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일 화요일

시편 116편 "사랑하십니까?"

부활절 세 번째 주일, 2017년 4월 30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시편 116편 "사랑하십니까?"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목사가 묻기에는 너무나 이상하게 들리는, 어쩌면 뻔하고 당연한 질문처럼 보이겠지만 한 편으로 선뜻, 쉽게 답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항상 어색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인 그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목소리를 귀로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이신 주님은 제 아내나 부모님 혹은 예쁜 연예인처럼 저를 매혹시키는 구체적인 겉모양을 갖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그 분을 향해 “믿는다.” “경배한다.” 혹은 “섬긴다.”와 같은 수직적인 종교 용어는 크게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저이기에 하나님을 두고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본문 속 시인의 모습이 솔직히 저에게는 조금 낯설고 신기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은 우리말 어법을 살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를 1절 가장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원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한다.”이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이 시 전체의 핵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시인의 사랑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차근히 되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의 음성과 그의 간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정직한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지 확신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문득, 제가 예전에 읽었던 수필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신앙 좋은 여자 집사님 한 분께서 방금 앞에 나눈 물음을 마음 깊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실까?’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굉장히 어리석고 유치한 질문일수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막연한 관념으로 덮고 지나가기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께서 아들이 속한 대학 합창단의 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즐겁게 음악을 듣다 그는 문득 신비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분명히 비슷한 또래 남자 대학생들 수십 명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노래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더욱 집중하며 자기도 모르게 그 음성을 분간하는 것이 어머니로서의 본성입니다. 그 집사님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랑하는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어렴풋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그림자를 더듬어 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간구와 애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청신경을 자극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분명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라는 본문 1절의 고백을 더욱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랑고백의 깊이를 보다 생생히 깨달아 알기 위해 그가 주님께 구한 간구의 내용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3~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내용은 결코 얄팍한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 따르면 그것은 “사망의 줄”과 “스올의 고통”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올>은 히브리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머무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3절에 담긴 시인의 상황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죽을 것만 같은 절망’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편이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작성, 혹은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따라서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나라의 패망과 포로생활을 거치며 극한의 고난과 절망을 겪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처참한 “환난과 슬픔” 속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절의 고백대로 바로 “그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이어서 그러한 주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힘 있게 찬양하였습니다. 5~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그는 주님의 은혜와 공의와 긍휼 그리고 구원을 노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도 7절에 보면 자신의 영혼을 의인화 하며 평안히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8절에서 다시 정리하듯이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그의 눈을 눈물에서, 그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정에 이르러서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1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눈썰미 있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이 “사망”에 가까웠음을 3절과 8절에서 이미 두 차례나 언급하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짊어졌던 고통의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 없이 찬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 개인의 고백이 15절에 이르러서 “경건한 자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로 그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지 죽음과 맞닿은 정도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이야기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결론입니다. 그와 같은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눈부시게 값지다고 찬양합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한 대상인 “죽음”이 당신의 눈에 악하거나 더럽게 보여야 맞을 것 같은데 정반대로 그것이 소중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시인이 깨달은 주님의 구원은 단지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한 생명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방법은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라는 엄중한 역설임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그 한 사람만의 일도 일회적인 사건도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반복되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속 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 외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구하시는 분이심을 가슴 뜨겁게 고백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계시지만, 그 분께서 은혜와 구원으로 늘 함께 하시지만, 그렇다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서 빗겨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정면으로 달려들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 더 깊은 좌절과 상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절망 속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끝내 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시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절정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무에 매달려 끔찍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분 역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 못지않게 처절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마침내 이 땅에 부활의 생명과 희망을 열어준 은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분만의 고독하고 치열한 뜻을 마음에 분명히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해서 모든 일들이 기적처럼 잘 풀리지 아닙니다. 