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5일 목요일

요한복음 6장 35, 41-51절 "생명의 양식"

오순절 후 스물 다섯 번째 주일, 2016년 11월 6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요한복음 6장 35, 41-51절 "생명의 양식"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군복무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순간보다 자신의 장, 단점이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척 좁은 공간에서 사생활을 전혀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여러 사람들과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군대 선임들로부터 제가 가장 많은 타박을 들었던 것은 바로 “식탐”食貪이 있다는, 그러니까 먹을 것에 욕심을 낸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속으로 무척 불쾌해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다를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의 식욕을 갔고 있었는데 괜히 짓궂게 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군복무 시절 제 모습을 냉정하게 돌이켜 보면 그 때 분명 저는 배고픔을 잘 참지 못하고 먹는 것에 집착하곤 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런 지난 날 저의 “식탐”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오랫동안 의아함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군 생활 이후로는 그리 먹을 것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때는 식욕을 못 참았고 그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 하고 저는 한 동안 이를 두고 깊은 궁금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 오랜 물음의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1년에 어느 라디오 상담방송을 참 재밌게 열심히 들었는데, 거기에 매주 고정적으로 출연하신 정신건강의학과 김현철 선생님께서 음식량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절제 하게 먹는 “폭식증”에 대해 설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뇌 속에 만족을 느낄 수 있는 호르몬이 세르토닌등이 있는데 이런 호르몬들이 주로 잘 분비되고 포만감을 느끼는 부위랑 사랑의 만족을 느끼는 부위가 인접해 있다는 게 사실 비극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에 고픈 건데, 그것을 배가 고픈 걸로 착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MBC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 2011년 7월 25일 방송 분)

이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이해되십니까? 사람들이 배고픔을 잘 못 참고 지나치게 먹는 것에 집착하려는 것은 단순히 소화기관으로서 배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랑과 인정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 인생 중 유일하게 “식탐”을 가졌던 군 복무기간 동안, 다들 비슷하겠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 많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군대 안에서 딱히 스트레스를 풀만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먹을 것에 집착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역 후 서서히 자존감을 충분히 회복하면서 먹을 것에 대한 욕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배고픔과 애정결핍의 상관관계를 쉽게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배고프십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여러분의 배고픔은 몸의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인가요?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굶주림인가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할 신약성경 속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오병이어 이적”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네 권의 복음서들 중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와 주제가 비슷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나머지 세 권과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관 복음”이라고 불리는 앞의 세 권과 요한복음이 기록한 “이적” 역시도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한복음에서 공관복음과 똑같이 기록된 몇 안 되는 예수님의 이적이 바로 그 유명한 “오병이어”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복음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소년이 아낌없이 내어 놓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딸들에게 단순히 많은 먹을 것들을 주신 신기한 일이라고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기대하며 찾아왔을 때 그런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함께 본문 3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의 손으로 사람들에게 건네는 어떤 먹을거리가 아닌, 그 분 존재 자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다가선 사람들은 절대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우리가 다른 친구들이 편하게 쉼을 누리고 즐기는 이 휴일 낮 시간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 예배당에 모여 매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까닭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가까워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뜨겁게 기도와 찬양을 한다 해서 여러분의 배고픔들이 매번 즉각 해결 되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루 세 번 공복감을 느끼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심지어 가난 때문에 제 때, 제대로 먹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단어, “생명”의 의미를 자세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그리스어에는 “생명”을 뜻하는 여러 낱말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며 강조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바로 <조에>입니다. 이것을 쉽게 번역하면 “하나님만의, 하나님 고유의 진정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조에>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 즉 <조에>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신께서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처럼 단순히 생물학적 배고픔만을 해결하는 분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배고픔이 갖는 몸의 고통과 그것을 채우는 것의 의미를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넘어 사람들 모두가 참으로 해결하길 원하는 본질적인 굶주림, 도무지 채울 길을 찾지 못해 비슷한 호르몬을 뇌에서 뿜어내게 하려고 필요이상 꾸역꾸역 배를 불리면서까지 갈구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람답게 하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해하는 예수님의 “구원”은 과연 무엇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구원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을 뜬구름 잡는 어떤 종교적인 개념으로 오해하지 마시고 본문 말씀에 귀 기울이며 이렇게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구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모든 배고픔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신 사랑으로 넉넉하게 해결되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물음표가 치밀어 오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수님 생명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온갖 모양의 배고픔들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내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여러 중독과 강박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심지어 매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며 기를 쓰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주림과 목마름들이 좀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44절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만의 온전한 생명이 가지는 두 가지 성격을 깨달아야 합니다. 조금 어려운 한자말로 요약하면 바로, ‘피동성’과 ‘지연성’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구원의 생명은 우리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고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음식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이 의도하고 예상했던 먹을거리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들을 배불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노력 여부와 바람에 얽매이지 않는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 가운데 먼저 내미시는 손길에 의해 우리의 모든 존재는 배부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밀어닥친 여러 결핍과 가난으로 굶주림이 더하면 더 할수록 더욱 위대한 채움의 시간이 다가옴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먹이를 향해 그저 입만 벌리는 둥지 속의 아기 새와 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참 생명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고 돌보는 것은 분명 우리의 책임과 역할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홀연히 찾아오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구원을 맞이하고 또 이루어 가기 위해 온 존재와 인격을 다해 꾸준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구원”의 근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사랑에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러 배고픔으로 고통 받을 때,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 모든 아픔을 먼저 아시고 배불리시는 주님의 위대한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마다의 굶주림에 대한 관심을 너머 온 세계를 넉넉히 배불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다함께 51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람들을 참된 생명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바로 십자가임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렇게 주님께서 죽임당하시면서 까지 베푸시는 구원의 대상과 범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 더 나아가 사람만이 아닌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당연히 그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사랑하시며 또 구원하시어 살리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개인만의 혹은 교회만의 생명과 구원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어린 다스림의 대상을 쉽게 단정하거나 제한해서도 안 됩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과 창조세계 전부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이 드넓은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생명과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 심지어 우리가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이 땅에 가득히 넘칠 수 있도록 내딛는 생명을 향한 여정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사실들을 접하며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이 얼마나 퇴행적이었는지를 새삼 뼈저리게 확인하게 됩니다. 게다가 과거 최태민씨에 부합했던 한국교회의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현 정권과 대통령에 아부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됐나 싶은 자괴감까지 들고 괴롭습니다.

