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5일 화요일

요한복음 20장 11~18절 “주님을 보았습니다”

부활절 두 번째 주일, 2017년 4월 23일, 부산진교회 청년설교, 정대진 목사
요한복음 20장 11~18절 “주님을 보았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한 여인이 무덤 밖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여인”, “무덤”, “눈물” 이 세 단어의 조합은 마치 얼룩진 파스텔화처럼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무겁고 슬프게 합니다. 그녀에게서 절망어린 우리 자신과 가난한 이웃들의 비탄과 절망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는 고통스런 행동을 계속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누이셨던 무덤 속을 연신 몸을 구부려 바라보며 더욱더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현재 눈앞에 펼쳐진 힘겨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다시금 무덤 속으로 시선을 향하는 애달픈 악순환을 이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 처참한 비극의 현장에서 그녀는 전혀 뜻밖의 존재를 목격합니다. 바로 “천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든 곳에 계신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대신 전하고 보일 심부름꾼이 필요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사랑과 주권을 눈에 보이는 천사를 통해 자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즉, 지금 마리아는 멀리 떠나버리신 줄 알았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림을 무덤 한 복판에서 천사들을 목격하며 생생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천사들이 위치한 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은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곳의 머리 편과 발편에 각각 한 명씩,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장례를 치를 때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관례적으로 서는 자리입니다. 정리 하자면,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어 누우셨던 무덤 한 복판에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는 장례 위원들이 위치했던 곳에 서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무덤 밖에서 눈물 짓던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그 모든 절망과 암흑의 현장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깊고 깊은 실패와 좌절의 한 복판에서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가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거룩한 부활 절기를 보내며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때, 천사들이 던지는 원론적인 질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13, 14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즉, 그녀는 주님의 죽음을 넘어서는 비극인 시체 유기로 말미암아 힘겨워하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체 훼손은 고인의 죽음 이상의 모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 장모님은 아내와 제가 교제하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명절을 비롯한 중요한 날마다 저는 처가댁 가족들과 함께 장모님께서 묻히신, 양평에 위치한 납골당에 가서 추도예식을 드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숭고한 신앙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신 이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마음 깊이 곱씹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매년 장모님께서 묻히신 묘지공원을 갈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기분도 가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국민 배우”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리나라의 대표 여배우 중 하나인 최진실씨의 묘지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녀는 지난 2008년 10월 2일, 비극적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 그 자체만으로도, 남겨진 가족들은 물론 그녀를 사랑한 팬들에게 끔찍한 시련과 상처였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나지 않은 2009년 8월 충격적인 뉴스를 듣게 됩니다. 바로 최진실 씨의 묘지가 훼손되고 심지어 유골함마저 도난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다행히 머지않아 범인을 검거하고 유골함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최진실씨의 죽음이 안겨준 아픔을 한없이 배가시킨 끔찍한 사건이요, 그 범인은 인면수심의 흉악범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도로 과학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시신에 대해 필요이상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가 숨을 거두었을 때, 최대한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거나, 화장을 하더라도 그 재를 깨끗한 곳에 보관하려 노력합니다. 비록 싸늘히 식은 몸이라 한들, 거기에는 인류전체가 공유하는 애틋하고 가련한 정서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2천년 전 고대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보시길 바랍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진시황의 어마어마한 병마용갱을 떠올려 보시면 금세 이해가 되실 겁니다. 비록 둘 사이의 거리와 문화는 큰 차이가 있지만 시신의 상태가 내세의 상황과 직결된다고 믿었기에, 도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굉장한 규모의 무덤을 무리해서 만들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살아갔던 고대 중동 문화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현세의 몸 그대로 내세에 들어간다고 믿는 믿음이 횡횡했습니다. 설령 그 정도까진 아니라 할지라도 시신에 부여하는 의미가 적어도 오늘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매우 높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랑하고 믿고 따르며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극형을 받아 십자가위에 처참하게 죽임 당한 것으로 모자라 그 시체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토로하는 아픔은 그나마 있던 희망의 불씨마저 사그라뜨리는 그야말로 절망 중의 절망 그 이상임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녀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와 마찬가지로 거듭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15~1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화의 긴장이 더욱 깊고 무거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앞서 천사는 그녀에게 단지 “울음의 이유”를 질문했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찾음의 대상”을 묻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그녀가 죽은 예수님을 간절히, 애타게 찾고 있지만 그러지 못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내의 한계를 넘은 마리아는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겨우 끄집어내어 마침내 원망 섞인 탄원을 쏟아 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새번역 성경)

이렇게 비극 속에 절규하는 여인을 주님은 더 이상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다른 어떤, 긴 설명대신 단 한 마디 말씀만으로 당신의 부활을 드러내셨습니다. “마리아야!”, 바로 그녀의 이름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에서 그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이 불린 바 되었을 때,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관계회복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 역시 “선생님!”이라고 대답하며 친밀한 관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하늘로 오르시어 아버지 하나님 곁으로 가실 터인데, 그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기쁜 소식을, 지금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반역자 예수의 공범으로 처형당할까 두려워 문을 꽁꽁 걸어 잠근 남성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했을까요? 18절 말씀 다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녀가 제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한 말은, “내가 주를 보았다.”입니다. 그녀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며 당신의 부활을 나타내 보이시기까지, 그녀의 생각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혀 존재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무덤가에서 아파하며 절망 속에 몸부림 친 까닭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서글피 울며 쳐다보았던 비극의 장소인 무덤과 그 빈자리는 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증거이며 그것은 도리어 정반대의 눈부신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담고 있는 매우 극적이고 신비로운 역설입니다. 

그녀가 겪었던 슬픔의 무게가 짙으면 짙을수록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찬란한 생명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문에 다시 사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보이신 당신의 모습은 그녀가 처한 역설에 대한 온전한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다른 제자들을 향해, “주님을 보았다.”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단지 부활하신 주님의 겉모습만을 보았다는 뜻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당신을 떠나고 배신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끝끝내 사랑하시며 맺으시는 관계의 회복을 보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절망의 심연에서 용솟아 오르는 진정한 희망과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와 다스림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곧, 우리 시선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반드시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우리를 향해 오는 모든 상황들을, 우리 곁의 모든 사람들을 전혀 다른 눈길로 보아야 함을 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1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새번역 성경)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유물론자가 될 수 없는 까닭은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를 믿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저 눈의 보이는 현실에만 갇혀있을 때, 이 고통의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염없이 눈물짓는 일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심을 믿습니다. 또한 다시사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종말이 파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승리임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머물지 않으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를 무덤 밖에 서서 울게 하시지 않고 부활의 능력과 온기로 다가 오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시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다가가 우리가 본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참 진리와 생명을 온 세상 가운데 나누는 증인의 삶을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더 없이 복되고 기쁜 부활 절기를 보내며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더욱 참되고 올바른 제자로 살아가길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
때때로 우리 눈앞에 캄캄한 어둠만이 가득한 듯 보입니다. 도무지 어디로 나가야 할지 무얼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냥 힘겹기만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참으로 살아 숨 쉬는 희망과 구원의 세계가 펼쳐짐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의 삶을 주님 주신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가 마주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참된 증인과 제자의 길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참 생명과 희망의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의 한없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아직도 슬픔과 어둠에 갇힌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중간고사로 분주한 시간 보내는 학생들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취직을 비롯한 앞길을 준비하는 이들과 고단한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의 나날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군복무와 유학 등의 이유로 멀리 떠나있는 이들의 외로움을 달래주시고 언제 어디에 있건 한 마음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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