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9일 화요일

역대하 18장 12~13절 "말씀 앞에서"

부활절 네 번째 주일, 2017년 5월 7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역대하 18장 12~13절 "말씀 앞에서"

12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오늘 설교 본문은 역대하 18장 말씀 전체이지만 시간 관계상 핵심적인 두 구절만 함께 읽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집에 돌아가시는 대로 18장 말씀을 한 번 더 정독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남유다왕 여호사밧이 즉위하고 처한 가장 심각한 정치 위기는 북이스라엘과의 첨예한 긴장과 갈등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와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공통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두 나라는 때때로 협력하기도 했고 때론 극한 대립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남유다왕 아사의 통치 후반에 북왕국의 바아사로부터 위협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한 때 순전하고 열성적인 신앙을 자랑했던 그는 그만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아들 여호사밧은 북왕국과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 평화를 이루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을 북 왕국왕 아합의 딸과 결혼을 시켜서 사돈관계를 맺을 정도 였습니다. 이와 같은 여호사밧의 평화정책 자체는 충분히 바람직할 일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인 아합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그릇된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시리아에 해당되는 아람에 위치한 길르앗 라못으로 쳐들어가자는 말이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여호사밧은 평화를 위해 악인과 손을 잡았으나 결국 주님께서 원치 않는 전쟁의 유혹의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4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4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 하더라 

여호사밧은 전쟁을 앞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구했습니다. 이 장면은 평소 그의 생활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중요한 선택에 앞서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깨달아 아는 것을 우선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말에 아합은 이미 사백 명의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이 그 성을 자기 손에 넘겨주셨다는 뜻을 전해 들었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고대 왕이 전쟁에 나서기 전에 신탁을 듣는 것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여호사밧이 오기 전에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의무를 다했다고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웬만하면 아합의 청을 들어주긴 했지만 위험천만한 전쟁을 앞두고 그의 타락한 영적 상태까지 봐주고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여호사밧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참된 예언자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그에게 내키지는 않지만 별수 없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하더라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하니 

아합은 한 예언자의 존재를 언급합니다. 그는 바로 미가야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를 미워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미움의 이유입니다. 다름 아니라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즉, 그는 주님의 앞에 겸손히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과 감정으로 진리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평가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왜곡된 신앙생활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9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집요한 요청으로 미가야를 불러오는 사이에 아합과 여호사밧 주변에는 북이스라엘의 여러 예언자들이 둘러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대표자로 보이는 시드기야는 철로 만든 뿔을 여러 개 들고 나와서 아합 왕이 그것들로 말미암아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북왕국의 거짓 예언자들은 단순히 선포의 내용만을 왜곡시킨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 전달 방법역시 상당히 화려하고 선동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권력자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극적인 종교의식과 언어를 통해 들으며 얄팍한 만족과 위로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한 거짓 예언자들은 그 곁에 기생하며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이렇듯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그 앞에 무릎꿇어야할 왕과 예언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욕망에만 눈이 어두워 야합하며 복음을 왜곡시킨 것이 바로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처참한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아합과 그 주변의 거짓 예언자들이 야훼신앙과 전혀 다른 종교의 모습을 갖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알이나 아세라 종교의 모습으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모세로부터 이어지는 일반적인 구약신앙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 후에 벌어지는 상황을 봐도 분명합니다. 먼저 15절을 보면 아합은 참 예언자 미가야에게 적어도 겉으로는 “야훼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거짓예언자 시드기야는 자신의 예언이 부정 당하자 미가야를 향해 “야훼의 영”이 자신으로부터 어디로 갔냐고 되 물었습니다. 이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진리를 변질시킨 왕과 그에게 기생한 거짓예언자가 스스로 인식하는 종교 정체성은 결코 다른 우상종교가 아니라 야훼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너무나 두렵고도 떨리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그 누가 봐도 “기독교적”으로 보이는 종교적 외피를 두르고 그 누구보다 경건한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더 우선시 하며 도리어 신앙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신앙방식을 낯설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나 소위 “은혜 받았다.”고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냉정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본문 속 아합과 같은 죄악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성숙 시키는 길은 다름 아니라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의문과 질문을 갖는 것입니다.

