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5일 목요일

에스겔 17장 22-24절 "하나님의 숲"

교회개혁주일, 2016년 10월 30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에스겔 17장 22-24절 "하나님의 숲"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매트리스(mattress)로 이루어진 동화 같은 세상이 있다고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만큼 사람들은 수십 장의 매트리스 위에서 전망 좋은 높은 위치를 누리며 더욱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직업에 필요한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게을리 일한 사람들은 차츰 자신이 가진 매트리스를 하나, 둘씩 잃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줄어든 매트리스의 숫자만큼 차갑고 딱딱한 땅 위에 점점 가까워지며 불편하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수직의 법칙”에 대해 그리 큰 불만을 갖지 않고 보다 많은 매트리스 위에 살아갈 꿈을 가졌습니다. 비극은 그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트리스 위에 사는 사람들이 차츰 “과도한 불안감”을 가지면서 부터 시작 됐습니다. 그들은 일정 높이 위로 지나치게 올라가면서 부터 점점 “추락”에 대한 공포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추락할 경우 입을 상처와 고통의 깊이가 배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해 매트리스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삶의 위치를 적절히 낮추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트리스가 가져다주는 안전함만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그것을 보다 높이 쌓아 올리는 일에만 눈을 붉히며 매달렸습니다. 

문제는 매트리스의 수가 제한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끝없이 매트리스를 쌓아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매트리스를 불의한 방법으로 악랄하게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미 높은 곳에 위치했던 사람들이 더욱 급격한 속도로 쌓여진 한없는 매트리스 위에 올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더더욱 광적인 초조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만약 땅 위로 떨어졌을 때 그들을 받혀줄 그나마 있던 다른 사람들의 매트리스도 그만 바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위태하게 휘청거리며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험한 상태로 까마득하게 치솟은 매트리스 더미와 날카로운 증오의 눈빛을 감춘 채 자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밑바닥의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의 광기는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매트리스를 갖기 위해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걷잡을 수 없는 욕심과 폭력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들려드린 이 이야기의 의미를 혹시 아시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무수히 등장했던 “제국” 혹은 “제국주의”를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어 봤습니다. 이처럼 제국은 몇몇 소수의 왕족과 귀족을 위해 나머지 절대 다수의 민중의 비참한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질서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은 그 본질상 늘 전쟁에 대한 유혹 앞에 놓이고 대부분 그 것을 이기지 못 하였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가장 제국으로서의 악한 본성에 충실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벨론”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비롯한 구약의 여러 예언서들의 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바벨론 제국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텅 빈 진공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제국의 억압과 폭력이 판을 치는 생생한 역사적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외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며 먼저, 당시 예언자 에스겔이 살아간 현실을 묘사한 에스겔 17장 3-6절 말씀을 차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 5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예언자 에스겔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독수리가 향백나무의 높은 가지와 종자를 꺾어다 큰 물가에 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핏 듣기에 대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다행히 주님께서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12-13절의 설명에 따르면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이 주전 597년에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들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에 대한 비유입니다. 

