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2일 토요일

누가복음 19장 1~10절 "올려다보시다"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2021년 6월 9일,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9장 1~10절 "올려다보시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980년대 어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의 사뭇 다른 외모묘사입니다. 남자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굉장한 미남입니다. 반면 여자주인공은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심각한 추녀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어릴 적부터 겉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폭력적인 시선에 긴 세월 시달려왔습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 가운데 받았던 깊은 상처와 고통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그 중에서 그녀가 가슴 아프게 토로하는 과거의 한 장면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저 사실 그때 당신을 믿지 않았거든요. 아니, 실은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 전에 당신이 제 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전 분명 또다시 놀림감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즉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저애에게 가서 말 걸기... 그리고 이긴 남자애들이 어딘가 숨어서 배를 잡고 웃는 거예요. 수군거리는 주변의 그 분위기를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 일을 겪을 땐 언제나 못 박힌 듯 몸이 얼어붙었으니까... 사람의 웃음이... 창(槍)처럼 사람의 배를 찌를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여러분도 혹시 ‘창처럼 날카로운 사람의 웃음에 배를 찔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먹먹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수많은 멸시와 냉소에 오랫동안 마음이 베여봤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늘 따뜻한 시선만 받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우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길에 의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시린 피를 흘리곤 합니다. 외모를 비롯해 학벌과 집안과 성별과 출신지역등의 여러 다양한 이유로 시퍼렇게 날 서고 꼬인 시선을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습니다. 그 결과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에도 수많은 싸늘한 시선에 심장이 찔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랜 여행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오른 쪽에 ‘여리고’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를 두고 ‘세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마태를 비롯한 여러 ‘세리’들을 쉽게 발견합니다. 

반면, ‘세리장’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르키텔로네스>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삭개오만을 지칭합니다. 게다가 동시대 다른 문헌에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세리장’이라는 그의 지위와 역할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그가 평범한 세리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당시 로마의 조세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바로 돈, 즉 ‘세금’입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나 세금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거두는 것이 매우 중요한 통치행위였습니다. 

로마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속주로부터 세금을 잘 걷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식민지에 공식적인 조세 체계를 세우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같이 약탈하듯이, 세금을 억지로 뜯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로마의 세무 체계는 긴 시간 동안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 그들은 예수님 당시 매우 교활한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경제적인 이득은 충분히 얻으면서도 식민지 백성들과 직접 부딪히지 않고 오히려 내분을 일으키는 방법입니다. 바로, 각 지역별로 세금 청부권한을 장기 임대하여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을 중심으로 피라미드 구조로 징수원들이 조직되어 마을 곳곳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그 세리들은 꼭 필요한 양의 세금만 걷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액수보다 지나치게 많은 돈을 그 사회 절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악랄하게 빼앗았습니다. 한 마디로 ‘합법적인 강도떼’입니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세금을 걷어서 최종적으로 바치는 곳이 바로 로마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야만스런 로마가 자신들을 침략하였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로서는 무척 서럽고 비참합니다. 그 와중에, 그러한 로마제국이 든든하게 잘 유지되도록 세금을 걷으며 동족을 착취하는 세리들이 그들 눈에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세리’는 그 시대,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황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경제적인 범죄자만이 아닙니다. 신앙까지도 저버리고 적국에 아부하는 끔찍한 민족배반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리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혐오를 신약 곳곳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단순한 세리를 넘어 신약성경 속 유일한 ‘세리장’입니다. 세리들 가운데서도 단연 눈에 띄는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삭개오를 그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바라보았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가진 재물과 권력이 두려워 드러내놓고 말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그의 왜소한 몸을 향해, 이렇게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습니다. “천박한 로마 앞잡이”, “돈에 눈이 멀어 신앙도 저버린 매국노”,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 찬 놈”. 바로 이것이 그들 눈에 비친 삭개오의 추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리고에는 예수님께서 자기들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도 살리셨습니다. 또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예언자들이 말씀했던 그 ‘메시아’가 어쩌면 예수님일지도 모른다는 가슴 떨리는 기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은 어서 빨리 주님을 뵙고 싶어 했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나타나 그들 사이를 지나 가셨습니다. 그 분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가 점점 무르익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웬 나무 하나에 눈길을 옮기셨습니다. 본문 3~5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 세 구절에는 각 절마다 반복되는 중요한 동사가 있습니다. 바로 “보다”입니다. 눈여겨 살펴야 할 점은 3절과 4절에 두 차례 등장하는 삭개오의 “보다”와 5절에 한 번 언급되는 예수님의 “보다”가 헬라어 원문에는 각각 다른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화면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표를 보시겠습니다. 3절과 4절에서 삭개오의 시선을 묘사하는 “보고자 하되”와 “보기 위하여”로 옮긴 헬라어는 각각 <이데인>과 <이데>입니다. 이 둘의 어근은 <호라오>인데 신약 원문에서 매우 흔하게 684회나 사용됩니다. 

