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시편 116편 1~8, 15절 “들으시는 주님께”

포항제일교회 금요기도회, 2020년 10월 30일, 목사 정대진
시편 116편 1~8, 15절 “들으시는 주님께”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주입받은 하나님, 여전히 제 마음 한 쪽에 화석처럼 흔적이 남아 있는 하나님의 그림자는 너무나 거대하고 두려운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주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저로서는 몹시 어색합니다.

하지만 본문 속 시인은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우리말 어법을 살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를 1절 가장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이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시 전체의 핵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먼저 주목 해야 할 것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의 음성과 그의 간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솔직히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지 확신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문득, 예전에 읽었던 수필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분께서 마음 속 깊이 이런 의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실까?’ 입니다. 언뜻 굉장히 어리석고 유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막연한 관념으로 덮고 지나가기에는 그 질문의 무게감이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사님께서 아들이 속한 대학 합창단의 발표회에 참석했습니다. 한참을 즐겁게 음악을 듣다가 문득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분명히 비슷한 또래 남학생들 수십 명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아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 왔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자녀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노래한다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아들의 목소리에 더욱더 집중하여 그 음성을 분간하는 것이 어머니의 본성입니다. 그 집사님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랑하는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어렴풋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전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 그림자를 더듬어 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간구와 애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청신경을 자극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는 본문 1절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고백의 심층을 보다 생생히 깨달아 알기 위해 그가 주님께 구한 간구의 내용을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따르면 시인이 겪고 있던 시련은 ‘사망의 줄’과 ‘스올의 고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올>은 히브리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머무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드러난 그의 상황은 분명합니다. 마치 ‘죽을 것만 같은 절망’입니다. 따라서 그는 4절에서 처참한 ‘환난과 슬픔’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절의 고백대로 바로 “그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5~8절에 더욱더 힘 있게 찬양하였습니다. 

시인은 먼저 주님의 은혜와 공의, 긍휼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향해 평안히 돌아가라고 외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그의 눈을 눈물에서, 그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을 계속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정에 이르러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1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이 ‘사망’에 가까웠음을 3절과 8절에 이미 두 차례나 언급하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짊어졌던 고통의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망으로부터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 없이 찬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고백이 15절에 이르러서 ‘경건한 자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에게로 범위가 확장됩니다. 게다가 죽음과 맞닿은 정도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이야기 합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결론입니다. 그와 같은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눈부시게 값지다고 찬양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얼핏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해 낸 대상인 ‘죽음’이 당신의 눈에 추하거나 악하게 보여야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 죽음이 소중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의 구원은 바로 죽음을 통한 참된 생명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방법은 죽지 않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엄중한 역설입니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수 없이 반복되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 외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구하시는 분이심을 가슴 뜨겁게 고백하길 바랍니다. 동시에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살아계시지만, 은혜와 구원으로 늘 함께 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빗겨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정면으로 달려들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 더 깊은 좌절과 상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절망 속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누구 못지않게 비참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마침내 이 땅에 부활의 생명과 희망을 열어준 은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분만의 고독하고 치열한 뜻을 마음에 분명히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해서 모든 일들이 기적처럼 잘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바람이 원하는 만큼 성취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죽음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처절히 되묻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결코 죽음에서 구해질 수 없을 거라며 끝없는 좌절에 잠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찬란한 복음입니다. 또한 오늘 함께 읽은 시편에서 시인이 절절히 노래하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에, 당시 제가 섬긴 교회의 청년 하나가 저에게 불쑥 어떻게 목회자가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그 식상한 물음표가 제 심장을 예리하게 찌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본격적으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순간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수요기도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불쑥 ‘네가 나의 말씀을 전하길 원한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정확히 하나님이라고 자신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저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 이후 제가 목사가 되고 싶다고 계속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고3 때 장신대 신학과 수시전형에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다른 학교에는 아예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저는, 제가 목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난날 기도 가운데 들었던 그 음성은 부르심의 씨앗이었음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아 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싶어 하면 할수록 제가 참 많은 결격사유를 가졌다는 잔인한 사실과 직면하였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성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강박적이고 자폐적인 성향의 성격 장애를 가졌습니다. 그런 탓에 주변 사람들을 힘들고 불편하게 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20대에 걸친 꽤 오랜 시간, 마음 한쪽을 절뚝거리며 한없는 열등감과 자괴감 속에 허우적 거렸습니다. 

그 결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신체화 증상으로 고3 때부터 발음기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에게 정확한 문장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가졌습니다. 결국 군 전역 후에 언어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게다가 심장이 약해서 극심한 무대 공포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탁월하고 훌륭한 설교를 하려는 기대는 저에게는 사치입니다. 그저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무난하게나마 설교하는 것도 굉장히 버겁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학시절 내내 내가 과연 목사로서 적합한 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잠겼습니다. 마치 손가락이 마비된 음대생의 심정이었습니다.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에 저는 너무나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신학대학원에서 무리 없이 목회 훈련을 이어가며 앞서 말씀드린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자신감을 가진 채로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온갖 상처와 좌절을 겪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저에게 ‘너 이래도 목사 될래?’라고 말하며 윽박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들 역시 묵묵히 지나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목사로서의 소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긴 여정 끝에 한 청년으로부터 “어떻게 목사가 되셨느냐?”라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문득 깨닫고 또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종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되고 싶다는 한 소년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수도 없이 자포자기 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마침내 저를 이 과분한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물론 아직도 너무나 미흡하지만 제 역할과 책임을 나름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적절한 힘과 도움을 날마다 채워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잘 눈치 못 채셨겠지만, 저는 설교하기 위해 이렇게 강단에 설 때마다 매 번 작은 기적을 실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분이심을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진리를 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도 함께 고백하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높여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 가운데,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모든 경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의 앞날을 가장 선하고 올바른 길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꺼낸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실망을 드리는 거라면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도, 어쩌면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오늘 함께 읽은 시편 말씀을 통해 감히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제 삶 깊숙이 다가오시어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의지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날마다 조금 더 주님을 사랑해 가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부디 이 믿음의 여정에 함께 하는 온 성도님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부족하나마 제가 다시 번역한 문장으로 읽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저의 간청하는 목소리를 
들어 주셨고,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자녀들의 간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현장은 순백이 아니라 고통의 세상임을 날마다 절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시편의 찬양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위대한 역설을 거듭 깨닫습니다. 
그 신비로운 은혜를 통하여 자녀들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깊이 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랑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복음을 삶 속에서 언제나 힘써 전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임 당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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