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1일, 주님수세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3장 13~17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때에”, 본문을 여는 말입니다. 이제 펼쳐질 중요한 사건이 어떤 맥락과 흐름 속에 있는지를 힘주어 알려줍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고 등장하셨습니다. 마태복음 이야기 흐름에 따르면 성탄 사건 이후 성인이 되고 처음입니다.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감히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많은 기대를 받은 신인 음악가가 첫 국제 콩물 무대에 서는 것과 조금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는 과연 어떤 때일까요? 어떤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셨을까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3장은 요한의 등장을 소개하며 그의 삶과 선포를 기록합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단연 눈에 띄는 외모와 생활입니다. 그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 말씀이 온 이스라엘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되길 바라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암울한 절망의 시기, 이스라엘은 요한으로부터 커다란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외치는 진리 가운데 세상을 뒤바꿀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 세력을 크게 이루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자기 이름을 높이는 단체를 조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선포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한 인물을 향해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보내는 열망의 눈길을 자기에게서 멈추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과 사명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시선이 한 인물을 향하도록 이끕니다. 그분을 자기보다 능력이 많은 분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신발을 들수 조차 없다며 자신을 낮췄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그 놀라운 인물의 사역을 예고합니다. 바로 성령과 불로 베푸는 세례입니다. 매우 강력하고 위엄있는 존재입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백성을 사로잡을 지도자를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한 자신도 흥분에 찬 기대에 사로 잡혔을 겁니다.
바로 이 때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설렘으로 가득한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고 요한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작은 불꽃에도 금세 불타오를 강렬한 열망이 삽시간에 요단강 가에 번져갔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존경하는 스승 요한이 예고한 대로 눈부신 성령과 불의 역사가 당장 펼쳐지길 기대했습니다. 순간 침묵이 흐르고 예수님의 입술을 주목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전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요한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세례는 매우 친숙한 종교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장면은 여러 성화로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무척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특히나 요한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메시아로서 그의 바람과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요한이 처음으로 한 게 아닙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북서쪽에 쿰란 공동체의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등지고 자기끼리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루실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그 공동체에 가입하기 위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정결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러한 동시대 문화 영향아래 세례를 베풀어 사람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대했던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요한의 권위 아래 무릎 꿇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잘 것 없이 초라해보입니다. 마치 촉망받는 차세대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자신있게 극찬하며 소개했는데, 정작 그가 데뷔 무대에서 리코더 하나만 달랑 들고 올라온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껏 요한이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을 안겨주었던 선포를 한순간에 헛소리로 만드는 상황입니다. 그는 분명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어느 정도 실망과 분노도 섞여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한은 예수님을 만류하며 말합니다.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인데, 어떻게 자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느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깨달음에 이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주님의 뜻을 왜곡합니다. 심지어 요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은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높입니다. 험난한 시대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그의 삶과 사역은 길이길이 남을 훌륭한 업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눈부시게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 요한 역시도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번번이 벗어나기 일쑤입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가 다 담기에는 주님의 뜻이 무한히 넓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평면이 아니라 거대한 다면체 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복음에 대해 ‘강조 부사’를 사용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이런 분이라고, 교회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이런 내용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확고부동한 판단에는 다분히 사람의 그릇된 욕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한국교회는 대한민국 경제의 고도성장과 맞물려 급격한 양적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 복된 역사입니다. 그 결실로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언제부턴가 왜곡된 신화가 교회 안에 자리잡혔습니다. 바로 일방적인 성장주의입니다. 양적 성장과 규모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숱한 비극을 제가 굳이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씁쓸하게 공감하실 겁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성도 개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신앙 좋은 그리스도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한국교회 안에 어느샌가 자리 잡은 전형적인 틀이 있습니다. 술, 담배 절대 하지 않고 교회 생활에 매진하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복 받아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고 기적처럼 병도 낫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가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신앙공동체를 헌신적으로 섬기는 것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가난을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시는 걸 저는 목사로서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동시에 우주보다 무한히 넓은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은 결코 태양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판단은 어딘가 항상 엇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잠잠히 먼저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당신을 만류하는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서 ‘이제’라는 말은 ‘즉시’ 혹은 ‘지금은’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요한에게 받을 세례는 나중에는 불가능하지만 지금은 가능한, 현재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결과로 ‘모든 의’를 이루는 게 ‘합당’합니다.
여기서 ‘의’는 사람들 사이의 막연한 규범이나 정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 일’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실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명으로 예수님은 요한을 초대하셨습니다. 마침내 요한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세례는 이른바 침례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장로교회 전통에 따라 물을 머리에 붓는 방식으로 세례를 집례합니다. 하지만 요한이 행했던 세례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자칫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집례자의 역할입니다. 세례받는 사람이 자신에게 완전히 기대어 맡기게 한 후 물에 들어갔다가 일으켜야 합니다.
