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주일, 2017년 4월 9일, 부산진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
요한복음 12장 20-26절 “죽지 않는 죽음”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때때로 숫자는 문자보다 더욱 음산한 어조로 우리를 향해 비극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합니다.
“1, 29.1, 39.5, 11.2”
혹시 이 숫자들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불명예스럽게도 우리나라는 현재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입니다. 이는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OECD 평균 자살률인 12명보다 두 배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게다가 2013년 통계를 보면 하루 평균 39.5명, 약 4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자살은 10대, 20대, 30대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히 “자살 공화국”이라는 불리어도 할 말이 없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살 충동” 역시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2012년 기준으로 ‘지난 1년 동안 한 번이라도 자살하고 싶었다.’라는 설문 문항에 여성은 10.6%, 남성은 7.5%가 ‘그렇다’고 응답했습니다. 특별히 13~24살 사이 청소년과 청년 중 무려 11.2%가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숫자들은 우리 곁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죽음을 택하거나 혹은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고 있다는 어두운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적 현실은 비단 오늘날 대한민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비록 정확한 통계는 파악할 수 없지만 거대한 로마 제국과 부패한 제사장 권력에 의해 끔찍한 수탈과 억압을 당했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 민중들의 삶은 지금 우리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매우 처참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열광하며 모여 들었던 그들 절대 다수는 오늘날 우리의 이웃들보다 더욱더 죽음을 갈구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갔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어둠의 시대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다소 뜻밖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황스럽게도 제자들에게 열심히 살아남으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라는 조금은 차갑고 서운한 말씀을 하시며 제자도의 필수 덕목으로서의 “자기 죽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이 천년 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본능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게 있어 얼핏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께서 당신을 섬기고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죽음”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것은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건강한 욕구마저 부정하고 혐오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현실을 도피하는 자폐적인 경건 훈련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정면으로 대적하는 죄악의 질서와 힘을 거부하며 우리 존재의 근원을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으로 가득히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영화 “명량”을 통해 잘 알려졌다시피, 이순신 장군역시 명랑해전을 앞두고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즉, ‘죽으리라 결심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리라 마음먹고 싸우면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욱 본질적이고 숭고한 죽음을 본문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진정한 자기포기와 죽음의 위대한 역설의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향한 죽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열매를 맺는 썩어가는 밀알이 될 수 있을까요? 특별히 종려주일이자 수난주일인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을 통해 찾으며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보다 생생히 깨달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길 마음다해 소망합니다.
첫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덜 사랑하는 개인적이며 내적인 자기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밀알 비유’의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명백히 대조되는 두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개역개정 성경에 각각 “생명”과 “영생”으로 주로 번역되는 <프쉬케>(ψυχη)와 <조에>(ζωη)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각각의 단어가 갖는 보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프쉬케>는 이 땅에서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명을 뜻합니다. 반면에 <조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이곳에서 영원히 소유하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하면 <프쉬케>와는 대조되는, 하나님만의, 하나님 고유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를 토대로 25절 후반부를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한한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부활의 참 생명'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미워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덜 사랑한다.’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삶과 일상을 가볍게 여기거나 멸시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의 유한한 생명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덜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만의 참된 생명을 향해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학생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열심히 공부해서 그들이 원하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녀가 보다 더 공부에 매진하도록 여러모로 관심을 쏟는 것은 부모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학입시와 학벌은, 결국 덜 사랑해야할 대상임을 깨닫지 못한 채 정작 참으로 중요하게 여겨야할 신앙교육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무척 안타깝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불편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돈을 벌어 재산을 모아두는 것 역시 분명 유의미한 일입니다. 하지만 재물을 선하게 이용하는 대신 돈의 정신에 지배당한 채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헛된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삶의 성취를 결국 무너뜨리고 마는 몇몇 어른들의 모습들은 우리의 가슴을 쓰라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마땅히 덜 사랑해야할 “이 땅위의 생명”을 진정 사랑해야할 “부활 생명”보다 더욱 사랑한 끝에 얻은 안타까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의 여러 욕망들 자체는 충분히 긍정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자녀들이 억지로 표백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더욱더 당신만의 진정한 생명을 바라보며 우리 안에 가득한 욕망의 호흡을 덜어내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공에 흐트러지는 허무한 날숨이 아닌 만유를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옮기는 참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굳건히 다짐해야 합니다.