우리의 기대와 바람이 원하는 만큼 성취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절망과 허무함속에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때때로 악랄한 음해를 겪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깊은 죽음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처절히 되묻곤 합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결코 죽음에서 구해질 수 없을 거라며 끝없는 좌절에 잠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찬란한 복음이며 오늘 함께 읽은 시편에서 시인이 절절히 노래하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몇 달 전에 어느 청년을 심방하며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불쑥 저에게 어떻게 목회자가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왜 신학을 공부했느냐?’ 혹은 ‘왜 목사가 되려 하느냐?’ 이런 종류의 궁금함은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정말 수백 번도 넘게 들었던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그 물음이 제 심장을 예리하게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본격적으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제 고향교회는 모든 예배시간 마다 통성기도를 하는 뜨거운 교회였기에 그때 어느 수요기도회에서도 저는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내면 깊이 불쑥 ‘네가 나의 말을 전하길 원한다.’라는 뚜렷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메시지가 명확한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저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 이후 저는 목사가 되기로 확실히 마음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한 순간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우여곡절 끝에 수시모집을 통해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에 합격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목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들은 그 음성은,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목사가 되고 싶게 하셨고, 그것을 끝내 스스로의 입술로 구하게 하신 결과라는 사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싶어 하면 할수록 제가 목사로서 결격사유가 참 많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저는 심장이 약해서 무대공포가 심했습니다. 또한 언어치료까지 받았을 정도로 발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제가 목사로서 적합한 지에 대한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졸업한 후 바로 이어 신학대학원에 무리 없이 진학해서 신학공부과 목회 훈련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앞서 얘기한 무대공포와 발음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신학대학원 졸업 이후에 교회 현장에서 온갖 말 못할 상처와 좌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저에게 ‘너 이래도 목사 될래?’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들 역시 묵묵히 지나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목사 안수를 받고 이곳 부산진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여정 끝에 한 청년으로부터 “어떻게 목사가 되셨느냐?”라는 질문을 듣는 순간, 저는 문득 깨닫고 또,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종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되고 싶다는 어느 소년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방식으로 끝내 응답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과정들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순탄하게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들이 전부 이루어진 것도, 원했던 결과를 즉각 얻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과 비참함에 사무쳐 눈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을 제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수도 없이 자포자기 하며 주님을 원망했지만, 제가 애써 몸부림치고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마침내 저를 이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물론 목사로서 아직도 너무나 부족하지만 제 역할과 책임을 나름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적절한 힘과 도움을 날마다 채워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잘 눈치 못 채셨겠지만, 저는 예배 시간 설교하러 강단에 설 때마다 작은 기적을 절감하며, 하나님께서 제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 저만의 경험과 은혜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십니다. 다만, 그분의 때와 방법이 우리의 어리석은 기대와 어긋날 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 한 복판에서 고통에 겨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중하게 보시는 주님께서 깊은 섭리 가운데 가장 합당한 길로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고 앞으로 이끌어 가심을 언제나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의 찬양과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그 모든 경배를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께 실망을 드리는 거라면 참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도, 어쩌면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감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제 삶 깊숙이 다가오시어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의지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조심스레, 주님을 사랑하겠노라고, 사랑해 나가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부디 이러한 고백과 찬양이 이곳에 모인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더욱 온전히 흘러넘치기를 온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기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설교 후 기도
자녀들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은 고통 없는 순백의 세상이 아니라 죽음의 총성이 오가는 절망의 현장임을 날마다 처절히 절감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도들의 그 모든 죽음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시인의 노래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을 거듭 깨닫습니다. 그 신비로운 은혜를 통하여 성도들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가슴깊이 품으며 마침내 그 사랑을 고백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위대한 복음을 삶 속에서 언제나 힘써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임 당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놀랍고 위대한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억눌리고 고통당하며, 절망의 한 복판 위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소중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앞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일들의 걸음을 이끌어 주시며, 고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 부활의 새 희망을 열어주시길 간절히 구합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가정 안에 평화를 가득히 내려 주시어 더욱 밝은 웃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에 귀 기울이심을 굳게 믿으며 온갖 시련을 담대하게 헤쳐 나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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