이와 관련한 이러저러한 뉴스들 가운데 제 마음을 특히 더 무겁게 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검찰에 따르면 미르재단이 설립되기 3개월 전인 작년 7월 24일에 박근혜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 17명을 청와대로 불러서 오찬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한류 확산을 위해 기업들이 나서 도와줘야 한다.’며 ‘재단 형태를 만들어 민관 합동으로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재벌 대기업들이 각각 수십억의 돈을 내어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이 설립되었고, 잘 알다시피 그 두 재단은 결국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씨 일가에 의해 사유화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의 언론 인터뷰를 방송으로 들으며 새삼 깨닫고 가슴 아팠던 것은 그렇게 기업들이 예상하지 못한 거액을 갑자기 지출한 결과 정작 자신들의 복지재단 운영에는 소홀히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기업 이미지 개선 등을 목적으로, 조금은 생색내기용이라 할지라도 저마다의 복지재단을 통해 이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이루어진 사회공헌 사업들 대부분이 축소 혹은 폐지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권력 뒤에 숨어 국민들을 농락한 몇 사람 때문에 이미 굶주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가난한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이 더욱더 고픈 배를 쥐고 힘겨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처참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온 세계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느 때보다 간절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하여 그 구원의 생명을 전할 책임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어떤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사회 이론이 아닌 하나님 나라 신앙을 근거로 변화의 물결을 일으켜야할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 중요한 역사적 소명을 가볍게 지나치지 말고 주님의 뜻을 따라 작은 목소리라도 외치고 작은 걸음이라도 내딛기를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배고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배를 불리면서 배 만이 아닌 모든 인격과 존재의 굶주림마저 채우려 몸부림치는 연약함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그 모든 처절한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구하시려 직접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이 땅에 참 생명의 먹을거리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주님 안에서 진정한 배부름과 넉넉함을 발견하시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온갖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는 온 세계를 먹이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의 양식을 전하고 나누는 주님의 사랑스런 아들, 딸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몸과 마음을 참으로 넉넉하게 살리시려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품안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날마다 겸손히 귀 기울이게 하시고 주님의 높고 깊은 구원 생명을 기쁨으로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
몸과 마음의 여러 결핍들을 다양한 손길들을 통해 채우시는 풍성한 은혜에 감사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어 세계 곳곳에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공허와 허무로 괴로워할 때 진리로 위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쌀쌀한 날씨 가운데서 항상 건강 지켜주시고 다양한 만남과 공부와 일 가운데 합당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배고픔에 귀 기울이며 먹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굶주림을 채워 주십니다.

예담: 아멘, 내면 깊은 배고픔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과 더불어 이 세상 여러 모양의 가난을 물리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허전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 오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생명의 양식으로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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