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6일, 목,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역대상 17장 1~15절 "주님의 방법과 시간"
1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2 나단이 다윗에게 아뢰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3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5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6 이스라엘 무리와 더불어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
7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9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들을 심고 그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다시는 옮겨가지 아니하게 하며 악한 사람들에게 전과 같이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여
10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
11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12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3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14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5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전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 이해를 지난 월요일에 말씀 드렸던 언약궤 관련 내용을 다시 한 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고정되지 않고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알고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는 진리를 분명히 고백합니다.
하지만 고대 유대교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께서 온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다스리신다는 것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는 십계명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가 담겨 있고 뚜껑에는 천사로 장식돼 있는 법궤 혹은 언약궤로 불리는 거룩한 상자 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잘 납득이 되지 않지만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법궤에 대한 독특한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만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구약 성경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한 복판에 임재하시는 거룩한 법궤를 어디에 모시느냐가 이스라엘과 그들의 지도자로서는 매번 중요한 고민거리였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 중에는 부득이 성막 안에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였습니다. 일단 초기 이스라엘 중심지인 실로 지역에 출애굽기에 기록된 대로 성막을 만들긴 했지만 주변에 있는 우상들의 화려한 신전과 비교해 보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집중 되지 않고 불안했던 사사시대에 온 나라의 역량을 끌어 모아 성전을 짓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사사시대 말기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자기들 마음대로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갔다가 적에게 빼앗기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 이후 법궤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사울왕조가 몰락하고 내전을 겪은 후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후 의욕적으로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납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했지만 한 차례의 중대한 실패를 겪었고, 지난 월요일에 읽은 15장에서 보듯이 다시 한 번 더 노력한 끝에 무사히 법궤 이동을 마쳤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17장은 그 이후 다윗의 심정과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1절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다윗은 어느 날 예언자 나단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바로 성전 건축입니다. 자신은 고급 품종인 백향목으로 지은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 주님의 언약궤는 여전히 성막 안에 있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1절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웅장한 성전 건물을 짓겠다는 결심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성전 건축을 다짐하는 성경 내용은 사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용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 집을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전을 짓는 거라며 무리하게 건축을 부추기는데 잘 못 이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편안한 집에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굳이 죄악시 할 필요 없습니다. 또한 많은 헌금을 통해 신앙을 과시하려 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문에 담긴 다윗의 순수한 믿음 자체는 우리가 겸허히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지금 우리도 예배당 건축 가운데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살림살이에 무리가 갈 정도의 과도한 건축 헌금과 이것을 통해 믿음을 과시하려는 태도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다만 여러 가지 그럴듯한 핑계로 내 삶의 풍요에만 집착하지는 않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나친 헌신 강요가 문제였다면 오늘날에는 지나친 무관심이 때때로 잘못을 낳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소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교회 공동체의 필요를 살피며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드릴 때 주님께서 그 헌신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귀한 마음 보다 더 주목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다윗의 소원을 전해들은 예언자 나단은 그 모든 것이 당연히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왕의 뜻대로 하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날 밤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했습니다. 먼저 4~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5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6 이스라엘 무리와 더불어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
이 석 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괜찮다’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법궤를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볼품없는 천막에 모시는 것에 죄송스러워하는 다윗의 생각 자체는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성경 전체가 증언하듯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적인 기준에 연연해 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게의치 않으시는 것은 겉모습 만이 아니십니다. 11~1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1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12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다윗 당대가 아니라 그의 후손들, 구체적으로는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고 그의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또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드넓은 시간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조급함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명백히 대조되는 다윗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통치시기에, 자기가 보기에 합당해 보이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때와 방법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해서 본문 속 다윗의 바람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의 순수한 헌신과 열정 자체는 우리가 본받고 따르기에 합당합니다.
동시에 더욱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시간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열광적인 종교행위를 신앙으로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분주함을 열정으로 합리화 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과 그의 후손들을 향한 영원한 언약의 참된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참된 임재와 동행이 흘러넘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