그저 여러분에게 익숙하고 즐겁고 편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조종하려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숲과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부단히 검증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께 기회가 되는대로 간곡히 부탁드렸듯이 여러분 각자의 독해력과 상황에 맞는 선에서 검증되고 쉬운 신학책들을 부단히 찾아 읽으며 기회가 되는 데로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계속 가져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데 잘 이해되지 않은 신학책을 읽는 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목회자의 올바른 정체성입니다. 목사로서 해야할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분명 매우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주님의 말씀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그것을 예배와 소모임을 통해 올바르게 나누는 일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역사적으로 교회는 부름 받은 이들에게 일정기간 체계적인 신학 공부와 목회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목회자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며 격려해야 할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 말씀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와 그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말씀 선포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철저히 비본질에 불과한 것들, 심지어는 복음과 반대되는 그럴듯하고 화려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교회의 방향을 끌고 가려 한다면, 그것은 화려한 철뿔을 흔들어대는 거짓 예언자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합과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왜곡된 방식의 신앙만을 고집하며 이미 진리를 다 안다는 듯이, 익숙한 경험으로 하나님의 크고 넓은 뜻을 제한하여 낯선 신앙의 모습을 함부로 비난하고 배척한다면,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기를 멈춘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평생 낡고 고루한 옛 틀에 얽매여 있거나 혹은 선동적인 일부 목회자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여러분에게 충분히 익숙한 한국교회의 신앙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로만 해석하는 편협한 근본주의와 개인의 극적인 체험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유치한 열광주의가 주류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신앙 전통은 이천년 역사의 보편적인 기독교 신앙 안에서 지극히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자칫 신앙의 긴장을 놓을 때 여호사밧이 아닌 아합의 길을 따를 위험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며 오늘날의 거짓된 복음에 대해 분명한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그들과 우리 앞에 나타난 예언자 미가야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미가야를 데리러 간 신하는 현재 왕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눈에 불 보듯 뻔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융통성 없고 꼬장꼬장한 미가야가 또 왕 앞에서 눈치 없이 바른 말을 할 때 그에게 닥쳐올 어려움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가야에게 ‘제발 당신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왕이 듣기 좋은 말을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평소에 마가야를 존경하며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답한 미가야의 말을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13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그 이름 모를 신하가 우려했던 상황을 미가야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따라서 위험한 진리를 사마리아 왕궁 한 복판에서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이는 당연히 아합이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말씀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두려워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미가야의 외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문 18~22절은 그가 목격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줍니다. 그는 지금 벌어진 아합과 거짓예언자들의 추악한 종교행위는 그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거짓의 영을 보낸 결과라고 거침없이 외쳤습니다.

이처럼 미가야가 주님의 뜻을 따라 참된 말씀 전한 결과 그에게 찾아온 현실은 혹독하였습니다. 우선 거짓 예언자 시드기야는 그의 뺨을 치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그를 투옥시키고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으며” 혹독한 투옥생활을 하게끔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외친 진리의 생명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2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이와 같은 본문 말씀을 통해 반드시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자동적으로 세속적인 성공과 풍요를 누린 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리스도인이 겪는 모든 고난이 그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진리를 깨달아 알며 그것을 실천하고 전하는 삶은 미가야처럼 모욕과 오해와 시련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헤아려 가며 그것을 나눌 때 겪는 온갖 억울한 일들 속에서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 속 미가야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며 참된 위로와 희망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실패와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져 그 말씀을 전한 자를 끝내 높여 올려 주심을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끝자락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미가야를 통해 전쟁의 패배를 분명히 예고하였음에도 욕망에 눈이 먼 아합과 그런 그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합류한 여호사밧은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왠지 모르게 미가야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거슬렸습니다. 따라서 영악한 그는 순진한 여호사밧을 꼬드겨서 군복으로 갈아입지 말고 왕복을 그대로 입은 채 화려한 의전을 유지하며 전장에 들어갈 것을 제의합니다. 이는 그만큼 훨씬 많은 병사들의 보호를 받는 것이기에 어쩌면 그를 위한 호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는 왕복을 벗고 변장하여 적군의 공격을 여호사밧에게 집중시켜 목숨을 건지려는 교활한 술수 였습니다.