반면 5절에 나무위로 올라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쳐다 보시고”라고 기록한 헬라어 원문은 <호라오>가 아닌 <아나블렙삽스>입니다. 어근은 <아나블레포>인데 신약성경에 25회 나옵니다. 다음 표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아나블레포>는 ‘위쪽 방향’을 의미하는 <아나>와 ‘보다’라는 뜻을 가진 또 다른 낱말인 <블레포>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올려다보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에서도 위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을 묘사하며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헬라어 <아나>는 단지 방향만이 아니라 ‘각각’, ‘중심에’, ‘다시’라는 뜻 역시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블레포>는 <호라오>와는 달리 ‘마음의 눈으로 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아나블레포>는 신약성경에서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 시선 혹은 시각장애인이 치유되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길을 기록할 때 쓰였습니다. 

따라서 이 헬라어 단어는 단순히 ‘위를 향해 보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주목해 보다.’, ‘중심을 보다.’, ‘새롭게 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본문 5절에 나오는 단어와, 같은 문법형태인 <아나블렙삽스>는 신약에 총 일곱 번만 등장합니다. 본문을 제외한 6개 구절 중에서 하나는 예수님께서 탄식어린 기도를 드리며 하늘을 보셨을 때, 다른 하나는 시각장애인이 고침을 받아 눈을 떴을 때, 또 다른 하나는 과부의 두렙돈에 대해 말씀하시며 부자들을 보실 때입니다. 모두가 허공을 향한 멍한 눈길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시선을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세 권의 공관복음 모두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하며 이 <아나블렙삽스>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보신” 모습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신’ 주님의 눈길은 무의미한 습관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날, 비록 사람들 눈에는 초라한 음식에 불과했지만 한 아이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서 손에 들고 하늘을 바라보셨을 때, 갈릴리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분의 눈빛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분명 두 눈망울 안에는 당신 앞에 모인 갈릴리 빈민들을 향한 애끓는 사랑이 가득히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저자가 이와 동일한 단어를 본문에 사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돌무화과나무 위를 향한 주님의 눈길을 묘사하면서 삭개오와 똑같이, 그냥 ‘보셨다.’라고 언급해도 이야기 흐름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올려다보셨다.’라고, 의미심장한 단어를 통해 정확히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는 이러한 정교한 어휘 사용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있는 곳을 향해 결코 막연한 시선을 던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는 ‘나무 위’에 초라한 모습으로 올라가 있는 삭개오, 그 한 사람을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정확히 응시 하셨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한가롭게 산책 하는 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무겁게 그러나 더디지 않게 옮기는 중입니다. 게다가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그들을 로마 군인들이 예의 주시하는 매우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주님께서는 뜬금없이 발길을 멈추시고 그동안 일면식도 없었던 삭개오를 가만히 쳐다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의 눈동자에 비친 그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다른 여리고 사람들처럼 그를 미움과 멸시의 눈길로 보셨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신 후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얼른 내려오라고 하시며 오늘 그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에 따르면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의 집에 머물며 대접을 받는 것은, 그 자가 행한 범죄에 동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을 전체로부터 심각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삭개오에게 주저 없이 다가가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 곁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몹시 실망시켰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영웅적인 메시아로 주님께 기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예수님께서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돌무화과나무 앞에서 주목 하신 삭개오는 당신의 눈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과연 그를 어떻게 바라 보셨을까요? 다른 여리고 사람들과 똑같이 매섭고 냉랭한 눈길을 보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서 같은 민족의 돈을 빼앗는 ‘죄책감’을 보셨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악착같이 재산을 긁어모아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속 깊은 ‘공허함’을 보셨습니다. 그 결과, 체면을 무릅쓰고 나무위에 오르면서까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마치 본문 속 삭개오와 같은 저마다의 깊은 어둠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의지해 간곡히 권면합니다. 