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6일 화요일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2026년 1월 4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송구영신예배 때도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이 순간 매우 놀라운 신비를 느낍니다. 만약 1년 전 누군가 저에게 2026년 첫 주일 예배를 양평 정배리에 있는 아름다운 전원교회 담임목사로서 드릴 거라고 얘기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을 겁니다. 전혀 제 계획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주님께서 저를 가장 합당한 자리로 이끄셨음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성도님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곳 정배리에 처음 오셨을 때, 예전부터 계획해서 오신 분들보다는 그야말로 어쩌다가 오게 되신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분들 또한 그러합니다.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은 내 뜻과 내 의지와 무관한 경우가 허다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곱씹다 보면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 길을 걸어갑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어두운 여정을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다가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길 반복합니다. 그러다 어느 샌가 작은 어둠과 바람 소리에도 움츠러들며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자연스런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의 야곱은 창세기 47장 9절에서, 자신의 나이를 물어보는 이집트 파라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것은 비단 야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두려움을 안고 나아가는 나그네 길’이라고 조금 거창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모두에게 어느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1절에 기록된 하나님을 향한 호칭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반복하며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사용된 ‘창조’와 동일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동사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마침 제가 부산에서 살았던 사택 근처에 그가 피난 중에 머물러 살았던 곳을 기념하는 이중섭 거리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때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탄생 백주년을 기리는 전시회가 있어서 모처럼 뜻깊게 그의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새삼 제 눈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두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듯이, 이 그림은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캔버스나 종이가 아닌 은박지 위에 그렸습니다. 담배갑 속에 있는 얇은 은박지입니다.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난한 미술가인 그에게는 마음껏 그림을 그릴 재료가 넉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은박지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현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조금 거창하게 “은지화”(銀紙畵)라고 부릅니다. 미술평론가인 김주삼씨에 따르면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표현기법입니다. 1955년 뉴욕현대미술관은 한국인 화가의 그림으로는 최초로 그의 은지화 세 점을 구입했습니다. 은지화는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이중섭”만이 주어가 되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끔씩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한 은박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구겨지고 쓸모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기꺼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찬란한 은혜를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와 같은 이사야 43장 1,7절에 담긴 놀랍고도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시며 구원하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인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본문에서 현재 이스라엘이 처한 나그네 길에 대입되어 더욱 그 실체가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구절은 본문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사막 길의 대표적 위험 요소인 “물과 불”로부터의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이미 과거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사건인 "출애굽"에 대한 회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앞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바다를 안전히 건너게 하셨고, 또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던 분이심을 그들은 거듭 기억하였습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고대 중동사회에서의 물과 불의 위험성을 정확히 유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오늘날과 비교할 때 극히 미미했던 그 시대는 자연재해에 절대적으로 취약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대부분의 섬 지방에는 무속 신앙이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할 때,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 앞에 거대한 공포와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에 큰 물을 건넌다는 것은 훨씬 더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고대 군주들의 절대적인 과업중 하나가 "물을 다스리는 것"(治水)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만 고려해도 우리는 고대인이 물을 대할 때 갖는 가공할 두려움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리적 배경인 광야는 밤이 되면 맹추위가 몰려오기 때문에 불을 지피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 다른 곳에 옮겨 붙었을 때, 물이 없어 메마른 곳이라 불이 삽시간에 번지기는 쉽지만 그것을 끄기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불은 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구체적인 공포의 실체를 명확히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과거 출애굽 여정에서도 그러하셨듯이 이제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걸음 속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어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으로 하여금 지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하게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여러분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힘겨운 건강 문제로 걱정되고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속에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며 삶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5절에서 거듭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백성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의 피조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결단입니다. 

부모에게 있어 이웃집의 예쁜 아이와 우리 집 얄미운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로서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옆집 아이가 아무리 귀여워도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말 안 듣고 속상하게 해도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에서 연주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4성 장군이신 저희 부대 사령관님이 참석하는 행사 전날에는 무척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합주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군악대장님이 초등학교 저학년생인 어린 외동딸을 데리고 합주실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아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러셨던 것 같았습니다. 편의상 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영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장님께서는 딸을 한쪽 구석에 앉히고서는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들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점점 인상을 찌푸린 후 마침내 목소리를 높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앳된 음성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의 어린 딸, 영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러자 의외로 “딸 바보”셨던 대장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군악대원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나머지 연습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군악대장의 말과 행동이 “너무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영희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습 도중에 부대원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등병이 “대장님!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장담하건데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깊고 깊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 겁니다.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등병에게 군악대장이란, 두려움으로 맺어진 철저한 계급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영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고 오히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신비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얼마든지 불쾌할 수 있는 동일한 말과 행동이라도 아들, 딸이라면 도리어 미소 짓게 만듭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그 어떤 잘못도 너그러이 품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시고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본문 속 이스라엘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뜻을 업신여겨 받은 심판으로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사랑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 하나님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때로, 도무지 이해못할 시련과 아픔을 겪을 때,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라고 주님께 따져 묻고 응석부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정배교회 성도 여러분, 인생의 여정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곁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음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시어 나그네 길을 걸으셨습니다. 권력과 재물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당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여정을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마무리 하기 전에,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완성하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안겨주시는 참된 평안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시련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여정에 접어들었습니다. 어쩌면 각자 올해 중요한 계획을 세우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 모든 일들에 하나님의 풍성한 돌보심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 올해에도 여러 실패를 겪게 될 것입니다. 좌절하고 아프고 눈물겨운 나날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생을 불안과 염려 속에 보내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늘 가슴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작품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안고 삶의 여정을 힘차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축원합니다.


기도
자녀들을 지으시고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고된 나그네 길을 지나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지치고 낙심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희를 주님께서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새해 첫 주일 예배로 나아가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올 한해 순간순간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쁨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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