실제로 아합의 예상대로 시리아 군대의 칼끝은 여호사밧에게 모아졌고 이제 곧 죽음을 앞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당신의 뜻을 어기고 어리석은 전쟁에 동참하긴 하였으나 평소에 순전한 신앙을 지킨 그를 주님께서는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만의 신비한 방법으로 구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적군의 지휘관들이 그가 아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추격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3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3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의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나를 진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아합 왕이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살 궁리를 다하였음에도 그는 화살을 맡고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 “무심코”로 옮겨진 히브리어 단어 <르툼모>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온전하다” 혹은 “순수하다”인데 문맥상 “의도하지 않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공동번역 성경은 이를 “마구 쏘아대던”으로 번역했습니다.

오늘날 전쟁에도 극도의 훈련을 받은 스나이퍼 외에는 군사들이 적군을 한 명씩 저격해서 총을 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머리는 참호 안으로 숙이고 총만을 밖으로 꺼내어 난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삶과 죽음이 한 순간에 오가는 공포의 전쟁터에서 그것은 당연한 행동입니다. 이는 고대의 전쟁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적군을 향해 한 사람씩 활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겁에 질린 눈으로 무작위로 화살을 날려내는 전장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화살 하나가 아합의 몸을 꿰뚫었습니다. 그는 비록 왕복은 벗었으나 갑옷을 철저히 챙겨 입고 튼튼한 병거 안에 숨어 자신의 살 길을 집요하게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날려진 화살 하나가 그의 갑옷 가슴 막이 이음새 사이의 아주 작은 빈틈을 파고들어 그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의 참된 예언자 미가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끝내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받고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얘기를 하며 여러분을 겁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본문의 의도에서 한 참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다만, 아합과 미가야의 상반된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말씀 앞에서의 겸손함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경청하며 그 어떤 위협과 어려움에도 그것을 실천하기를 주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그것을 함부로 이용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것인지를 분명히 깨달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직히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따라가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혹시 말씀을 자기 멋대로 끌고 가려 하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미가야처럼 순전하게 진리만을 따르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랍시고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결정적인 삶의 순간과 엄중한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가야처럼 죄 없이 고통당하고 죽임당한 예수님을 바라보며 욕망으로 신앙을 덮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외롭고 손해보고 억울한 일의 연속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났듯이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맞이하는 모든 시련을 하나님께서 영광의 은총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신비 앞에 전 존재를 내려놓으며 진리의 길을 따르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참으로 겸손히 경청해야할 주님의 말씀이 아닌, 우리의 욕망에 부합한 듣고 싶은 말을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곤 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십자가 복음을 가슴에 품고 주님께서 앞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걷는 참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진리와 생명의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나아갈 모든 삶의 길을 신실하게 이끄시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말씀을 온전히 깨닫고 나누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 합니다. 미세먼지를 비롯한 여러 악조건 속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항상 지켜주시기를 구합니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의 모든 관계를 지혜롭게 주관하여 주시고 맡겨진 모든 책임들을 감당하기 부족함 없는 능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여러 사정으로 멀리 떠나 있는 지체들을 돌보아 주시고 주님 안에서 언제나 한 몸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온 마음 다해 말씀을 경청하며
그 뜻을 온전히 따르길 다짐하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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