내면 속에 그 어떤 아픔과 절망과 결핍이 꿈틀거린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며 그 모든 슬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심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어린 눈길을 경험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시선의 기적’입니다. 내면 깊은 곳을 향한 주님의 예리하고도 따뜻한 시선과 눈을 맞춘 삭개오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 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결연하게 일어나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약속합니다. 8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막연하고 모호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많은 헌금을 바치고 열심히 제사 드리는 것으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동안 자신이 약자들을 향해 저질러 온 구체적인 죄를 명확히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머물지 않고 분명한 실천을 공개적으로 다짐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로마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선언은 예수님께서 그간 일관되게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이 새롭게 된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눈길이 닿는 곳에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시작되는 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우리를 참으로 변화 시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운 시선임을 분명히 명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코로나19를 비롯한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예배를 통해 ‘주님을 보기’ 위함입니다. 마치 그 옛날, 비웃음과 미움의 시선을 이겨내고 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 땅을 살아가며 온갖 시선의 폭력을 겪습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한 상황들 때문에 수많은 멸시를 겪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도드라진 내면의 결핍과 아픔 때문에 괄시를 받기도 합니다. 겉모습만으로는 함부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복잡다단한 모순 때문에 쉽게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창처럼 날카로운 눈초리에 수도 없이 찔려, 결국 지쳐 쓰러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하지 않든, 마음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부여잡고 예수님을 향합니다. 날마다 저마다의 돌무화과나무 위를 오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바라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울먹이며 서럽게 올라탄 나무 위를 온 마음을 다해 ‘올려다보십니다.’ 그리고 ‘너와 함께 머물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눈길로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십니다. 이 세상 가장 위대한 공감의 눈길로 자녀들을 올려다보십니다. 이 놀라운 생명의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통해 위대한 변화의 걸음을 삶과 일상 가운데 꿋꿋이 내딛길 소망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여주인공은 추한 외모로 오랜 시간 깊은 상처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남자주인공의 한결 같은 사랑의 시선을 통해 놀라운 치유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감격을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어두웠던 저라는 여자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사라졌음을... 그리고 이제는 튼튼하게 아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을 향해, 특별히 냉대에 익숙해진 소외된 약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 마음을 담은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가시길 바랍니다. 올곧은 눈길로 세상의 변화를 갈망하며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온갖 잔인한 이유로 힘겨운 오해를 당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의 시선을 건네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가운 심장을 가진 다른 이의 ‘체온과 그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따뜻한 눈길로 올려다보셨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마음 깊이 품어야 합니다. 그 안에 담긴 놀랍고도 위대한 변화의 시선을 더욱더 감사함으로 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사랑의 눈길을 통해 공감의 공동체를 이루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한없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사람들의 차갑고 싸늘한 시선을 받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삭개오처럼 저마다의 돌무화과나무위에 올라 주님을 기다리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이미 너무나 잘 아시고 한없이 따뜻한 사랑의 눈길로 올려다보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로운 눈길을 마음에 분명히 새기고 거짓과 욕망의 길에서 벗어나 늘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본받아 주위 사람들을 향해 공감의 시선을 건네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회복과 변화의 잔치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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