에스겔 3장 15절 말씀에 의하면 바벨론 제국 안의 이스라엘 포로수용소가 위치한 곳의 이름은 “델아빕”인데 이 이름의 뜻은 ‘홍수의 언덕’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홍수가 일어날 때 마다 자주 물이 흘러넘치는 그발 강가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17장 5절에 “큰 물가”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본문 앞에 있는 비유와 그것에 대한 해설을 통해 묘사된 예언자 에스겔과 그가 섬기고 돌보는 동족 이스라엘의 현실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욕망과 폭력에 충실한 거대한 매트리스의 나라인 바벨론 제국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그리운 고향을 떠나 행복했던 일상의 모든 터전을 빼앗긴 채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어떤 희망도 기쁨도 없이 그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무력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한없는 절망 가운데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암흑의 땅, 델아빕 포로수용소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날마다 예민하게 헤아리며 기도하던 한 사람, 에스겔을 통해 주님의 “말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의 우상에게 패배하여 이스라엘을 버리고 떠난 줄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했던 그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마음을 강렬히 붙잡고 그에게 말을 걸어오시며 그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본문 22-23절 말씀 다시 한 번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3-6절과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큰 독수리와 같은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의 향백 나무의 연한 가지와 같았던 포로들을 사로잡았지만 이제는 “주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가 그 ‘연한 가지’를 가져다가 이스라엘 높은 성전 산에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고통스럽고 처절한 포로 기간이 언젠가 끝을 맺고 하나님의 믿음직스런 손길에 의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는 희망어린 약속의 말씀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성전 산에 심기어진 가지가 무성히 뻗어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아름다운 향백나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각종 새가 차별 없이 쉼을 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그들을 홍수의 언덕에 옮겨다 심은 바벨론 제국과 철저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하시는 까닭은 그 곳에서 또 다른 바벨론 제국, 또 다른 차가운 매트리스 세계를 세워 한낱 그들의 부족신이 되시려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보듬고 쉼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해방과 평화의 공동체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2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두 번씩이나 “나 여호와”를 강조하시면서 당신의 이름을 걸고 기어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누구나 차별 없이 삶의 존엄이 보장되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높은 나무의 키를 낮추시고 낮은 나무의 키는 한 돋움 올려주십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영양분을 독점한 잎사귀는 말리고 바짝 마른 나무에게는 생명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과격한 폭력을 통한 획일화된 삶을 이야기한다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나무들의 “같은 키”와 동일한 “푸르름”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고 이루시는 숲 안에서도 여전히 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몇몇의 적은 나무들이 지나치게 높이 치솟아 태양을 독점하여 다른 절대 다수의 나무들이 충분한 영양분을 얻지 못해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하시며 모두가 조화롭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누리고 호흡하는 세상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처음 얘기한 매트리스 세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성공한 만큼 많은 매트리스 위에 올라가고 실패한 만큼 매트리스를 잃는 “수직의 법칙”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높이 이상 충분히 올라갔을 때 그 이상의 매트리스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장 밑바닥에서 딱딱한 땅의 냉기에 그대로 노출된 사람들을 위해 나누는 “수평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 매트리스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나눔을 두고 꼭대기 사람들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아 게으르고 능력 없는 사람들을 쓸데없이 돕는 어리석은 낭비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적절한 “수평의 법칙”은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끊임없이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의 끝없는 높이를 적절이 줄여, “추락 공포”라는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 해줌으로써 그들에게도 참된 해방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높이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제일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차이가 무작정 한 없이 벌어지는 것을 나눔과 희생으로 멈추게 할 때 매트리스 세상은 더 이상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제국이 아닌 주님의 향긋한 숲 향내가 번져 나가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붙인 것을 기념하는 교회개혁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뜻깊은 날을 맞이하며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교회 개혁은 단지 신앙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어느새 교회 안에 자리 잡은 바벨론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을 숲이 아닌, 사막으로 만드는 잘못된 권력과 질서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와 같은 교회 개혁의 역사는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끔찍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더욱 가슴 무거운 부르심을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수직의 법칙”이 난무하는 차가운 매트리스 세상, 또 다른 바벨론 제국의 폭력이 제한 없이 넘나드는 세계 한 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TV 뉴스 속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직장 등에서 쉴 새 없이 목격하는 매우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의 델아빕 포로수용소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수직과 수평의 아름다운 마주침이 상징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내며 외쳐야 합니다. 영원히, 도무지 떨쳐낼 수 없을 것 만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호흡하는 길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남 보다 한 발 앞서 달리고 약한 이웃들을 짓밟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숲을 이루는 것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그가 베푸신 놀라운 여러 이적들을 본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열광하며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외면하며 홀로 산에 올라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아하게도 당신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하는 빌라도 총독을 향해 “네 말이 옳도다!” 라고 의연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평생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이들의 손길을 단호히 뿌리치신 예수님께서 왜 그 긴박한 재판 속에서는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왕”으로 밝히셨을까요? 왜냐하면 모든 왕들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은 거대한 군중들의 욕심을 채우는 또 다른 제국의 황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에스겔을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참된 은혜와 평화를 완성하시는 다스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맛보고 누리며 죽음 이후는 물론, 언젠가 반드시 도래할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바로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 구원을 우리 각자가 지켜낼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곳곳에 세워나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생명의 바람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또한 그 성령님과 더불어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수많은 개혁자들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 이 성령님과 함께 수직과 수평의 법칙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서로의 어깨에 마음 편히 기대어 쉬는 따뜻하고 포근한 매트리스의 세계, 하나님의 숲을 이루어 나가길 간절히 바라며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가 기꺼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우람한 향백나무이신 하나님. 
저마다 창백하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바벨론 제국과 그 안의 음습한 홍수의 언덕 한 복판에서도 십자가에 담긴 찬란하고 위대한 희망과 조화를 바라봅니다. 바로 그 평화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더욱 올곧게 신뢰하며 성령님과 함께 생명의 숲을 일구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위에 오르시어 수직과 수평의 찬란한 정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생명의 숲을 이루시는 하나님
평화와 개혁의 공동체로 우리를 이끄신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하여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이 사회의 가장 외곽과 낮은 곳에서 불의로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점점 더 서늘해지는 날씨 가운데 몸과 마음의 건강지켜주시고 저마다 꿈꾸며 계획하는 결실 가운데 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남몰래 고민하며 갈등하는 문제들을 해쳐갈 힘을 주시고 언제 어디에서 누굴 만나든 따스한 온기를 나누며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수평과 수직의 질서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숲을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기꺼이 기대어 쉴 나무이신 하나님의 바람과 열매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합니다.

예담: 아멘, 더 높이 오르고자 했던 욕망과 불안에 사로잡혀 나눔의 삶을 외면하곤 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개혁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생명과 조화의 숲을 이루어 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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