둘 째,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몇 명의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 곁에는 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 분을 가까이 뵙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직접 찾아뵈려 하지 않고 제자들의 도움을 빌리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당시 매우 적었던, 유대교를 믿는 그리스인으로서 온갖 손해와 어려움을 감수 하였음에도 유대인들로부터 지금껏 철저히 배척당하며 뼈아픈 모욕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흔히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 바깥마당에서 매번 출입금지 명령을 받을 때마다 그 수치와 굴욕은 더욱 날카롭게 그들의 심장을 향해 파고들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역시도 유대인이시기에 혹시나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한 굵은 경계선을 가지고 계실 거라고 지레 짐작하며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주님의 제자들 중 그리스 문화와 언어에 가장 친숙한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뵙고자 하는 그리스 사람들의 부탁을 접하며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뜻 밖에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 이야기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예수님은 당신의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이미 수차례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씀은 본문 바로 앞의 19절에 기록된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라는 바리새인들의 외침과 연결해 볼 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 주님의 영광은 결코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거나 혹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영광을 통해 무너뜨리신 창백한 담벼락은 그 시절 유대교의 독단적인 민족우월주의 만이 아님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드넓은 영광에 대적하며 여러 기괴한 모양의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주변의 수많은 장벽들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미생”이란 제목의 만화와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많은 화제와 인기를 불러 모았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때부터 프로바둑기사가 되려고 준비하며 남들과 다른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꿈을 포기했을 때 결과적으로 그는 고졸검정고시 출신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여곡절 끝에 어느 대기업 무역회사의 계약직 신입사원이 되었습니다. 드라마 곳곳에는 그가 뛰어난 재능과 성실함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고졸출신이라는 이유로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 동료사원들에게 온갖 무시와 천대를 당하는 가슴 아픈 내용들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는 우리 사회 안에 이런 ‘미생’들을 향한 차별이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무척 많은 사람들이 학벌 외에도, 외모와 집안 배경, 출신 지역과 주거환경 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편을 가르며 무시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배제의 문화를 헤치고 나아가 전혀 다른 시선을 이웃에게 건네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온갖 유치한 조건과 얄팍한 모양새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 담긴,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우리 곁에 두신 소중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면서 입술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철저히 거짓이자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그 당시 유대 사회를 심각하게 갈라놓았던 그 모든 담과 벽을 무너뜨린 사회적이며 외적인 자기 죽음이었음을 믿는다면, 또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포용하고 품는 것임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인 공교회임을 사도신경을 통해 가슴 깊이 고백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의 온갖 폭력과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이 일에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큰 울림을 안겨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며 설교를 매듭지으려 합니다. 그는 1856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네 살 때 호주 멜버른으로 이주 했습니다. 그리고 12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 열 명이나 되는 많은 동생들을 돌보며 일찍부터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한 끝에 멜버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고전어 부분 최우수상과 자연과학 부분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오늘날 초등, 중등학교에 해당되는 코필드 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명문사립학교로 발전시키며 큰 명성을 얻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도로 가려 하였지만, 어느 날 조선선교의 필요성과 급박성을 호소하는 글을 읽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집중적인 신학 훈련을 거쳐 목사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89년 10월 2일 이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금세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지며 선교사공의회의 서기로 임명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훗날 언더우드는 그를 가리켜 “열정적이고 아주 탁월하고 경건한 사람,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저라면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아직 여러모로 미흡하지만 조금씩 근대화 되며 외국 문물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고 말 통하는 동료들도 제법 있는 서울에 계속 남아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택이고 그 누구도 감히 비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굉장한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보다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선교사들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며 새로운 선교지를 찾기 위해 기나긴 도보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3주간의 무리한 여정 때문에 그만 폐렴과 천연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곳 부산에 도착하고 바로 다음날인 1890년 4월 15일, 불과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교회 정문 옆에 자리한 기념비의 주인공, 죠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입니다.
그의 죽음은 촉망받는 유능한 젊은 교육가로서 고향에서의 안락함 삶을 포기하고 선교지에서의 불편한 삶을 선택한 개인적이자 내면적인 희생의 결과였습니다. 또한 가난하고 천대 받던 조선인들을 차별 없이 품고 섬기며 하나님의 드넓은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섬김의 마무리 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얼핏 보기에 너무나 허무하고 초라하게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땅에 떨어져 묻힌 하나의 밀알과도 같았던 그의 삶은 절대로 스산한 먼지가 되어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데이비스의 예상치 못한 사망 소식은 그를 파송한 소속 교단에 큰 충격을 안겨주며 조선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숨을 거두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90년 5월 7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우리가 한국에 보낸 첫 번째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을 원한다. 그의 열성적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신앙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 등은 새로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스데반이 일찍 부름을 받고 안식과 보상을 받았던 것처럼 데이비스를 분명하게 축복하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그의 정신을 알리고 그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의 옛 형제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광의 왕관을 받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결심 그대로 호주 빅토리아의 장로교 부인 연합회를 주축으로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조선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그렇게 그는 분명 죽었으나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부산진 교회 모든 성도들의 근원적인 자긍심과 사명이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데이비스라는 위대한 하나의 밀알을 가슴 깊이 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더욱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밀알 비유”는 단지 그들을 향한 하나의 명령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이후 골고다 언덕위에서 당신께서 몸소 행하실 희생에 대한 엄중한 예언이자 자기 사명의 확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허락하시려 기꺼이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고통을 치열하게 끌어안으시고 철저히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무지 살아가기 벅차 죽음을 고민하거나 혹은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살기 위해 죽는, 더 나아가 살리기 위해 죽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는 듯 보이지만 실상 죽음의 길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죽는 듯 보이지만 도리어 진정 사는, 생명의 길 위를 담담히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려 하나의 밀알이 되어 십자가 위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우리의 삶을 한 알의 썩어져 가는 밀알로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욕망보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참 생명을 더욱 사랑하게 하며 우리와 다른 이들을 차별 없이 품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을 결실을 풍성히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내적이고 개인적 죽음과 외적이고 사회적 죽음이 교차하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아낌없는 섬김으로 저희를 돌보시고 이끌어주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복음을 알지 못해 억눌리고 닫힌 자들,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부산진교회 성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계절은 따스한 봄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한 겨울을 보내는 이들의 시린 아픔을 포근한 사랑의 숨결로 감싸 안아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의 병이 있는 교우님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주시고 가정 안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 넘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여러 사정으로 멀리 있는 지체들과 동행하여 주시고 특별히 군복무 중인 청년들을 더욱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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