님께서는 몹시 분노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물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동물들을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과 탁자를 엎어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단호하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은 막연한 관념의 영역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억누르는 그릇되고 폭력적인 구조와 힘에 맞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반드시 깨닫길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진리의 회복을 위해, 복음의 변질에 맞서 분노하며 싸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의 살아 숨 쉬는 의미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며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가 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 지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납득할 ‘기적’을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요구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면 당신이 3일 동안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은 황당해 하면서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헤롯왕이 무려 46년이나 걸려 쌓아올린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 예수님께서 어떻게 혼자 그런 일이 가능한지 되물었습니다.

우리는 이 때 주님께서 답하신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주목해야 합니다. 다함께 본문 21-22절 말씀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께서 무너뜨린 후 다시 세울 성전은 지금 눈앞에 있는 거대한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바로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무너뜨려도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셔도 3일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이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보다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권력과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총체적인 죄악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노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그 시대 타락한 기득권들을 언짢게 했고, 주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죽임은 단순한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저 존경 스런 한 위인의 죽음도 아닙니다. 참된 성전의 죽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심으로서 당신을 따르는 우리 안에 진정한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흔히 오해하듯이 교회 건물은 결코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후로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다가오는 건물과 공간을 제한하지 않으시고 성령님과 더불어 우리 모두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정확히 지적한 대로 하나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 그리고 예배하는 이 모임이 성전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전의 회복을 위해 주님께서 분노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죽임 당하신 후 살아나셨습니다. 이 귀한 진리를 마음 깊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희생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끌어안고 죽임 당하심으로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분명 영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복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멋대로 내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쥐어짜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억누르는 모든 폭력에 대한 저항과 극복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본래의 의미와 가치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힘없고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일으키시기 위해, 그리고 누구나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다시 세우기 위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며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잘 웃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실수에 너그러운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동시에 제대로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속 좁은 자존심, 혹은 욕심과 편견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왜곡과 타락 때문에, 죄 없이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약한 사람들을 더욱 힘없게 만드는 잘못된 구조와 질서 때문에 분노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성전 안에서의 예수님을 본받아 일으키는 그 분노는 우리와 이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은혜를 바로 세우는, 회복을 위한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순절 기간, 주님과 더불어 회복을 향한 분노를 간직하길 원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신 참 사람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약함과 부족함에 함께 하시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악에 맞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하심의 결과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참으로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올바르게 분노하며 이 땅을 변화시키고 회복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
따뜻한 마음을 품으며 바르게 분노하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여 진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일들에 맞서 생명의 회복을 위해 분노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로운 분노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담긴 하나님 나라의 길을 더욱 우직이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분노하시며 성전을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공의의 하나님
이 땅에 정의와 공평을 세워 가시는 주님의 신실한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구조적인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소중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지치고 힘든 고단한 삶 속에 위로와 격려를 주시고 몸과 마음 가득히 건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웃들을 위한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꼭 필요한 때 적절히 거절하며 분노하는 지혜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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