이러한 세례의 의미를 고대 서아시아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다와 강 같은 큰 물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물을 아름다운 자연이자 지혜의 근원으로 여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와 완전히 다릅니다. 생존을 위해 지중해를 수없이 오가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흔히 중동이라고 불리는 서아시아의 신화와 설화 속에서 강과 바다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악이 활동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물에 완전히 잠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하게 잠수하는 게 아닙니다. ‘작은 죽음’입니다. 철저히 무력한 모습으로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내 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다시 물 위로 일어나 호흡합니다. 그 순간 ‘작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이렇듯 세례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의 명확한 대비를 함축한 의식입니다. 그날 요단강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더 생생히 와 닿는 상징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세례를 만류한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지 누가 누구에게 주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행동의 내용이 너무나 깊은 어둠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메시아와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민족을 위기에서 구할 ‘성령과 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초라한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몸소 받으신 세례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삶과 사역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끊임없이 낮고 천한 곳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을 향해 ‘호산나’라고,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와 갈채 속에, 크고 우람한 말이 아닌 나귀 새끼를 타고 지나가셨습니다. 무릎 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날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명한 예고편입니다. 주님이 가르치고 증언하신 진리를 몸소 생생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바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낮아지고 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사람들이 유치하게 나눈 위, 아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결단입니다. 힘을 휘두르며 어떻게든 남들 위에 오르려는 세상의 권력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세례를 받는다는 것,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본받는 삶을 사는 의미가 바로 이러합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희생입니다. 모욕과 굴욕을 견디는 쓰디쓴 인내와 섬김입니다. 너무나 아프고 고단하고 힘겨운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욕망과 감정을 거슬러 가는 고된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찬란한 위로가 있습니다. 16~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몸을 일으키시자 눈부신 장면이 요한 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이윽고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동시에 나타난 성경에서 매우 드문 장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는 매우 어려운 숙제입니다. 사실 명쾌하게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를 지향하는 본성을 지니십니다. 그런 까닭에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하시어 사랑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그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즉 세분의 존재와 사귐 그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확한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드러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하늘과 단절돼 보이는 깊은 어둠에 잠기는 때야말로 오히려 주님을 명확하게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장 낮은 곳을 향할 때,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찬란한 영광과 맞닿는 신비와 이어집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절 다시 한번 더 함께 읽겠습니다.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의 1차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온 세상을 살리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 구원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예수님을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가장 깊은 바탕에 무엇보다 사랑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이 진리를 분명히 믿고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너무나 중요하지만 너무나 쉽게 잊히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내가 인정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제대로 규칙을 따르지 못하며 벌을 내리는 무서운 분으로 이해합니다. 그 모든 오해를 내려놓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인식이 정말 중요합니다. 거기에 신앙의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통해 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 채정호 교수님의 인상적인 주장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참고로 채정호 교수님은 우리교단 소속 교회 장로님이시고 트라우마 연구 권위자이십니다. 채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울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울한 나를 싫어하는 게 병이다.”
단순하게 들리지만 매우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가장 힘들고 아프게 했던 지난 순간을 가만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괴로우셨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건 그 자체 혹은 다른 누군가가 아닙니다. 그 상황에 놓인 나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너무나 무력하고 못나 보이기에, 오랫동안 슬픔과 고통에 잠깁니다. 그렇게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워한 끝에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향한 미움 때문에 뒤틀리고 그을린 신앙을 지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합니다. 거짓 자존감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모습도 쉽게 접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거듭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아들, 딸로 삼으시며 한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뭔가 대단한 걸 해서가 아닙니다. 거창한 종교적 경지에 이르고, 누가 봐도 감탄할 헌신을 감수해서도 아닙니다. 여전히 하루하루 버겁게 살아가고, 부족한 내 모습에 괴로워하고, 숱한 방황과 실수를 반복하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따르길 소망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우리 주님의 눈물겨운 사랑 고백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죽음을 앞두고 쓴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프레드 브래트먼(Fred Bratman)이라는 청년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프레드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영적 갈망을 지닌 유대인 이었습니다. 그에게 헨리 나우웬은 복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관련 문장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프레드, 자네가 이 편지를 다 읽었을 때 정말 꼭 기억하길 바라는 한 마디가 있네. 지난 한 해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특별한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지. 바로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였네. 난 그 단어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내게 주어진 단어라고 확신하고 있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나사렛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이 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네.…… 프레드,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네.…… 그렇지. 그 목소리가 있었네. 위로부터, 내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부드럽게 속삭이기도 하고 크게 선포하기도 하는 목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는 비열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목소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은 거짓 소음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멍들게 합니다. 도무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약점과 결핍을 집요하게 들추어냅니다. 남들과 계속 비교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귓가에 속삭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사랑받을 자격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비웃고 조롱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으로 거짓으로 물리치고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요단강으로 향하는 우리에게, 주님께 몸을 맡기고 깊은 물 속에 잠기는 우리에게,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따스하게 말씀 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와 같은 복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삶을 일구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삶의 혼돈에서 일으켜 모든 의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사람들의 예상과 기대를 벗어나 기꺼이 당신을 낮추시고 세례 받으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섬김과 겸손을 발견합니다. 그런 주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앞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때, 저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더욱 생생히 안기게 됨을 깨닫습니다. 기꺼이 내려놓고 낮아질 때 하늘에 잇대어 살아감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온전히 품고 긍정하며 세상의 거짓을 이기고 참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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