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일 화요일

신명기 13장 12~18절 "심판에서 은혜로"

2020년 5월 5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13장 12~18절 "심판에서 은혜로"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15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16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17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1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정직하게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본문은 신명기 13장의 결론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13장을 읽으며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성경이 굉장히 논리적이고 치밀한 구성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건너가 살게 될 때,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도록 부추기는 무리를 크게 셋으로 분류합니다.

먼저 1~5절은 어느 거짓 예언자 혹은 무당의 선동을 경고합니다. 이어지는 6~11절은 가족 중 누군가의 꼬임을 가정합니다. 오늘 읽은 12절 이하는 함께 사는 마을 사람 중 어느 무리의 유혹에 대해 꾸짖고 있습니다. 

이처럼 비슷한 주제를 사례만 바꿔서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의 믿음이 얼마나 옅은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나안에서 실제적인 죄의 유혹과 마주할 것도 충분히 예상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신명기 13장은 모세오경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바벨론 포로민들의 뼈아픈 반성과 참회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3절은 성읍 주민을 유혹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개역개정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불량배’로 옮겼습니다. 사실 조금 아쉬운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해당 원문을 직역하면 ‘<벨리얄>의 아들들’인데, 여기서 벨리얄은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사탄을 통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귀의 아들들’이 과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불량배들처럼 행실이 지저분할까요?

쉽게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서 바울이 지적했듯이 사탄도 빛의 천사로 자신을 꾸미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천사들이 투박한 모습으로 찾아오듯이 악마는 그 누구보다 세련되고 친절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사탄의 아들들이 마을 주민들을 유혹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13절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주에 말씀 드렸다시피 이때의 ‘다른 신들’은 단순히 현대적 의미의 타종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삶의 지향과 방식을 의미합니다. 정리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거짓 예언자와 가족은 물론이고 평소 가까이에서 지낸 동네 사람들로부터 꼬드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헛된 무언가를 섬기고 따르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는 방법입니다. 15~16절에 따르면 모세는 해당되는 마을 주민 모두를 죽이고 그곳을 영원히 폐허로 만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처럼 특정 사람들을 ‘전멸’시키라는 말씀은 본문뿐만 아니라 다른 구약성경, 특히 가나안 정복을 다룬 여호수아서의 여러 군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신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과 모순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믿지 않는 이들이 성경을 공격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거부감을 가지고 신약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을 분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오해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명심해야할 점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입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손길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복음이 흠이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의 기록과 편집 자체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다가오신 ‘배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순도 100%의 주님 말씀을 연약한 죄인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 시대의 한계와 오류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수 천 년 전, ‘인류가 아직 어렸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가령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가치들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성별이나 인종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이 투표권이 없는 나라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몇 백 년 전 서양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동물처럼 여기며 마치 사냥하듯 붙잡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되었던 그 옛날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당연히 지금 우리와 매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는 불쾌하고 거북스런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무작정 배척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죽임이 아니라 그러한 강력한 경고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확고히 일깨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마주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섬긴 교회 집사님께서 맞벌이하느라 바쁜 딸을 대신해 외손주를 돌보셨습니다. 어느 날 손주와 함께 외출했는데 카시트에 앉으려 하지 않고 위험한 행동을 반복하였습니다. 집사님은 어떻게 하면 손주의 이런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경찰차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차에 타고 있던 경찰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한 뒤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외손주가 카시트에 잘 앉지도 않는 죄로 경찰서로 데리고 가려는 상황을 둘이 함께 연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집사님 차에 다가가 손주를 근엄하게 구짖고 체포하려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손주가 크게 울면서 앞으로는 카시트에 얌전히 타기로 약속했고 그 이후로는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 행동이 교육학적으로 타당한지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할지라도 어린 아이에게 지나친 공포와 불안을 주는 것은 분명 적절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듯이 때로 엄격한 훈육을 위해 단호한 꾸중과 경고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의 각종 ‘전멸’에 대한 말씀 역시 비슷합니다. 구약 성경 역시 신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 역시 신약 성경에 기된 사랑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정과 경험에는 어긋나 보이고 심지어 잔인해 보이기까지 하는 심판을 예고하시는 까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피를 흘리기 원하셔서가 아니라 강력한 충격 가운데 깨우침을 얻고 죄로부터 단호히 떠나 당신께 안기게 하려는 또 다른 사랑법임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우리가 거듭해서 마음에 새길 진리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아닌 다른 힘과 명예와 재물을 섬기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유일한 행복의 기준이라고, 학벌이 성공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각종 쾌락이 최고의 위로라고 속이는 여러 모습의 사탄의 자녀들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그 대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향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